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사춘기 1.

내가 무너지던 날

by 집밖 백선생

큰애는 올해 중학교 신입생이다. 내가 바빴던 고로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무언가를 챙겨 먹고 챙겨 입고 챙겨 다녔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 때 셋째 동생이 태어나면서 연년생 동생이 둘이나 연달아 생긴 이후로. 일과 육아에 진력이 나버린 나는 상대적으로 큰애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써주었다. 애들 육아와 내 일이 전부라 큰애는 홀로 컸다.

조금씩 자라면서 집안일과 동생들 돌보기도 큰애가 맡아서 하고, 난 아이들 아빠와 큰아들에게 어린아이들을 맡겨놓으며 일은 물론 장거리 출장도 다녀올 수 있었다. 물론 장거리 출장을 갈 때 맘이 애들한테 다 가서 애달았던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남편이 내게 늘 했던 그 말을 되새기며 애써 굳게 맘먹었다.

"당신은 프로야."


그렇게 내가 없는 집안, 특히 엄마의 빈자리는 잘 굴러가는 듯했어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자신의 일을 해야 하는 큰애에게 어린 동생들이 말을 듣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기가 예사니 어느 순간 애들에게 호통에 소리지르기 일수이고 어쩌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보면 난 큰애의 그 성난 모습에 기겁하여 큰애를 뭐라 하고 있었다. 학습량이나 진도는 늘 차질 없이 착착하던 애가 자기 일도 밀리기 시작하였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나였기에 난 그 문제로 아이를 혼내는 일이 많아졌다. 큰애는 자기 일뿐만 아니라 엄마의 일까지 떠맡고 있으면서도, 늘 혼났다. 이것이 문제였다. 아이의 내면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당장 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나 좀 이해해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품어주고 늘 내편이 돼주던 아이와 이렇게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6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늘 내 말은 무조건 따라주던 아이가 뻗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적 없었던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라 낯설었다. 조금씩 아이와의 다툼이 잦아지면서 내 내면이 곪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올 중1이 되며 터져버린 것이다.


"내가 왜 태어난 지 모르겠어요. 저는 엄마와 아빠한테 혼나려고 태어난 건가요? 제가 한강에 뛰어들려고 했던 거 아세요?"


한강에 뛰어들려고 했단다, 내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이 한강에 뛰어들려고 했단다.

한강에 뛰어들려고 했단다, 내 아들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큰아들이...


우울증이 시작한 건 이후부터였다. 난 결혼 전 우울증이 정말 극심했었다. 이 우울증이 얼마나 힘겨운 병인지 내가 잘 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청소년기에 하나님을 떠난 후 거의 안티 크리스천이었다. 우울증을 이겨낸 건 순전히 하나님 다시 믿으면서였다. 종교의 힘으로 난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났었다. 그랬던 내가 무너졌던 것은 바로 아이가 한강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내 엄마로서의 삶이 시궁창이었던 것을 철저히 깨달았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네 유년 시절을 그토록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


아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내 마음은 한강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내겐 괴로움이었다. 밤에는 눈물만 났다. 우느라 잠을 못 잤고, 그렇게 밤새도록 울다가 지쳐서 낮에는 잠만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눈물만 났다.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눈물 없이는 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만 착했지 문제 해결 능력이 전혀 없는 남편은 오히려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다. 내 마음, 내 형편, 그리고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짝꿍이라는 사람이 어쩔 줄 몰라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왜 해서 이런 상대적 외로움만 더욱 가중하는 남편을 매일 봐야 하는지 미치도록 화가 났다. 내 상황은 아랑곳없이 7세, 8세 나는 연년생들은 어떻게든 나의 진력을 빼고 있었다. 제발 너희 오빠인, 형인 내 아픈 큰아들 좀 보자 싶어도 꼬맹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저희들을 봐달라고 한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하는 일은 매주 같은 시간이 되면 어떻게든 돌려야 했다. 또한 숱한 연구 원고들도 산적해 있었으나 머리에 통 들어오지 않았다. 아바타처럼 내가 필요한 자리에 있긴 했지만, 난 앉아있을 수도 없었고 애들의 얼굴이 봐지지도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에 노크를 해준 사람은 가족이 아니었다.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아닌, 내 친구이자 이웃인 이 집사님과 김 교수 언니였다. 나를 놓아버리며 서서히 내가 인간처럼 살기를 포기할 무렵 정신 차리라고 노크해 준 두 사람을 보며, 내가 그래도 인생 잘못 살진 않았구나 싶은 맘에 최소한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생기기 시작했다. 기운 차리긴 싫었으나, 우연히 전화 연결된 엄마가 올라와서 애들이라도 봐주고 어린 시절 먹던 음식 먹여주니 그나마 기운이 생기고 정신도 차츰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내 큰애에게 준 상처는 엄마가 내 어린 시절 내게 준 상처랑 비슷하다.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일을 잘하고 좀 더 가족을 배려하는 자식에게 더 잘할 것 같은데, 부모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착한 자식의 배려나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 그 당연한 것이 된 배려나 희생에 진력이 나서 그 착한 자식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 그것을 서운해하는 것이 부모이다. 오히려 속 썩이는 자식에게 영육이 탈탈 털리는 에너지가 더 중하여, 속 썩이는 자식은 자기 자리를 잘 지키면 그게 부모에게 효도라고 한다. 이런 무경우가 부모 된 자들에게 있다. 내 부모가 그랬고, 내가 우리 큰애에게 그랬다.

그게 그렇게 상처가 돼서 내 아이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미워하며 닮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녀의 착함과 배려,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가치를 몰라줬던 거. 그런 자녀에게 의지하려고 했지, 부모로서 정서적인 버팀목이 돼주지 않아 늘 외롭게 했던 거. 그걸 내가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살린 건 다시 큰애이다. 애가 학교 대표로 과학토론페어에 나가게 된 것을 계기로 스스로의 인생을 생각하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나라도 엄마라고 다시 찾고, 의지하겠다고 도움을 요청해준 것이 고마웠다. 그렇게 아팠어도 다시 일어서 준 것이 고마웠다. 다시 일어섰을 때,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설계하는 중에 내 도움을 요청해준 것이 고마웠다. 다시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줘서 고마웠다. 살 희망이 없었던 내게 살라는 숙제를 내줘서 고마웠다.

병원에 가기 직전 아이가 내게 요청했던 필요들이 어떤 우울증 혹은 공황장애 약보다도 더욱 치료효과가 컸다. 다시 일어섰던 것은 내가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 필요의 기반에 있었던 용서, 그 용서를 가능케 했던 내 아이의 깊은 사랑이었다.

내 면목없는 얼굴을 봐주고, 쭈뼛거린 나의 손을 잡아준 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보려고 한다. 고맙다, 나를 치료해 줘서.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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