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을 봉인한 그곳

[빈집]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1991)

by 집밖 백선생

[빈집]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199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窓)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恐怖)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

대학 시절 끼고 살던 시기가 있었던 그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

아직까지 유일하게 기억나는 시가 바로 이 시, <빈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도, 친구들도

폭풍 오열하게 만들었던 그 구절.


얼마나 치열했던 사랑이었을까?

그 사랑 참으로 가학적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했던 고통,

그 고통으로 당최 흐르지 않는 시간,

그 시간 속에 멈춰서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기억의 감옥. 마음의 감옥.


탈출해야 해,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이지 않아,

'장님처럼', '나 이제'서야, '더듬거리며'

겨우 겨우 찾은 '문을 잠그네'

일단은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떨쳐내고 돌아서는 마당에

그곳에 갇혀서 날 할퀴던 마음의 고통들.

그것도 사랑이라고.

가엾단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사랑이 거기 갇혔는데 그게 어찌 빈 집인가.

그곳을 우연히라도 스치면 그냥 마음이 베이는데.

피가 철철 나고 이게 얼마나 아픈데.

그래서

'빈 집' 아닌 '빈집'.


내 사랑을 봉인한 그곳.

다신 열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

가엾은 내 사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