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권태기 4.
마지막 치료자: 엄마밥상
내 아픈 게 극에 달했을 때, 주님께서 내게 보내신 이는 친정엄마였다. 몸은 토사 광란에 몸살로 꼼짝을 못 했고, 맘은 우울증으로 매일을 울며 폐인이 됐을 무렵 나의 치료자는 결국엔 엄마였던 것이다.
배춧국에 고등어조림, 물김치, 연근조림, 오이김치, 상추 무침 등으로 차려낸 밥상이 기운을 차리게 한다. 엄마는 자식이 아프면 일단은 먹인다. 나도 엄마이긴 하지만 가사는 크게 신경 못썼다. 고등어조림은 할 줄 모른다. 한두 번 했어도 인터넷 레시피를 베낀 거라 어릴 적부터 먹어 입에 익숙한 그 맛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먹어서 입에 익숙한 국과 반찬들은 어떤 약보다도 나를 빨리 회복시킨다. 밥도 늘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잘 안 챙겨 먹던 내가 앉은자리에서 고봉밥 두 그릇을 해치운다. 정신이 나고 기운도 차려진다.
제일 좋은 건 애들이 집에 있어도 푹 쉴 수가 있다. 물론 애들이 집에 있다고 해도 정말 힘들 땐 그냥 쉬었다. 쉬고 난 후 애들끼리 방치되어 있는 걸 보면 또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힌다. 그러면 또 우울해지는 것이다. 우울한 마음으로 나를 계속 괴롭히면 또 몸이 안 좋아지고, 그러면 또 애들을 못 보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오시니 애들이 방치되지 않아 죄책감이 덜 하다. 그래서인지 맘을 짓누르는 무게감에서 조금씩 벗어나진다. 덜 미안하다가 안 미안해지기도 한다.
엄마도 내동하는 소리는 아빠에 대한 불만이다. 애들 다 출가시킨 후 텅 빈 친정집. 두 분이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 각자의 방에 침대 따로 tv 따로. 더위를 잘 타서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히는 엄마와 추위를 잘 타서 집안 틈이란 틈은 다 막아버리는 아빠. 주말농장이 유일한 낙인 아빠와 농사일이라면 질색팔색을 하는 엄마. 결혼한 지 46년인데도 아직까지 입맛도 안 맞는 엄마 아빠. 늘상 만나면 티격태격이라 각자 방에 들어가서 안 봐야 안 싸운다는 엄마아빠.
"아이고, 야야["얘야"의 경상도 사투리]... 느그 서방 같은 신랑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러노. 하기야 요즘은 신랑들이 다 한다고는 하지만, 은나들["아이들"의 경상도 사투리] 준비시키서 학교 보내지, 학교에서 데리고 와서 미이지["먹이지"의 경상도 사투리], 씻기지, 재우지... 내 느 집 와서 니 자는 거 말고 본 게 없는데, 니 자는 동안 보이께로 느 서방이 다 한다.. 빨래며, 음식이며, 설거지까지. 요즘 젊은 사람이 아무리 잘한대도 저런 신랑 읎대이."
엄마 말이 맞다. 남편이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하는 건 맞다. 나는 막말 많이 해도 나에게 말을 험하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말을 안 하거나 회피해서 그렇지.
서로 안 맞느니 할 것도 없는 게 남편이 다 내게 맞춰줬으니 티격태격할 것도 없었다. 애들 많아 하나씩 끼고 자거나 내가 일정이 바쁠 때는 혼자 편하게 자라고 배려하느라 각방을 쓰는 거지, 서로 안 맞아서 각방을 쓰는 건 아니다.
그렇다. 바빴다. 너무나 바쁘고 일이 많았다. 내 몸이 다 태워 없어지는 동안 제일 먼저 희생했던 게 가정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애들과 보내는 시간은 챙겼어야 했고, 남편과 눈빛이라도 따뜻하게 마주치는 시간이 단 몇 분이라도 있어야 했다. 밖에서 힘들다고 애들 방치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동안 정작 무심했던 사람은 나였다.
남편은 원래 하던 거 하던 사람이었다. 과묵하고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고 내가 애초부터 모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없는 거 짜내라는 건 억지일 수 있다. 목사가 돈으로 시험 들면 끝이니, 남편에게 돈 벌어오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소신껏 사역하라고 했던 사람도 나다. 이 말에 책임지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던 것이다.
변한 건 남편이 아니라 나다, 나. 번 아웃돼서, 힘들어서, 애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힘이 들었다. 늘 그렇듯 이 모든 불똥은 모두 남편에게로 튀었다.
주께서 내게는 돈에 대한 인내력을 주신 대신, 남편에게는 나에 대한 인내력을 주셨다. 안다. 남편이 많이 참고 있는 거. 나 아플 때 자기도 같이 아픈 것도. 배려하느라 주장하지 않는 것도. 내가 어깃장 놓고 독한 말로 상처 줘도 그거 참아내느라 입 닫고 있는 것도.
다 아는데도 2프로 부족한 그 뭔가가 결정타. 내 남편이 나를 리드하지 못해서 내게 혼나고 있을 때는 엄마를 모셔오는 게 특효약이다. 엄마밥상 먹으며 엄마 훈계 듣고 있으면 나는 천사 남편 만나 사랑 오지게 받는 호강에 뻗친 여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