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탄생하는 순간

이금이 <허구의 삶, 2019>

by Skyblue

1. '비밀'이 탄생하는 순간


'한 번'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해 본 적 있니? 매일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 흘려보내기 일쑤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지나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 번'의 일이지. '노력'이나 '후회'라는 말도 '다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설 수 있는 말, 그저 한 번의 일로 스쳐 지나가 버릴 뿐이라면 후회나 노력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조금은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지만, 삶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해. 우리는 살아가는 매 순간 틀어져버린 선택과 결과에 머리를 쥐어짜며 몸부림치곤 해. 결코 그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그 전과의 상태로 돌려놓고 싶어 하지.


'비밀'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될 것만 같은 오로지 나에게만 허락된 것. 이 안에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가두어두는 거야.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속여가면서 말이야.



2. <허구의 삶>


마흔아홉의 어느 날, 제천 경일고 동창생 SNS에 갑작스럽게 부고 소식이 올라왔어.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와 마음껏 추억을 나누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삶을 살았던 '허구', 그리고 그의 장례식의 마지막 메시지를 대신 올려준 것은 어쩌다 그의 삶에 깊게 관여하게 되면서 비밀을 알아버린 친구 '상만'이야.

허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제천으로 전학 온 아이였어. 사투리가 아니라 서울말을 쓰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허구'라는 이름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아이들을 매료시켰고, 틈이 날 때마다 간식을 쏘면서 금방 아이들이랑 잘 어울렸지. 이에 비해 '상만'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데다가 어머니가 사고로 일찍 죽는 바람에 외삼촌 집에 얹혀살면서 학교에서는 공부에, 집에서는 외삼촌 일 거들며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지. 외삼촌의 가게는 쌀집이었는데, 상만이는 주로 쌀을 배달해주는 일을 했어. 어느 날 과수원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으로 쌀을 배달하러 갔는데 공교롭게 그 집이 허구네 집이었던 거야. 학교에서는 말 한 번 섞지 않던 사이였는데, 쌀을 가져다주다가 같이 밥도 먹게 되고 방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이후 시간을 함께하는 날이 점차 많아지면서 서서히 '친구'라는 이름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어.


상만은 허구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부러워했어. 상냥하고 헌신적인 부모님이 계시고, 가정 형편도 부유해서 설사 공부를 안 한다고 해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됐거든. 그런데 허구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만에게 흔쾌히 나누어주었어. 그러던 어느 날 상만은 허구의 일기장을 보게 돼. 무심코 읽기 시작한 친구의 이야기에는 '여행자 K'라는 아이가 등장했어. 분명 허구의 일상을 적은 기록인 것 같은데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묘한 일기였지. 스스로를 여행자이며 이 삶 또한 하나의 여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며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게 돼. 마흔아홉의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허구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 상만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위해 장례식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거야.



3. 비밀을 대하는 방식

(p.250) 상만은 허구와 자신이 많이 닮았음을 깨달았다. 환경과 처지가 달랐을 뿐 섣불리 꺼내놓을 수 없는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똑같았다. 하지만 상처를 덮는 방식은 달랐다. 허구는 아무것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제 이름처럼 허구의 세계를 떠돌았고, 상만은 거짓으로 다진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 쓰며 살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기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십대이지 않을까 싶어. 나 또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게 된 때가 그즈음이거든. 상처를 받은 것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일지라도 그것을 상처로 인식하고 현실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 또한 그 때부터니까.


책 속의 두 주인공 허구와 상만은 어린 시절에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겪게 돼. 허구는 사실 부모가 어린 자신을 납치해서 아들처럼 키우고 있었던 것이고, 친부모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조하고 있었어. 상만은 어린 시절 연탄가스가 방으로 스며들 때 방문을 굳게 닫고 나오는 바람에 엄마를 죽게 만들고 말아. 아무도 그 사실을 상만에게 묻지 않았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점차 알게 된 거지. 엄마를 죽게 한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야.


크기와 정도는 다르겠지만 비밀을 안고 사람마다 헤쳐나가는 방식은 다른 것 같아. 허구는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삶 속에 '여행자 K'라는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 차마 선택하지 못했던 삶의 순간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어. 상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사실을 감추고자 '열심'과 '노력'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고.



4. 언젠가 말하고 싶어 지는 순간이 온다면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기에 비밀인 것인데도 자꾸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든 말로 털어내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부담감 혹은 억울함과 울화가 조금이라도 씻겨 내려가는 것을 기대하는 걸까?


허구는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비밀로 간직하고 삶을 마감해. 상만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도 죽음 이후로 맡겨두었으니까. 하지만 상만은 허구의 삶을 보며 '비밀'을 가리려고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속이고 살았던 지난날을 되돌이켜 보게 돼. 그리고 허구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보며 몇 번인가 친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머뭇거렸던 때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자신과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까 싶어.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허구와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상만을 두고 누구의 선택이 더 나은지는 가늠할 수 없어. 각자의 삶에서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정도는 다 다를 테니까. 그리고 상처로 얼룩진 비밀은 밝혀지는 순간 많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돼. 허구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


그럼에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는 꼭 털어놓고 싶어 졌어. 그 비밀이라는 것 말이야. '한 번' 밖에 없는 삶,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조금이나마 덜 외롭고 고독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쓰라린 아픔을 딛고 살아갈 나 자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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