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을 봉인한 그곳
[빈집]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1991)
by
집밖 백선생
Nov 4. 2021
[빈집]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199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窓)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恐怖)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
대학 시절 끼고 살던 시기가 있었던 그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
아직까지 유일하게 기억나는 시가 바로 이 시, <빈집>이다.
더 이
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도, 친구들도
폭풍 오열하게 만들었던 그 구절.
얼마나 치열했던 사랑이었을까?
그 사랑 참으로 가학적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했던 고통,
그 고통으로 당최 흐르지 않는 시간,
그 시간 속에 멈춰서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기억의 감옥. 마음의 감옥.
탈출해야 해,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이지 않아,
'장님처럼', '나 이제'서야, '더듬거리며'
겨우 겨우 찾은 '문을 잠그네'
일단은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떨쳐내고 돌아서는 마당에
그곳에
갇혀서 날 할퀴던 마음의 고통들.
그것도 사랑이라고.
가엾단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사랑이 거기 갇혔는데 그게 어찌 빈 집인가.
내
그곳을 우연히라도 스치면 그냥 마음이 베이는데.
피가
철철 나고 이게 얼마나 아픈데.
그래서
'빈 집' 아닌 '빈집'.
내 사랑을 봉인한
그곳.
다신 열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
가엾은 내 사랑들.
keyword
기형도
사랑
불균형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