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프롤로그

by 집밖 백선생

서점에 위대한 사람의 위인전은 있어도, 평범한 사람의 전기는 거의 없다. 물론 일부 야담집, 패설집에 있었긴 하다. 조선 후기 조수삼의 [추재기이]는 고무적이다. 그러나 현대 시중에서 팔리는 공신력 있는 책들 중 평범한 사람의 전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유명한 사람들의 유명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동화 및 위인전집 책을 사주셨던 부모님의 덕으로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그때는 전집 속의 책들이 그런 종류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참으로 비극이다. 절대 그렇게 태어나거나 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로서 크게 좌절하는 경험을 안 할 수 없다. 열세 살에 장원급제를 했다는 율곡 이이, 아이큐 160이라는 아인슈타인, 5개 국어를 어린 시절부터 능수능란하게 했다는 천재 마리 퀴리. 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사람이지만, 나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사람들이다. 내가 노력하면 저 사람들처럼 위인이 된다는 희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타고나야 하는 배경이나 재능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일반인을 절망케 하는 서사구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린 성장하고 어른이 되면서 깨닫는다. 살면서 자신의 영역에서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천재가 아무리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아줄 평범한 사람들이 없으면 천재가 연 시대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무엇보다 어린 시절 위인전에서 읽은 사람들을 어른이 돼서 다시 연구하게 될 때, 미화된 거짓 프레임에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넌더리가 난 경험을 너무 많이 했던 나여서 그런지, 난 일찍이 위대한 이들의 신화, 전설 속 위인담이나, 전집 속 위인전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삶이나 생애담에 더욱 애정을 가졌다. 내가 설화 전공을 하는 사람으로서 옛날이야기를 연구하다가 생애담에 더 심취하여 발굴하고 연구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조수삼의 [추재기이]가 이런 나의 연구 방향에 크게 한몫을 했다.

이곳에 쓸 이야기는 함께 어깨동무하며 한 시대를 살아내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이다. 고만고만한 친구들끼리 티격태격하며 성장하고, 고만고만한 이웃들끼리 부비고 부대끼며 살아내는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이고 그녀의 이야기이자, 너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이 시대 속에 서로를 위안하고 격려하며 "건배"하는 이야기이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이 바로 "그녀"인 이연희(가명)이다. 같은 교회 성도인 그녀는 우리 큰애의 주일학교 교사였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로서의 부모는 안다. 교회학교 교사가 아이의 신앙 밭을 일구는데 얼마나 중요한 물이 되고 햇빛이 되는지를. 그렇게 하여 가까이 지내다가 지기가 된 그녀였다.

동그랗고 짙은 쌍꺼풀에 흰 피부를 가진 이 미녀는 영락없는 이야기꾼이었다. 원래 아이 엄마들끼리 모이면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다가, 남편 이야기, 가족 이야기, 이웃 이야기 등등으로 확장되면서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전화로 두 시간 통화해 놓고 이따 만나서 다 못한 얘기 하자고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문화는 도통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야기와 이야기 문화, 이야기판, 이야기꾼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그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녀이지만, 늘 사모로서 나를 예우해주었던 한 편,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물론 나도 손위로 예우했고 동생처럼 잘 따랐다. 서로 지켜야 하는 선은 분명했으되, 서로의 마음은 충분히 융화되었고 녹아났다. 그런 좋은 이웃이자 지기이자 신앙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의 자매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단 매우 위트가 있다. 함께 듣다 보면 뱃가죽에 알이 배길 정도로 낄낄거리다가 눈물이 난다. 나중에는 목구멍까지 알이 배긴다. 그녀 특유의 유머 코드로 인함이다.

그런데 그렇게 웃긴 이야기가 다 듣고 나면 저민다. 즉 매우 슬프거나 절망스러운 이야기인데도 그녀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웃어버리는 것이다. 특이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했던 강남 키즈였지만 아픔이 있었던 가족사, 고교 시절 왕따 당한 이야기, 무용 전공 시절 친구들과 티격태격한 이야기, 졸업 후 옷가게 하다가 망한 이야기, 결혼한 후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 등등... 그녀가 겪어낸, 그리고 겪고 있는 이야기에는 우리 사는 삼라만상의 희로애락이 모두 곁들여져서 재미있게 믹싱 되어 있었다.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돌아서면 인생의 단짠과 쓴맵을 모두 맛볼 수 있는 만능 소스로 버무려진 샐러드 같은 이야기, 겉절이 같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한다. 나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듯, 그녀의 그 큼지막한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그녀도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그리고 우린 서로의 눈을 보며 이렇게 응원한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