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권태기 2.
첫번째 치료자: 이집사님
자정도 넘은 야심한 시각까지 두세 시간을 맘껏 통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나보다 세 살 위지만 전 사역지에서 아이들끼리 친하기도 하고, 내 아이의 교사이시기도 했던 터라 친언니처럼 따랐던 이 집사님. 집사님도 동생처럼 챙기지만 사모라고 한편으론 깍듯했던.
한참을 얘기하다가 남편 욕을 들입다 내던진다. 자기 주관이라는 게 도통 없는 사람이라고. 나도 남자한테 한 번쯤은 의지라는 걸 해보고 싶다고. 집사님 왈, 자기 주관 없는 남자는 집사님 댁에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그 비단결같이 고운 맘을 지닌 자신의 동서도 와서 신랑 욕 오지게 하고 갔다고. 엊그제 이 집사님이 속한 찬양단에서 박 집사님이 콜록거리니까 남편 집사님께 옮았냐며 한 권사님이 놀리기를, 거기는 아직도 그런 거 서로 옮기냐고. 그 권사님네는 서로 각자 방에서 방문 잠그고 산 지 오래되어 그런 거 안 옮기고 산다는 소리에 찬양단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우리네들 중년 부부들은 왜 다들 집집마다 이럴까? 하기야 허구한 날 꿀 떨어지는 것도 정상은 아닐 것이다. 이 나이에 적당히 꿀맛, 적당히 신맛, 짠맛 있어야 재밌지. 제일 무서운 건 아무 맛도 없는 것이다. 진짜 맛이 없다. 더럽게 없다.
아무리 쫓아다니며 이야기하고 싶어도 코 골고 자는 내 남편. 소소한 일은 물론 집안 대소사에 힘쓰는 일까지 죄다 아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이 집사님 남편. 자신의 친가족 특히 어머니 챙기는 거 아내에게 맡겨두고 나 몰라라 한다는 집사님네 동서분의 남편. 집에 오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쳐 닫고 각자 생활한다는 이 권사님 남편. 이건 부부 소통 거부이다. 다들 우리의 남편들은 왜 이렇게 소통이란 게 싫을까?
사실 나와 남편은 꽤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것도 주저리주저리 쫑알대기를 좋아하는 내 말을 정말 잘 들어줘서 좋았다. 나도 이효리처럼 말하고 싶어서 남편과 결혼했던 것 같다. 백가지 맘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이 한 가지 장점이 나머지를 모두 커버하고 남을 정도로 내가 남편에게 원했던 건 딱 한 가지 소통이었다.
내가 혼자서 기승전결 다 말해버리는 말하기에 맞장구 쳐줄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의견을 말해보라면 코 골아 버린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코 고는 소리이다. 아마 우리 부부가 만일 이혼을 한다면 이혼 사유가 바로 저 코 고는 소리일 것이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그간 내가 남편에게 참아온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내는 소리이다. 피곤하니까 들어줄 수 없을 때 들렸던 소리였고, 생각하기 귀찮아서 회피할 때 들렸던 소리이고, 결정하기 두려워서 도망칠 때 들렸던 소리이다. 난 내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맘의 균열이 불러일으키는 멘털의 붕괴를 체험한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멘붕과 내면을 부숴버릴 듯한 심장박동의 진동, 그리고 정신 이탈이 함께 반응하게 했다. 이후 남편에게 쏟아내는 폭탄 같은 말들의 정확한 워딩, 그건 내가 아니다. 잠시 악령에 빙의된 듯 나도 모르는 어떤 인격이 튀어나와 남편을 혹독히 핍박하고 있었다. 코 고는 소리로 내 멘털을 박살 냈듯이, 내 혀는 온통 단검이 되어 남편의 내면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 집사님께 터놓고 말했다. 난 내가 부교역자 안사람이라고 어떤 특별대우를 받길 원하지 않는데 성도들은 뭔가 거룩할 듯한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대치를 갖고 나를 너무 예우해준다. 난 이게 부담스럽다. 사모는 호칭어이지 직분명이 아니다, 난 그냥 평범한 성도로 집사님들과 이웃처럼, 언니 동생처럼 교제하는 게 좋은데 이 집사님이 딱 그렇게 해줘서 좋다고.
목사네 가정도 중년의 위기를 겪으니 너나 나나 할 거 없이 다 똑같다. 단지 죄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에너지를 조금 더 확고하고 철저하게 할 뿐인 거지. 내가 목사 아내가 돼서 귀신이나 하는 짓거리를 남편에게 하고 있으며 죄인 본성을 철저히 보게 되는데 이걸 성도들이 알면 얼마나 덕이 안 되겠냐고. 이게 괴로우면서도 실질적으로 화나는 부분은 지속적으로 남아, 계속 나의 전신을 덜덜 떨게 만드니 미치고 팔딱 뛰겠다고. 내가 어떻게 이런 나로서 성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냐고.
오히려 이 집사님이 나를 위로한다. 저렇게 착한 목사님네 가정도 다 우리와 비슷한 문제를 겪어내는구나, 그 과정에서 죄인 본성 깨달아 더욱 주님 붙들며 나아가는구나, 내가 겪는 모든 마음의 병을 치유할 분은 주밖에 없구나. 이러며 얼마나 위안이 되겠냐고. 자꾸 사모의 전형성에 갇히지 말고 오히려 이웃으로서 같은 문제 겪어내는 위안의 아이콘이 되어 봄이 어떻겠냐고. 사모의 고정 역할에 함몰되지 말고 솔직하면 창의적이고 신선하지 않겠냐고.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간에 근 세 시간을 통화한 끝의 이렇게 엉뚱한 결론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 안 듣겠다고, 못 듣겠다고 문 닫아걸며 코 고는 남편보다 백배 낫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나이 들수록 점점 친구들을 만나기를 좋아하고 남편을 짐스러워하는 거였구나. 이렇게 나를 마구 부서뜨리는 내가 누군가에겐 위안이 된다면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 한 치의 미련도 남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