아빠없는 아빠의 장례식

작은 딸

by bom

1.

지금 돌이켜 보면, 그날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까지는 아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갑자기 드문 드문 아빠 생각이 나는 날이었던 걸 보면 어쩌면 아빠가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현듯 아빠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었지만 나는 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의 매일 그렇듯,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는 늦은 오후에 다같이 영상통화를 하면 되니까. 어쩌면 나를 대신하여 조잘조잘 떠들 아이들 없이 아빠와 나 단 둘이만 하는 전화가 조금은 어색할 것 같아 일부러 전화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지금 이 시점에 생각이 나는걸 보면 아마도 나는 그때 아빠에게 바로 전화를 걸지 않은걸 평생 후회하며 살 예감이 든다. 아니 아니, 어쩌면 그때의 내가 빠르게 아빠가 보낸 신호에 응답하여 아빠와의 통화가 성사 되었다 해도 결코 먼지 한톨 만큼의 후회라도 남지 않았을리 없다. 예고없는 부모의 황망한 죽음앞에서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는 후회와 반성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식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날 첫째 아이 하원길에 아이가 원하는 대로 아파트 단지내 놀이터에 들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오후날씨는 놀이터에서 놀기에 딱 좋은날씨였고, 며칠 간 아이의 감기 때문에 바깥외출을 자제했던 터라 간곡한 아이의 부탁을 쉽사리 거절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둘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는데, 내가 술래 차례가 되었던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에 얼굴을 묻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뒤돌던 그 순간 심한 어지러움에 나는 그대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을 뻔했던 것이다. 아이가 놀라서 엄마 괜찮아요? 하며 물었을 만큼 나는 당혹스러움에 딸아이 앞에서 표정관리까지 어려웠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느낌의 그 어지러움. 나중에 엄마로 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추측해 보면 아마 그 시각 아빠도 나처럼 어지러움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난데없는 뇌출혈 때문에... 그렇다면 이때 아빠는 나에게 두번째 신호를 보냈던 것일까. 어쨌든 나에게 온 그 이상한 어지러움증은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첫째 아이와 나는 그렇게 몇 번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한 뒤 둘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는 늦은 오후가 되었고 친정 부모님과의 영상통화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에게 걸려오는 전화였다.


오후 6시에 언니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안부전화일리가 없다. 어린자녀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라면 아마도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평일 오후 6시에 한가로이 누군가와 전화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언니도 마찬가지로 어린 두 조카의 저녁을 준비해야 할 오후 6시에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면 아마도 급한 일 일 것이고, 높은 확률로 좋지 않은 일 일 것임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받기 싫은 그 전화의 통화 버튼을 누르며 나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 언니의 전화는 '급하고 좋지 않은 일'을 전하는 전화였다. 아빠가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계신다는 전화였다. 엄마가 쓰러진 아빠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10분전에 응급실에 도착한 상태라고. 언니와 나는 각자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여 병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나는 부엌 가스레인지앞에서 서서 하고 있던 계란말이를 마저 했다. 이 와중에 계란말이라니..? 아빠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응급실의 차가운 베드에 누워있는데 나는 내새끼들 먹일 저녁 반찬으로 계란말이를 하고 있다니.. 이때부터 였을까.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이기 시작한 때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빠르게 집으로 와 줄것을 부탁했다. 허겁 지겁 남편이 도착하자 마자 나는 용수철처럼 집에서 튕겨져 나왔다. 거의 꼭대기층에 머물러 있는 엘레베이터를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 없어 나는 지하 주차장까지 계단으로 뛰어 내려와 시동을 걸고 아빠가 계신다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두 번이나 아빠가 입원을 했던 우리에게는 나름 익숙한 그 병원으로. 퇴근시간에 차는 많이 막혔고, 나만큼이나 급한 일일까 싶게 내 앞으로 차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와중에 나는 내 앞으로 끼어들고 싶어하는 저차에게 양보를 하면, 그렇게 선의를 배풀면 내 아빠가 의식을 찾을 수있을까? 하는.. 앞뒤 맥락 없는 이상한 생각들을 하며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서 떠난지 40분만에 병원주차장에 도착하여 차를 버리다 싶이하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미 도착한 언니는 이미 울었는지 얼굴이 창백하고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필시 아주 아주 안좋은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모두가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는지 의사와 언니와 엄마는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로 와서 아빠의 현재 상태를 메모지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CT 판독 결과 아빠의 지금 상태는 중증의 뇌출혈로 이미 뇌가 많이 손상되어 사실 상 뇌사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였다. 오늘 놀이터에서의 어지러움증과 비슷한 것이 정수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휘감싸 하마터면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것 같았다. 엄마가 옆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렇게 정신을 놓았을것이다.


뇌사. 뇌사라니.. 그럼 방법이 없는것이 아닌가. 아니.. 이것 저것 시도해 볼 수도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의사는 아빠 현재 상태 설명의 말미에 수술 여부에 대해 결정해달라고 했다. 혹시 라도 모를 1%에 희망을 걸 것이라면 수술을 해보자는 말이였다. 수술중에 사망할 확률도 매우 높다는 조건도 빼놓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 세 모녀는 그 1% 희망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렇게 나의 엄마는 수술 동의서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해야만 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수술하는 것이 과연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아마도 우리 세모녀 모두에게 들었을 테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을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죽음을 코앞에 둔 가족앞에서. 아빠를 수술실에 들여 보내기 전 잠깐 만날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이미 파랗게 변해가는 아빠의 팔과 다리를 여기 저기 주무르며 수술은 잘 될것이라고 주문처럼 되풀이하며 말하고 또 말했다. 그때 의사가 다시 우리에게로 왔다. 지금 아빠의 상태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싶었는지 아빠의 가슴팍을 꼬집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게 아프거든요. 지금 제가 이렇게 꼬집었는데도 환자분은 느끼지도 못하시고 계셔요." 안그래도 엄살이 심한 아빠인데 저렇게 꼬집으면 어쩌나. 순간 나는 의사의 가슴팍을 똑같이 꼬집고 싶어졌다. 상태는 충분히 알겠으니 앞으로 더이상 우리 아빠를 꼬집지 말라고 쏘아 붙이고도 싶었다. 아무 잘못없는 의사에게 나는 그렇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팔을 하염없이 주무르며 팔뚝위의 아빠의 오래된 문신을 만져보았다. 타투라고 하기엔 촌스러운 초록색 독수리가 애처로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참새라고 했고, 아빠는 독수리라고 했던 어쨌든 새 모양의 그 문신. 어린시절 나는 그 문신이 부끄러웠다. 모양과는 상관없이 몸에 문신이 있는 것이 부끄러웠던것 같다. 내가 어릴 적 그때만 해도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사람은 대게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지금 내 몸에 문신, 요즘 말로 타투가 두 개나 있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 하니, 어쩌면 나는 문신은 핑계고 그냥 아빠 자체가 부끄러웠던건 아닐까.



2.

작은 키에 생활 근육으로 이루어진 다부진 체격, 오똑한 콧날과 작은 얼굴의 아빠는 미남형 이였다. 아주 가끔 온 가족이 다같이 외출 하는 날에는 아빠는 멋쟁이 신사처럼 새하얀 흰 옷에 반짝 거리는 구두까지 신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가 으쓱 할 정도로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팔에 있는 참새 문신만 빼면 완벽하다 생각과 함께. 언젠간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면 상견례는 아빠 팔이 가려지도록 긴팔을 입는 계절에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싶다. 그 참새 문신이 그토록 싫어서 아빠에게 어쩌다 그런 문신을 하게 되었느냐고 종종 물었다. 아빠는 젊은시절 군복무 중에 어쩌다 하게 되었다고 답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아빠는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된 이야기 부터 제대 후의 어떻게 살아왔는지 까지 줄줄이 소세지 마냥 그렇게 본인의 추억을 곱씹곤했다. 그렇게 종종 듣는 아빠의 어린시절은 지독한 가난으로 얼룩져 있었다. 철도역에 다녔던 아빠의 아빠는 이른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마도 지병이 있었을 것인데, 정확한 병명도 모른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건 아니였을까, 하고 연극의 대본처럼 아빠는 늘 같은 대목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했다. 아빠의 한탄 섞인 그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어린 나는, 만약 그때 나의 친할아버지가 제 때에 병원에가서 치료만 잘 받았어도 아빠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이상하게 생긴 독수리를 팔뚝에 새길일은 없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아빠의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 시대의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러했듯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아빠의 엄마는 아는사람의 아는사람 소개로 부잣집 식모살이를 하며 아빠를 포함한 네명의 아이를 먹여 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몇 해 더 흘렀지만 입에 풀칠만 근근히 할 뿐, 식모살이로 청소년 넷을 기르는 데에 늘 어려움이 찾아왔다. 당연히 살림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성인이된 큰 누나와 작은 누나는 가방 공장에, 아빠는 군대로, 막냇 동생은 가출을 했다고 했다. 아빠가 이후에 결혼을 하여 본인의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부모, 형제들과 복닥복닥 살았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였다고.


아빠의 군대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누나와 작은 누나는 결혼을 했고, 막냇 동생은 여전히 가출을 주기적으로 했다. 자연스럽게 아빠는 아빠의 엄마와 단 둘이만 살기 시작했다. 아빠의 엄마는 젊은 시절 고군부투했던 식모살이의 결과로 지긋지긋한 류마티스 관절염을 얻게 되었다. 아빠는 매번 그 병은 꽤나 지독한 병이여서 양약, 한약, 심지어 좋다는 민간요법까지 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고 회상했다. 온 몸의 뼈 마디 마디, 관절 하나 하나 빠짐없이 송곳으로 쑥쑥 쑤시는 것 같은 고통에 매일 밤 끙끙 앓아 아침의 엄마 얼굴은 주름이 하나도 안보일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다고 했다. 그런 몸 상태 때문에 50대의 젊은 나이 부터 집에만 있을 뿐 바깥 일은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는 군대 제대 후 바로 홀로 생계에 뛰어 들어야 했다. 아빠는 어쩌면 군대에 자원입대 한 것은 생계에 뛰어 들 본인의 앞날을 이미 예상하고 스스로 정신수련을 자처 했던게 아닐까, 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아빠는 참새 문신과 함께 정신 수련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엄마와 먹고 살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시도했는데, 그 일들만 나열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만큼 정말 많은 직업들을 가졌었다. 내가 들었던 아빠의 그 수 많은 직업 들 중에서, 아빠가 가장 잘 선택한 직업은 신문사 총무과 직원이였다. 왜냐하면 그 신문사에서 나의 엄마를 만났으니까. 아빠는 엄마를 신문사에서 처음 보자마자 양파같이 동글동글하고 반들반들한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얼굴값을 하듯 일 처리 방식도 반듯 반듯하여 더 호감이 갔다고했다. 한마디로 첫 눈에 반한것이였다. 아빠는 엄마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오랜 궁리 끝에 매일같이 도시락을 쌌다고 했다. 반찬이라도 변변 찮았을까. 김치볶음과 콩 자반과 밥이 전부인, 어쩌다 달걀 프라이를 넣은 그야말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목적에 충실한 그런 도시락이였다고 했다. 출근해서 엄마의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 거기서 끝. 같이 먹자, 맛있게 먹었냐 같은 흔한 멘트도 없었다고 하니 원체 말주변 없고 숫기 없는 성격은 지금이나 그때나 같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묵언의 도시락 공세는 몇 달간 계속 되었다고 했다. 엄마도 처음엔 아빠의 참새 문신이 무서웠지만 늘 한결 같이 정갈한 도시락을 싸오는 모습에 어느새 문신은 더이상 중요한 부분이 아니였기에, 그렇게 묵묵히 도시락을 받아 먹으며 아빠를 지켜 보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부터는 퇴근 후에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를 기다렸다가 엄마가 나타나면 말없이 버스 따라 타고는 엄마의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고 했다. 또 그렇게 몇 달이 흐른 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3.

수술은 8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나의 남편은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인 뒤 시댁에 맡기고 병원으로 왔다. 형부도 두 조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도착했다. 우리 모두는 수술실앞 대기 의자에 줄줄이 앉아 아무 말없이 아빠가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수술실에서 간호사가 네번이나 피를 가지러 바쁘게 나왔다가 들어갔다. 아마도 수혈을 계속하고있는 듯 했으나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수술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걸 말로 내뱉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수술전 의사의 설명대로라면 8시간 걸린다는 수술은 반절인 4시간만에 끝났고 고된 얼굴의 의사가 터벅 터벅 걸어나왔다. 우리는 일제히 의사앞에 모여들어 그의 입이 열리기 만을 주시했다. 무겁게 열린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 대로 였다. 머리를 열어 보니 CT로 보았을 때 보다 상태가 더욱 안좋았으며, 뇌가 많이 부어 손을 쓸 수없었다는 말. 급한대로 고여있는 피는 빼기는 했으나, 아마 곧 차오를것이라고. 우리는 절망했다.


아빠는 여러개의 줄을 주렁주렁 달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 다시 짧게 아빠를 볼 수있었다. 수술 전보다 얼굴과 머리가 많이 부어있었다. 아빠를 마지막까지 힘들게 했던건 아닌가 다시 미안해 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수술전 의사가 아빠의 가슴팍을 쎄게 꼬집으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던 그말이 지금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수술복에서 가운으로 환복한 의사가 다시 나타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빠의 몸은 계속 혈압이 떨어지고 불안정해 질 것이라는것, 그렇게 되면 승압제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혈압을 올려 놓겠지만 상태가 나빠 질 수록 승압제를 쓰는 주기는 짧아지고 투약량은 많아져 결국 심장, 콩팥등 장기 여기 저기에 무리를 주어 합병증이 생기고 말 것이라고. 우리는 승압제든 뭐든 쓸 수있는건 다 써서 아빠의 숨만 붙여놔 달라고 의사에게 빌다 싶이 부탁하고 또했다.


그날 우리는 병원에서 나와서 남편은 아이들이 있는 시댁으로, 형부는 조카들과 본가로, 언니와 나와 엄마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세 모녀는 갑자기 일어나 이 황당한 일에 넋을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긴 긴밤을 꼬박 지새웠다. 이따금 엄마는 '잘 될거야. 아빠 일어 나실거야'라고 중얼 거렸는데, 그 말이 우리 자매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엄마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것인지는 분간이 잘 안되었지만, 그때 마다 나는 동의의 이미로 힘없이 고객을 끄덕일 뿐이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새벽같이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 실로 올라가기 전 병원 1층의 의료기기나 소모품 따위를 파는 상점에 들렸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50대 중년 남자분에게 어제 간호사에게 받아 놓은 입원생활에 필요한 제품목록이 적힌 종이를 건네니 기계처럼 움직여 1분 만에 커다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하루에 한번 허용되는 면회시간이 아직 삼십분 넘게 남았는데도 이미 많은 환자 보호자들이 중환자실 앞에 죽 길게 줄을 서있었다. 면회객들은 다들 하나 같이 우리와 같은 얼굴들을 하고있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처럼 무표정도 아닌 슬픈표정도 아닌 특유의 표정으로 본인의 순서가 되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우리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다가 엄마와 언니와 나의 순으로 아빠를 5분정도 짧게 만날 수있었다. 아빠는 밤사이 더 힘들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밑이 불룩하게 부어있는걸 보니 혈액순환이 안되어 그런가 싶었다. 넓은 중환자 실에 늘어선 침대들을 죽 훓어 봤다. 적어도 아빠가 있는 라인에는 아빠보다 젊어 보이는 환자는 없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아빠의 귀에 말했다 아빠, 이 중에 아빠가 제일 어려. 이렇게 이른 나이에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어?라고. 그리고 이렇게 뒷붙였다. 제발 이렇게 우리를 떠나지 말라고. 아빠가 훌훌털고 일어나만 준다면 아빠가 가보고 싶다던 스위스에 함께 가보자고. 내가 꼭 데려갈 거라고, 그러니 아빠는 죽음을 이겨내고 우리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4.

빠듯한 살림과 빠듯한 살림이 만나 더 빠듯한 살림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행복했다고 했다. 아빠는 그렇게 신혼생활을 추억하곤 했다. 2년 간격으로 딸도 둘이나 얻었다. 여전히 아빠는 신문사에 다니고 있었고 아빠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아빠를 위해 도시락을 싸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따듯한 점심을 먹이고 싶어 점심 무렵 도시락을 싸서 아빠에게 전해 주고 왔다고 한다. 그것도 매일 같이.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다른날 처럼 엄마는 아빠의 도시락을 싸서 어린 나는 업고 조금 덜 어린 언니는 손을 잡고 버스를 탔고 했다. 아빠의 신문사 근처의 정류장에 버스가 섰고, 황급히 내린 엄마는 큰 딸을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버렸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한 뒤였고, 엄마는 울며 불며 아빠의 신문사로 뛰어들어가 딸을 잃어버렸음을 알렸다. 아빠와 엄마는 함께 버스 회사로 달려갔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행히 언니를 찾을 수있었다. 아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니를 꼭 끌어안고 집까지 왔다고 했다. 아빠는 나에게 그날을 잊을 수없다고, 살면서 가장 놀랐던 날이였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빠는 딸들을, 그중 첫째 딸인 언니에 대한 사랑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록 끔직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주말이면 어린딸을 오토바이에 태워 여기저기를 드라이브했다. 옆동네 작은 슈퍼에 들러 주머니의 동전을 긁어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전부였지만, 아빠는 그 시간들이 참 행복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날은 네 가족이 함께 동네 시장을 갔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신발가게 앞에 죽 진열해 놓은 예쁜 빨간색 구두가 6살 언니의 마음을 사로잡고 만것이다. 언니는 그 빨간 구두를 사달라고 졸라댔지만 가난한 아빠의 주머니에는 구둣값이 있을리가 없었다. 난처해진 엄마는 언니가 좋아하는 호떡을 사주겠다고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이미 구두에 마음을 빼앗긴 7살은 호떡이고 꿀떡이고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아빠는 그 모습을 차마 계속 보기 힘들어 엄마에게 언니를 맡기기로 하고 앞서 걸어갔다고 했다. 귀 뒤로 어린 딸의 울음 소리에 얼마나 마음이 쓰렸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저 딸아이 신발 한 켤레 사줄 수 없는 형편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때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시장 바닥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는 지폐 몇 장이 아빠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구두를 사고도 남을 돈으로 보였다고 했다. 아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조금씩 걸어가 그 돈을 한 발로 밟고 한참을 서있었다고 한다. 혹시 돈의 주인이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5분동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돈은 나에게 온 돈으로 결론 짓기로 했다고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몇 초 간격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불 같은 성질의 아빠지만, 젊은 시절에는 꽤 순순한 모습이 있었네, 싶다. 그러다 눈물의 부성애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지폐의 주인은 아빠가 허용한 5분내에 나타나지 않았고. 아빠는 쿵쿵 거리는 심장 박동을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신발을 매만지는 연기까지 선보이며 지폐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도저히 더이상 감출수 없는 신이난 발걸음으로 여전히 울고 있는 언니와 달래다 지쳐 피곤한 기색의 엄마의 곁으로 돌아왔다. 빨간 구두를 들어 바닥에 앉아 울고있는 언니의 발에 신겼다. 엄마는 동이 동그라져 어떻게된 영문인지 재차 물었지만 아빠는 씨익 웃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도 아빠는 그 빨간구두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눈물 콧물에 활짝 웃는 어린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겠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또 다시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다. 여러 손 재주가 많았던 아빠는 어린시절 배워둔 페인트 칠 기술로 좋은 기획를 잡아 규모가 꽤 큰 회사의 도장반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그 회사의 이름이 TV나 신문에 나올 때마다 엄마는 아빠가 그 회사에 다녔을 시절이 가장 마음이 편했던 시절이였다고 아쉬운듯이 말했다. 오래된 앨범에서 그회사 체육대회에 참석한 아빠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볼 때면 엄마의 말이 어느 의미인지 어느정도 알 것같기도 했다. 단정한 차림새의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아빠의 모습이 찍힌 그 사진. 아빠는 한 동안 회사에 잘 다녔다. 일처리도 꼼꼼하고 야무져서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인이 속한 그룹의 조장이 되었다고 했다. 아마 그것이 아빠가 처음 써본 일종의 감투였을 것이라고 엄마는 나중에 언젠가 말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아빠는 조장이라는 그 타이틀에 맞게 더욱더 열심히 일했지만 원체 사람좋아하는 아빠는 회사에 대한 조원들의 분만이나 애로사항등을 필터없이 총대매고 윗선에 끊임 없이 알렸다고 했다. 뻔한 결말로 당연히 아빠는 상부의 눈밖에 났고, 아빠를 지지하던 이른바 아빠의 조원들은 한명도 빠지지 않고 아빠가 벌인 일들이 본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양 외면했다고 했다. 아빠는 그렇게 또 조직생활에 강한 염증을 느껴야 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페인트 칠은 아빠의 적성에 잘 맞았다. 그래서 그랬던 것인지 국민학교때 좋아하는 과목이 있다면 미술이였다고 했다. 준비물을 챙겨가기도 어려운 형편이였지만 짝꿍이 찢어준 낱장의 흰 스케치북에 물감들을 섞어 또 다른색을 만들어 내 그림 그리는 일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고. 아마도 아빠는 예술쪽으로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빠는 어차피 혼자서도 잘하는 일이라면 굳이 회사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거 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런 생각을 깊게 할 때면 이미 잘 나가는 사업가가 된 듯한 기분이였다고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있는 돈을 전부 털어 장비를 사들인 후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거의 매일 꾹꾹 눌렀다고 했다. 아빠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들떠 도무지 회사에서도 집중이 되지 않는 수준까지 되자 평소 하지 않았던 실수도 자꾸 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빠는 본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원하는대로 회사를 때려 치우고 사업을 시작하게 된것이다.


'마리아 특수 칠 공사' 이것이 아빠가 만든 회사의 이름이였다. 마리아는 내 천주교식 세례명이다. 아빠는 누가 봐도 나보다는 언니를 더 예뻐하는데 왜 언니 이름이나 세례명을 넣지 않고 내 세례명을 집어 넣었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있다. 그 만큼 신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성공이 간절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객관적으로 봐도 좋았던 아빠의 기술을 발판으로 사업은 꽤 잘 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매번 월셋방을 전전했던 우리 가족에게 '우리집'이 생긴것이다.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진짜 우리집. 아빠는 그 집을 샀을 때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비록 18평 반지하였지만 남향집이라 낮에는 1층처럼 해가 잘 들었던 그집. 그집은 거실까지는 해가 잘 들었지만 안방과 작은방은 늘 눅눅했다. 여름의 장마철이라도 되면 장롱안의 이불에 곰팡이가 생길 정도였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곰팡이가 번진 이불 호창을 뜯어 깨끗하게 빨고는 옥상으로 올라가 탁탁 털어 널었는데 꽤 귀찮고 번거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웃는낯으로 한 엄마의 얼굴이 기억되는 걸 보면 곰팡이가 피어도 내집은 내집이였던 모양이다. TV속 단란한 가족들 처럼 엄청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럭 저럭 남들처럼 웃는 날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97년 IMF가 터지지기 전까진. 아빠의 사업은 실내 인테리어로, 문이나 몰딩 등을 고객이 원하는 색으로 칠해 주는 것이였다. 아빠는 독창적인 색의 배합으로 흔한 색이 아닌 감각적이고 세련된 색을 찾아 내어 고객에게 권하곤 했는데.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크게 만족해 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빠'마리아 특수 칠 공사'는 금방 입소문이났다. 한달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달이 더 많았다. 아빠는 그때 돈이 쌓이는 통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종종 회상하곤 했다. 규모가 큰 공사는 여러 사람을 단기로 고용하여 진행했지만, 규모가 작은 공사는 아빠 혼자 하루 이틀만에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조직생활,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이미 수차례 상처를 받아왔던 아빠는 혼자서 하는 이 일이 천직이라며 매우 만족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