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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Jan 06. 2023

내가 만만한가

무례함을 범한 한 특정인에 대한 나만의 복수

한 아주머니가 길 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여기 **로 84길이 어디예요?"

  길마다 붙은 번호를 다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 나 사는 곳 주소 외에는 거기가 몇 길인지, 몇 길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은 비단 나만은 아닐 터.

  "글쎄요, 길 번호는 모르겠네요."

 그 아줌마는 쏘아보며 따지듯 묻는다.

  "이 동네 안 살아요?"

  갑작스러운 공격적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내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휭 가버린다. 뭐지?

  지나가던 사람 불러 세워서 많든 적든 시간을 내게 했으면 일단 "실례합니다."를 해야 옳다. 그런데 다짜고짜 길을, 그것도 번호로 물어보고서는 잘 모르겠다니까 여기 사는 사람이 맞냐는 식으로 혼내듯 쏘아붙이고 가는 그 아줌마를 다시 잡아서, 그러는 당신은 어디 사세요, 그 동네 길 번호 다 외우고 다니세요? 할까 하다가 집 찾느라 헤매다가 짜증스러워서 그랬겠거니 하고 넘어간다. 그래도 뭔가 괘씸하다.

  모르겠어서 모르겠다는 내게 이 동네 안 사냐고 하는 그 말투. 진짜 뭐 하자는 건지. 아침부터 시비 트고 싸울 상대 필요했나? 내가 만만한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예의 없는 사람들이 제일 꼴불견이다.


  그러다 잠시 생각을 한다. 한 오십 대 정도의 저 여성이 저토록 길을 헤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아마 남편의 불륜이 큰 원인이 되었을는지도 몰라.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그 신경질적인 표정과 말투, 깡마른 몸이 그녀가 그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를 반추케 하지.

  남편의 내연녀가 아마 **로 84길 어딘가에 사는 걸 알게 되었을 거야. 아는 지인 혹은 자녀의 집이라면 그런 도로명 주소로 알려주지 않고 큰 건물 어딘가로 나오라고 마중 나왔을 테니까. 남편과 금전적으로 얽혔을 내연녀의 어떤 문서를 발견하고 꼭지가 돌아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여자일 거야.

  아마 현장을 잡아서 증거를 만들려는 정신적 무장을 단단히 하고 온 탓에 저렇게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 테지? 이 동네 어디인지는 알겠는데 도로명 주소니 어찌 찾아갈 방도가 있나. 그래서 길을 묻긴 해야겠는데, 아마도 여자들만 골라서 길을 묻는 걸 보니 이 동네 여자들을 잠재적 연적 취급한 것일지도 몰라. 맞아. 저 여자에게 내 또래 여자들 중 자신의 연적이 있을 거라는 망상은 이 동네서 만나는 모든 여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있을 터.

  그러니 저렇게 똘끼 작렬한 무례함을 범하고도 수치심을 모르는 것이겠지? 아마도 다 내가 이뻐서 그랬을 거야. 잠재적 연적인 이 동네 여자들에게 갖고 있는 적의, 하필이면 만난 여자가 이쁘니까 얼마나 약 올랐겠어? 그래 오늘 내가 당한 이 황당한 무례함은 다 내가 이뻐서 당한 거야. 이래서 예쁘면 골치가 아프다니깐!


  여기까지 상상의 날개를 달고 한참을 비행하던 나는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정신 차리고 발길의 닻을 놓은 곳은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 동작구에서 서비스를 해준 벤치의 방풍 비닐하우스 속. 고양이를 바라보며 나처럼 상상의 비행을 하는 나를 똑 닮은 둘째 아이를 보며 다시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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