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간

사랑의 시간

by 라한

사랑의 시간


비가 적게 내리는 날도, 많이 내리는 날에도 그치게 되는 시간이 오면 결국 무지개는 뜨고 만다.


일곱 빛깔, 또는 그 이하, 이상의 색으로 표현되는 무지개는 흔히 꿈에 비교되고는 한다. 어째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오래전, 이 무대에 올랐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함께 올랐던 동료, 무태를 그려보며 무대에 올랐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무대, 몇 사람들은 아직도 극장안에 남아서 한 눈에 담지 못할 황홀함을 구경 중이기도 했다.


무대에 오르니 몸이 들썩거린다. 예전 무태와 함께 였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감는다. 숨을 들이쉰다. 갑자기 무대에 조명이 커지고, 십여 년간 잊었던 함성이 요동친다.


기억은 머리만 하는 게 아니었나보다. 심장도, 팔도, 다리도, 구부러지며 퍼지며, 춤을 추고, 목청을 내 짖는다. 너무 그리웠던 시간을 마주하고, 울고 싶은데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눈을 떠 보면 마치 무태가, 주훈에게 미소 지으며 옆에서 함께 반주를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았다. 춤을 추기 위해 눈으로 싸인을 주고 있을 것 같았다.


‘없다’


라는 걸 인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환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서 눈을 뜬다. 켜진 조명이 꺼지고 함성소리가 줄어들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마치 시간을 아늑히 뛰어넘어 과거로 도착한걸까. 무태가 춤을 추며 ‘이제 니 차례야’ 하며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선명했다.


문득 시간을 건너온 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온갖 그리움의 향기를 가득 품겨, 눈에서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막아낼 힘도, 겨를도 없었다. 주저 앉았다. 동료들이 놀래서 관중들이 놀래서 찰나의 순간이 영원하리만큼 아찔하고, 평온해진다.


무태가 걸어온다. 스르르, 안개속에서 흩어져가며 정훈의 얼굴로 바뀐다.


“주훈 아저씨죠?”


무태의 얼굴을 간직한, 그의 아들, 정훈이었다. 사진 하나를 내민다. 사진 뒤에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내게 무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내 사랑을 지켜갈 수 있게 해준 동료들, 여보, 특히 주훈아, 그리고 아직 대화한 번 못해봤지만 그 순간이 너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상상이지만, 정훈아. 내게 항상 웃어주는 모두 고마워. 사랑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좀더 행복하다 만나자’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정훈이 주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다가 TV에서 봤던 것처럼 그냥 안아주었다. 다을랑 말랑, 주훈에게는 마치, 무태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떠나지 않은 채 그런 무대를 지켜보던 지현이 울컥해서, 마음 극장에서 항상 꺼지지 않는 카메라 쪽으로 가서 소리쳤다.


“사랑해,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문득 영상을 보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캡처했고, 역시 위대한 극장에서는 위대한 일들이 벌어지는 구나 하며, 이리저리 퍼다날랐다. 실시간으로, 발 없는 말은 어느새 지구를 수십 번 왕복하고 있었다.


인파속에 묻혀 조용히 마음을 떠나고 있던 은재는 조심스럽게 꺼낸 휴대전화에서 통화 버튼을 누른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 그래. 거기서 보자”


미처 모두 빠져나가지 못하고, 달팽이관 같은 곳 중간에 서서 위대한극장의 중심부와 하나밖에 없는 입구이자 출구를 돌아보는 은재였다.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재성은 궁시렁궁시렁 되며 걷다가 자판기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주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해 무슨 일 있냐 물었다.


“음료가 서 가지고. 안 나와서”


캔이 바닥에 서 버린 채로, 안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이런 한정연 같은 놈.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재성이 팔을 너어 보려고 했는데, 입구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팔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짜증나 발로 차버리자, 기계에서 음료가 우르르 떨어져 입구는 더 막혀 버렸다.


“저렇게 많은데, 이젠 꺼내지도 못하게 됐네요”


진주가 재성과 자판기를 번갈아 보면서 말을 했다. 재성이 무안 해져 사과를 하려고 할 때 였다.


“마치 우리 사랑처럼요. 속이 후련했어요. 그 백작가라는 사람, 이상한 말 할 때,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는데”


하고 웃어보는 그녀의 미소가, 오랜만에 따라 웃고 싶어 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때렸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언젠간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포기만 안 하면…”


재성이 그녀를 보았다. 진주도 재성을 보았다. 서로의 우주를 닮은 검은 눈동자에 빛을 내는 두 사람이 은하의 중심에 한 가운데 박혀 있었다.


극장 밖에서 경윤이 담배를 물었다가 경비에게 제지당했다. 극장 밖을 나오면서 오랜 연인이었던 지선은 경윤에게 이제는 점처럼 보일 정도로 먼저 가고 있었다.


조금 전, 이제 막 출구가 보이려고 할 때였다.


“경윤아”


경윤이 지선이를 쳐다보았다. 이럴 땐 항상 손을 잡고 얘기를 해야 하는 직감을 다시 발동시켜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데, 팔짱을 끼는 지선이었다.


“우리 저 출구이후부터 따로 걷자”

“? 뭐라고?””

“저 문을, 출구 겸. 입구로 쓰자”

“지선아.”

“많이 생각 했고, 길게 생각했고, 오래 됐는데, 넌 그걸 모르더라. 그림자가 길다는 건, 더 이상 우리 마음이 한 가운데 있지 않다는 거야. 그런데, 사랑은 시간이 지난다고 지는 게 아니거든.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우리 노력으론 안된다고 이미 느껴버렸어”


당장, 무슨 소리냐고,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같이 걸어줘서 고맙고, 앞으로 갈 길 응원할 게”

“지선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선이 계속 걸으면서 멈춰선 경윤을 쳐다보았다.


“진짜 사랑했어”


경윤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멀어진 지선의 옆에 다시 섰다.


“나도. 나도 그랬어.”


아마, ‘나도 그랬어’가 아니라, ‘지선아 사랑해’ 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문득 돌아서, 이제는 작아진, 멈춰선 경윤을 돌아보며 지선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돌아서 걸었다. 출구 겸 입구인 문으로 나와, 새로운 시작을 이제 막 시작하던 참이니까, 멈춤없이, 설사 이 길의 끝에 낭떠러지가 있더라도 걸어가겠다고 생각했다.


윤서가 조용히 앉아 이제는 사람들이 사라진 극장 안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라 조금 더 바깥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었다.


무대에 걸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 정훈의 모습을 특별한 감정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훈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수진에게 놀라, 무대에서 내려와 수진을 본다.


“결국 안 갔더라?”


정훈이 뒷머리를 휘 저으며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다가, 아무런 거짓 없이 오로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말했다.


“미안, 나는 너가 좋아. 너가 좋아서. 음악이 좋은 거야. 아니 음악이 좋은 건지 모르겠고, 그냥 니가 좋아서. 니가 내가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좋았던 거야”

“알아 바보야”

“어?”


정훈이 수진을 보았다.


“니가 그렇게 행동하는데 그걸 누가 몰라”

“미안해.. 수진아”

“미안해 말고”

“고마워 수진아..”

“고마워 말고”

“…?’

“안 해?”

“사..랑보다 좋아해 수진아”

“나도 이정훈 너 좋아해”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걸 지켜보던 하윤의 눈이 촉촉해졌다. 갑자기 울컥했다. 두 사람이 너무 예뻐서, 겨우 비워낸 자신의 예뻤던 사랑도 생각이나서였다. 그런 하윤의 옆에 뜨거운 차를 건네는 석찬이 있었다.


“어,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석찬은 묵묵히, 한 칸 떨어진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일어서려할 때 하윤이 잠깐만요. 하고 말했다.


“네..?”

“이 차가 식을 때까지는 기다려줘야 하는 거 아니 예요?”

“그냥... 드린 건데요?”

“원래 다 그냥 이예요.”

“그냥…”


그냥. 문득. 가장 많은 변환어이자, 시 였다.


나주가 채원과 주연 두 사람에게 자주 보자고 말을 건네지만 별 반응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서로 얘기하면서 나가는 걸 나주가 쫒아가려는데, 주연을 향해 손짓하고 있는 정연이 보였다.


나주는 또 정연이 저 자식이 자신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 생각했다.


“저 자식이 진짜!”


나주의 소리에 반응한 사람은 주연이었다. 주연이 무슨일이지 하고 돌아보니 정연이 내밀던 손을 바로잡고 쳐다보고 있었다. 나주가 대뜸, 너 뭐야? 하고 두 시선을 사로 잡았다.


채원이 그냥 가자. 하고 주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나주가 정연을 째려보려고 저 자식 때문에 또 일이 이상하게 됐어! 라고 하려는 순간 이미 정연은 없었다.


제길, 이상한 놈 때문에 다 놓쳤다. 서둘러 주연과 채원을 찾아보려했지만, 그 많은 인파속에서 두 사람을 찾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연은 주연을 한눈에 찾아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많아 소리가 전해지지 않았고, 출구에 다다르고 사람들이 많이 찢어진 후 에서야 두 사람의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설 수 있었다.


이제는 처음은 아니었지만, 첫 만남이었다.


“죄송합니다. 처음 보죠?”


정연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두 사람 앞에 섰다. 나주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채원이 눈치를 보고 정연이 주연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팔짱을 빼고 먼저 갈게 하고 가려다 달려오는 나주를 발견한다.


주연이 머리카락을 뒷등으로 넘기자 바람이 살짝 불어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정연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심장과,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손길로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한 정연이라고 합니다”

“네. 알아요. 공연도 잘 봤고. 서포터즈도 고맙습니다”


어쩜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할까 생각하는 정연이었다.


“네..”


두 사람의 시간에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수 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는데, 정작 그 시간을 마주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명함만 한없이 내려 다 보던 주연이 정연을 본다.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담긴 검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어디서 이런 귀한 존재가 나타난걸까, 정연은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하고 끝내 정리하지 못한 말을 꺼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제가 당신과 다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신께 비는 거 말고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건지…”


뭐야, 하고 주연이 입술을 주먹 진 작은 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마저 너무 아름다워서 황홀감을 느끼는 정연이었다.


목숨을 걸만 했다.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말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오직 한 단어 밖에 없었다.


사랑이었다.


“무슨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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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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