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권태기 3.

두번째 치료자: 김교수 언니

by 집밖 백선생

대학에서 함께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교수님이자 선배인 김언니는 학부 때부터 언니-동생으로 친했다. 강의 팀티칭과 공동 연구로 매주 회의를 하는 중 몇 주 전에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이로써 내 우울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눈으로 본 유일한 사람이 김언니이다. 같이 사는 남편도 모르던 내 우울증을 왜 언니만 볼 수 있었을까?

그날 남편이 전화로 묻는다. 회의 중이라 못 받은 부재중 전화에 김언니 전화가 있었다며 무슨 일이냐고. 언니 성격 상 어떤 용무일지 짐작했지만, 나도 모른다고 전화해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남편이 내게 함께 병원 가자며 나오란다.

병원에 갔지만 예약이 있어야 한다며 결국 진료를 받지 못한다. 결국엔 진료도 처방도 못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민망해하는 남편 면상으로 화살 같은 말을 꽂아버린다. 입에 칼 물은 게 맞다. 남편이 답답해서 신경질 나고, 그런 남편에게 악담을 하는 내가 추악하게 느껴져서 신경질 난다. 누군가와의 상처는 주는 것도 받는 것만큼이나 정말 아프다.

이후 다시 김언니를 만났을 때, 그날 언니가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아끼는 동생이 많이 아픈데 동생 혼자 그곳에 간다면 내 맘이 아플 것 같다고. 가까이 있으면 언니가 같이 가주고 싶다고. 정말 바쁘시겠지만, 함께 가주시겠냐고

그 말이 따뜻한 온기 덕분이었을까? 난 그 후 차츰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도 바빠서 병원도 못 가서 아픈 곳 붙잡고 일하다 울다가를 되풀이하며 나는 점점 병들고 피폐해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언니의 그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나를 이미 치료하고 있었다.

잘 사귄 친구 하나 열 남편 안 부럽다. 아무리 친밀도가 높은 친구라고 하더라도 함께 사는 가족의 친밀감을 추월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상식이겠다. 그러나 사실 가족의 친밀도는 사회적으로 절대치가 있겠으나 친밀도가 친밀감과 비례하진 않는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힘겨워 번 아웃된 나의 맘과 몸에 가족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던 것 같다. 내 맘과 몸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 못 일어날 때는 내 손을 잡고 끌고가 주는 에너지를 받으며 애정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말로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사랑한다며, 사랑한다는 맘이 느껴지는 행동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사랑한단다. 난 말로만의 사랑도 너무나 황홀해서 내 모든 시간과 노력, 마음을 다해서 이 꼬락서니가 났으니. 이젠 가족들이 사랑한다는 말은 억지로 무언가를 강매당하는 기분마저 든다.


위기의 나의 입에 칼을 물리는 남편과 위기의 내 맘을 치유하는 언니의 차이는 남녀의 차이일까? 남자들의 무딤과 여자들의 섬세함의 차이일까, 남편의 무관심과 친구의 애정 차이일까.

여자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친구를 찾고 남편을 귀찮아한다던데 나도 이제 문턱에 온 걸까? 친정아빠가 엄마한테 남편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여자라며, 혹시 아빠가 먼저 천국 가시면 반드시 재혼하라고 했다는 말에 엄마가 그랬단다. 이 나이에 남의 집 영감 수발할 일 있냐고. 남자라면 아빠 하나로도 징글징글하다고. 할아버지들이 혼자가 되면 재혼을 하지만, 할머니들은 혼자가 되어도 잘 사시는 이유가 이걸까?

남편의 무심이나 무관심, 무정, 무미와 건조는 성격인지, 남자들의 공통점인지, 아니면 정말 변한 건지. 남편이 원래 그런 사람이거나 남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지금의 내가 시기적으로 겪고 있는 번아웃과 우울감이 해결되면 적응될 것이다. 그러나 변한 거라면... 후자의 경우는 선택의 여지는 단 하나. 변한 사람과의 여생은 내겐 무의미하다. 내게 의미 없는 걸 인생에 전시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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