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391
이재원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재원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승전욱
제목: 거짓 승전보
어머니의 가녀린 기침 소리가 수시로 들려오는 집 안. 그 골목 어귀를 지나는 순간마다 승전욱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머릿속을 계속 정리하곤 했다.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하지?”
그의 입술에선 늘 이런 생각들이 뭉치고 부딪혔다.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가 웃는 얼굴로 그를 반긴다.
“전수야, 다녀왔니?”
전욱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문 뒤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돌아설 때, 얼굴에는 그가 의도한 ‘형 전수의 미소’가 얹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 한 마디에 온 세상이 무너질 듯한 안도감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는 사실 ‘전수’가 아니다. 그저 쌍둥이 동생 ‘전욱’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형 전수를 대신해 오늘도 연기에 나섰다.
어머니는 침상에서 어렵게 일어나 전수(로 가장한 전욱)의 손을 꼭 잡는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그 손의 온기는 지난날과 다르지 않다. 마치 형 전수가 진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그 온기는 전욱의 내면 깊숙이 꽂힌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괴로움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착각이라도 좋으니 어머니가 편안히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이기적인 바람이 마음 한 편을 지배했다.
그날도 어머니는 생전의 전수가 좋아했던 갈색 담요를 곱게 펼쳐놓고, 형의 몸을 살폈다.
“전수야, 네가 없는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소문엔 너희 부대가 크게 패배했다던데, 돌아와줘서 고맙구나.”
전욱은 대답 대신 어머니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쟁에서 사망한 전수의 죽음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욱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거짓된 승전보가 이어진다. 전욱은 형의 군복 일부를 구해 왔고, 형이 지니고 다녔던 오래된 수첩을 몰래 집에 가져와서, 필요할 때마다 내용물을 펼쳐봤다.
그렇게 전수가 살아 있다는 설정을 맞춰갔다. 가족들은 그 수첩을 보며 오히려 안심했다. ‘우리 전수,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사실은 그 수첩이야말로 형이 전쟁에서 죽기 직전까지 적어 내려간, 그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에서 ‘돌아오겠다’는 형의 다짐을 전욱이 기어이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실제로 형 전수는 어린 시절부터 전욱에게는 선망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웃음이 많았으며, 책임감도 강했다. 언제나 동생을 끌어안고 “너는 내가 지켜줄게”라고 말하던 인물이었다.
전욱은 형의 그런 성격에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의지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부러워하곤 했다. 형만 있으면 세상 어떤 폭풍우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형이 전쟁에 나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전욱은 바짝 말랐다.
“형, 그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사방이 위험하다잖아.”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전쟁이 끝나면 꼭 승전보를 들고 돌아올게.”
전수는 웃으며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그 다음의 시간은 빨랐다. 전수는 군에 입대했고, 서신 한 장 제대로 건네지도 못한 채 실전으로 투입되었다. 이후 종종 들려오는 소문은 늘 어두웠다. ‘사상자가 매우 많다’든가, ‘전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든가 하는 불확실한 이야기들 뿐. 그러다 어느 날 들려온 전수의 죽음 소식. 마치 전욱 본인이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 비보를 접했을 때였다. 어머니가 이미 지병으로 고생하는 와중이었다. 아버지도 전수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울먹일 것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전욱은 그 순간, 자신이 받은 부대의 전화를 끊고 한참 울부짖었다. 혼자서. 가족은 그 사실조차 모른다. ‘형이 죽었다’고 알리는 전화를 받은 당사자는 오직 전욱이었다.
“어떻게 하지... 형이 죽었다고 알리면, 부모님은 견디지 못할 텐데.”
그 죄책감과 공포가 뒤섞인 상황에서 전욱이 택한 길은 한없이 어리석고도 위험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도 처음에는 작은 말 한 마디로 시작했다. 어머니가 어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을 때, 전욱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로 답해 버렸다. 그 말 한마디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쁨에 찬 얼굴을 보였다.
“형은 곧 돌아온대요. 연락이 왔어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전수가 무사하다니.”
그날부터 전욱은 밤마다 떨렸다. ‘이제 와서 형이 죽었다고 고백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되실까? 아버지는 어떻고?’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걸 알면서도 발을 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형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욱은 최소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형 전수가 살아 있다고 믿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지내실 것’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전쟁이 끝나면 형이 되어서 돌아온 뒤, 어머니 곁에서 승전보를 전달하겠다고. 정작 참된 진실은 형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지만, 전욱에겐 그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문제는 전쟁이 길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계속 미뤄지면서, 전욱의 거짓말은 점차 복잡해졌다. 어떤 날은 자신이 ‘동생 전욱’의 목소리로 전화해 형이 아직 바쁘니 연락이 없다고 꾸며내야 했고, 또 다른 날은 ‘형 전수’가 되어 전우들과 찍었다고 위조한 사진을 어머니 곁에 슬쩍 둬야 했다. 그렇게 일일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한 번 시작된 거짓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전수’의 귀환을 믿어주었다. 특히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기에 더욱 위험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가슴속으로 깊게 형을 그리워하고 있을 터. 전욱은 아버지의 말없는 시선을 볼 때마다 몸이 굳었다. 아버지는 전수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과연 그 모든 걸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오, 전수가 돌아왔어?”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잘못된 이야기였나 보네”
그러나 거짓말은 뜻밖의 방향으로도 번졌다. 마을 사람들도 놀라워했고, 전욱은 그럴 때마다 그저 애써 웃었다.
“네, 잘못된 소문이었어요. 전수가 살아 있어요.”
그러면서도 마음은 기어이 쪼그라들었다. 밤이 되면 그는 그늘진 방에서 혼자 머리를 감싸 쥐며 앉아 있었다. ‘어떡하지? 이제 와서 형이 정말 전사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히면, 나는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스스로가 ‘형 전수’와 ‘동생 전욱’을 동시에 연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한 몸 안에 전혀 다른 인격 두 개가 공존하는 기묘한 감각. 전욱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욱아”라고 부르면 자신이지만, 이미 그는 가족 앞에서는 ‘전수’가 되어 살고 있었다. 이렇듯 정체성의 혼동이 슬금슬금 그를 휘감아온다.
형 전수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오래된 학교 졸업사진, 손때 묻은 기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옛날 등산로에서 찍은 사진들. 그 기억은 모두 형이 살아 있던 증거였다. 그러나 지금 전욱이 흉내 내고 있는 건 ‘추억 속 전수’의 이미지였다.
기타를 잡을 때면 손가락이 서툴러서 형처럼 매끄럽게 연주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전욱은 거짓말이 걸릴까 봐 잔뜩 겁을 먹었다. 그래서 형이 옛날에 자주 불렀던 노래를 몰래 연습했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이 형만큼 뛰어나지 않았던 전욱에겐 큰 부담이었다.
“이 노래, 형이 즐겨불렀는데...”
기타 줄이 울리는 순간, 전욱은 갑작스러운 허무감에 빠졌다. 자신이 형 전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저 흉내만 내고 있는 존재.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라는 의문이 울려 퍼질 때면, 다시금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굳은 입매, 어머니의 연약한 손. 그들 앞에서 거짓말을 멈추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야말로 부모의 심장을 산산조각 낼 위험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책과 합리화가 동시에 교차하는 나날이었다. 거짓을 계속 유지해 나가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전수의 목소리 톤, 걸음걸이, 그리고 말투까지 세세하게 떠올려야 했다. 전욱은 형을 따라하다 가도, 문득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에 내려앉은 슬픔과 피로를 본다. 스스로도 이 이중생활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계속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동네 어귀에서 전욱을 봤다는 이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 전수를 봤다는 이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혼동하기도 했다
“아니, 전수와 전욱이 같이 있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둘 다 똑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전욱 자신도 잠깐 방심한 틈에 ‘전욱’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가, 아버지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 적도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아버지는 낯선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욱은 재빨리 숨을 고르며, 형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깨달은 듯한 눈빛으로 전욱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순간 전욱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아버지도 눈치챈 건 아닐까?’ 전욱은 그날 밤 한숨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게 들통나리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거짓말은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마을 저편에는 아직 전쟁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부상병으로 돌아온 청년들은 하나같이 병원에 실려 갔고, 전쟁에 동원된 가정들은 대부분 수입이 줄어든 탓에 생계가 막막해 보였다. 전욱은 형의 친구였던 몇몇 전우들이 소식을 전해오는 걸 필사적으로 피했다. 형이 전사했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욱에게도 전사 소식을 전해줬을 텐데, 이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실을 알리고자 찾아올 날이 분명 올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전욱은 집 안에 틀어박혔다. 애써 외출을 삼가며, 부모님의 곁에서 전수인 척만 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서, 전수도 이제 곧 다시 복귀할 거야’라는 말로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마을 주변에서 계속 들려오는 탄식과 울부짖음은 전욱의 마음을 옥죄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 가족은 억울함과 비통함에 빠져 지낸다. 전욱은 문득 깨달았다.
“나만 이렇게 거짓을 통해 가족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진실을 마주하며 극복하려고 애쓰는데, 자신은 오직 회피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불쑥 편지 한 장을 꺼내 전욱(전수에게)에게 내밀었다.
“전수야, 이거... 네가 없던 동안 쓰던 편지야. 네가 혹시나 중간에 소식을 전하지 못할까 봐, 내가 글을 좀 적어두었단다.”
편지라니. 전욱은 가슴이 또 한 번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조심스레 그 편지를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었다.
“전수야, 내가 조금 더 건강을 회복하면 우리 함께 밥상 앞에 앉아 너 좋아하던 가지볶음을 해 먹자. 네가 제발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나는 그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같은 문장들이 질펀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 내려갈수록, 전욱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순수한 바람, 자식을 향한 절절한 사랑. 그리고 그 대상이 이미 세상에 없는 형 전수라는 사실이 너무나 괴롭고 처절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네 동생 전욱이도 많이 기다리고 있어. 네가 돌아오면,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오래도록 함께 지내렴. 그게 내 소원이야...”
그 문장에 머물렀을 때, 전욱은 무언가 가슴속이 뜨겁게 일렁이는 걸 느꼈다.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형을 흉내 내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이 질문은 스스로에게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
한편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가족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씩 저녁 식사를 할 때, 전욱에게 ‘전수’의 근황을 묻곤 했다.
“그래, 부대 상황은 좀 어떤가?”
전욱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고 형처럼 대답했다.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지원군도 왔고, 이제 곧 종전될 거라고들 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네 동생 전욱이도 걱정되지는 않니?”
그 순간 전욱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버지는 이상하게 ‘전욱’의 안부를 형 전수에게 묻는 느낌이었다. 마치 진짜 전수를 앞에 두고 묻는 듯이.
“네, 저도 전욱이가 걱정돼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왠지 아버지는 약간의 미소를 지은 듯 보였다. 그 표정에는 무언가 꿰뚫어보는 듯한 묘한 기색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전욱은 새삼스럽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느 오후, 뜨겁게 내리쬐는 해가 지평선을 향해 기울 무렵, 동네 어귀에서 한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그는 전욱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걸었다.
“혹시... 전수의 동생, 전욱인가요?”
전욱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몸이 굳어져 버렸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날 알아보지?’
“나는 형 전수와 함께 군복무를 했던 사람입니다. 전수는... 미안하지만,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족들은 그 사실을 모르더군요.”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나 싶어 마을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전수가 돌아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전욱은 대답할 틈도 없이 사내에게 붙잡혀 건물 구석으로 끌려갔다. 사내의 표정엔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말해 봐요. 무슨 사연인지. 왜 당신이 전수를 연기하고 있는 건지.”
그제야 전욱은 무너졌다. 그동안 쌓아 올린 거짓말의 방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애써 울음을 참아왔지만, 이번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죄송합니다. 그냥... 부모님이... 형을 잃었다고 말하면... 어머니가 제발... 무너질까 봐...”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깊게 내쉰 뒤, 조용히 등을 토닥였다.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진실을 언젠가는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전수는 죽었어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니까.” 그 말에 전욱은 머리를 조아렸다.
“저도 알아요. 이미 늦었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차마 용기가 안 나서요. 부모님이... 너무...”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늘 당장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어요. 전수가 나한테 참 잘해줬거든. 그리고 당신도 고통받고 있다는 게 눈에 보여요. 하지만... 부모님께서 영영 속고 계실 순 없잖아요. 언젠가는, 꼭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그렇게 사내는 전욱에게 조용히 경고 아닌 경고를 남기고 떠났다. 전욱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온 전욱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전욱을 보고, 옅은 미소로 물었다.
“전수야, 바람이라도 쐬고 온 거니?”
“...네...”
제대로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간 듯, 전욱은 방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더는 버틸 수 없을지도 몰라. 이제 정말 끝이야.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나 그날 밤, 아버지가 그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왔다. 전욱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전수, 아니... 전욱아.”
순간 전욱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그를 ‘전욱’이라고 불렀다. 둘이 있는 공간에서조차 철저히 ‘전수’로 불러주던 아버지였었다.
“솔직히 말해라. 아버지는 이미 눈치챘다. 네가 우리 전수가 아니라는 걸.”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전욱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아... 아버지...”
“전쟁터에서, 우리 전수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을 때, 네가 바로 울었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수가 살아서 돌아왔다’며 네가 집에 데려온 게 이상했어. 나는 알고도, 너를 막지 않았다.”
전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덧붙였다.
“네 어머니가 너무 약해서, 이 사실을 알면 무너질까 봐... 그래서 그냥 지켜봤다. 네 마음도 어련히 이해가 됐고.”
그러면서 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하자. 어머니에게도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사실을 숨기는 건 우리 전수를 정말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어.”
그 말에 전욱은 오열했다.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 “괜찮다. 네가 그런 선택을 한 건, 부모를 위한 마음 때문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진실이 밝혀져야, 우리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며칠 후, 어머니 앞에서 전욱은 모든 걸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곁에서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전욱은 떨리는 목소리로, 형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이 그 사실을 숨기고 형을 흉내 낸 이유를 고백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나오는 듯했지만, 아무런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산산조각난 믿음을 곱씹는 듯했다.
“전수...가 죽었다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허리를 굽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욱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왜! 왜 지금까지 숨겼니! 왜 이제야 말하는 거니! 전수는... 어떻게 죽었는데! 어디에 묻혔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정말...”
그 순간 전욱은 어머니에게 어떤 변명을 해도 용서받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저 울며 머리를 숙여 빌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어린아이처럼 울부짖는 그녀를 달랬다.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그토록 큰 목소리로 우는 모습을 본 건 전욱도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몇 번이고 땅을 치고, 전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전욱은 결국 주저앉아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 드러나자, 집 안은 한동안 처절한 슬픔에 잠겼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형 전수를 그리워했다. 그러면서도 전욱을 보며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길을 보냈다.
“네가 왜 나한테 그걸 숨겼니. 나를 바보로 만들었잖아.”
전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만 마음 한편에는 작은 안도감이 있었다. 이제라도 모든 걸 털어놓았으니, 더 이상 거짓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미약한 안도감.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후로 한동안 어머니는 전욱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밥상도 따로 차려주지 않았고, 가끔 아버지가 밥을 가져다주면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욱은 어느새 매일 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로 울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형을 살려 두고 싶었던 마음이 이렇게 모두를 파멸로 이끌 줄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욱은 형의 죽음조차 숨겨야 했던 자신의 심정을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길 바랐다. 너무나 이기적인 바람이라는 걸 알지만, 가족의 사랑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조금씩 식사를 재개했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어느 날 아침, 전욱이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식탁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았다.
“전욱아.”
그 한 마디에 전욱은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건 오랜만이었다.
“...네, 어머니.”
“이제, 어쩔 셈이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도 전욱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든 어머니와 아버지 곁에서, 형 몫까지 제가 잘 살아가고 싶어요. 물론 형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어머니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라도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그 말에 전욱은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 가슴이 저려 왔다. 어머니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한편, 형의 유품을 찾으러 전욱은 한 군부대 보관소를 찾아갔다. 그곳은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의 물건을 임시 보관하던 곳이었다. 전쟁이 슬슬 끝나가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여전히 부상자와 고인들의 소식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관리인은 전욱을 보고 말했다.
“가족되세요?”
“네, 쌍둥이 동생입니다.”
“이게 전수 님의 소지품입니다”
관리인은 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작은 보따리를 하나 건넸다.
그 안에는 형의 낡은 수첩, 작은 사진 몇 장, 그리고 녹이 슨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전욱은 수첩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전쟁터에서의 감정과 상황이 날것 그대로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동생 전욱이 잘 지내고 있을까. 꼭 이겨서 돌아가겠다. 살아서 돌아가야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전욱은 형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족을 생각하며 돌아오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졌다. 더불어 그가 저지른 거짓말이 정말로 형의 바람을 뒤틀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유품을 챙겨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그를 맞이했다.
“찾아왔구나.”
전욱은 눈물 어린 얼굴로 아버지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형의 물건이에요.”
아버지는 잠시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다, 천천히 펼쳐보았다. 그리고 작은 사진을 손에 쥐고는, 굳어버린 듯 한참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 침묵에 전욱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전욱을 바라보았다.
“우리 전수, 정말 돌아오고 싶었나 보다.”
그 말에 전욱은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는 울지 않았지만, 가슴속에 격렬한 슬픔을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부터라도, 네가 전수 몫까지 열심히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떤 것도 거짓으로 꾸미지 말고, 너 자신 그대로 살아라.”
그 순간 전욱은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스스로가 승전보라는 거짓말에 매달려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자신이 전욱인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형 전수의 꿈과 약속은 형이 남긴 그 유품과 함께 가족 안에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며칠 후, 어머니에게도 형의 유품을 전해 드렸다.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작은 사진 속 젊고 환히 웃는 전수의 얼굴을 매만지며 흐느꼈다. 그 모습을 본 전욱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잠시 전욱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사진 속 아들 전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전욱은 이 상황에서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 곁에 앉아, 함께 형 전수를 생각하고 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머니는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욱아, 네가 전수인 척 돌아왔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알아챘을지도 몰라. 네가 우리 전수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내 마음이 그걸 인정하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르지. 어머니가 너무 바보 같았나 보다.”
그 말에 전욱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어머니...”
어머니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가 전수 흉내를 낸 그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란다. 어미를 위한 거였잖아.”
그러면서도 금방 눈시울을 붉히며 덧붙였다.
“하지만 전수가 죽었다는 걸 이토록 늦게 알게 됐으니, 내 마음이 많이 상했어. 그런 내 마음도 조금은 이해해 주렴.”
전욱은 고개를 숙여 눈물을 떨궜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사진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이젠, 우리 전수도 편히 놓아줘야겠지. 그리고 너도 네가 되어야지. 네가 전수가 될 순 없잖아.”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을에는 아직도 상처가 깊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일상을 되찾아가려 했다.
전욱은 집안 살림을 거들면서, 아버지와 함께 작은 장작 패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때때로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면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물론 아직 완전한 화합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속 상실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전욱도 간혹 죄책감이 되살아나 괴로워졌다.
하지만 분명 조금씩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적어도 거짓된 승전보에 매달리지 않고, ‘형의 죽음’을 가족이 함께 받아들이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형 전수를 기리는 작은 제단을 만들었다. 그곳엔 전수가 아끼던 만년필, 사진, 수첩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 앞에서 조용히 전수를 불렀다. 전욱은 그런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울컥함을 느꼈다. 동시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형 대신 이 가정을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졌다.
형의 수첩에는 작은 시들이 적혀 있었다. 전쟁터에서 ‘언젠가 이걸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써 내려간 몇 줄의 글. 전욱은 형이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썼을지 상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봄이 오면, 꽃이 피어나겠지. 나는 그 꽃을 꼭 보고 싶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는 집으로 가리라.’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전욱은 수첩을 조용히 덮고, 어머니 곁에서 함께 앉아 그 시를 읽어드렸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가만히 형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애쓰는 듯했다. 그러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전수도 문학을 좋아했지. 네가 낭독하니까, 마치 전수가 읽어주는 것 같네.”
“형이 살아 있는 동안,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쓸 줄은 몰랐어요. 저도 참 많이 배우네요.”
전욱도 미소 지었다.
그렇게 형이 남긴 흔적을 되짚으며, 가족은 하나씩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 갔다. 세월이 흐르면 그 상처가 아물지는 몰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흔적이겠지만, 그래도 이겨내야 할 길이라면 피하지 않고 걸어야 한다고들 생각했다.
전욱은 어느 날, 형과 함께 걷던 옛날 산길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형과 손잡고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형이 떠난 뒤 혼자 걸어야 했던 외로운 길. 이젠 그 길을 또 다시 형 없이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그는 혼자만의 묵념을 했다.
“형, 내가 형의 약속, ‘승전보를 갖고 돌아온다’던 그 말을 이렇게 비뚤어진 형태로라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더 큰 상처만 남겼어. 그래도 이제부터는 제대로 형의 몫까지 살아볼게.”
저녁노을이 짙게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전욱은 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이 정말 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
어쩌면 형이 저 먼 하늘 어딘가에서, 전욱의 고백을 듣고 미소 지어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과학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을지 몰라도, 그런 마음의 위안이 현재의 전욱에게는 절실했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났을 무렵, 마을은 서서히 옛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전욱은 그 사이에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작은 농사 일을 돕고, 또 틈틈이 형이 쓰던 노트를 참고해 글쓰기를 배워나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살짝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전욱아, 어렸을 때 넌 늘 전수가 부러워서 그의 흉내를 내곤 했지. 이젠 굳이 흉내내지 않아도, 전수 못지않게 잘해낼 수 있어.”
그 말이 전욱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곁에서 형 대신, 아니 형과는 또 다른 자신만의 길을 찾는 법을 배웠다. 전수의 죽음이라는 슬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가족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욱은 종종 마을회관에 모여, 다른 청년들과 함께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진짜 승전보’란, 목숨을 건 싸움에서의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살아남고 일어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가 전해왔던 ‘거짓 승전보’는 아픔과 혼란을 남겼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짓을 벗겨낸 뒤 가족이 진실을 함께 나눠 가질 때, 비로소 서로를 위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승리’의 의미인지도 몰랐다.
어느 봄날, 마을의 언덕에 작은 들꽃들이 만발했다. 전욱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그 언덕을 함께 거닐었다. 텅 빈 하늘,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전욱은 문득 형 전수가 꿈꾸었을지도 모를 풍경을 상상했다.
“형도 이 꽃들을 보고 싶어 했을 거야.”
조용히 중얼거린 그때, 어머니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전수도 이 꽃을 봤다면 분명 좋아했을 거다. 마음 놓고 웃었겠지.”
그런 상상을 하며 가족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더 이상 전수가 옆에 없더라도, 그의 기억은 마음 안에 살아 있었다. 전욱은 살짝 눈을 감고, 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동생아, 잘 지내고 있지?” 하는 익숙한 톤의 따스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답하듯, 전욱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래, 형. 나 잘 살아갈게. 부모님도 지키고, 나 자신도 찾아갈 테니까.’
그리고 그날 이후, 전욱은 더는 ‘거짓 승전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가족과 함께 슬픔과 그리움을 공유하며, 형이 남기고 간 진짜 승전보를 마음속에 각인했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아끼고, 용서하며, 함께 웃는 날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전수라는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고 전욱 자신도 더 이상 거짓말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봄은 새롭게 피어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상흔을 안고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거짓으로 시작된 승전보가 비록 많은 눈물을 남겼지만, 그 끝에는 진실의 힘이 있었다. 진실은 쓰라리지만 결국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 진실을 마주한 뒤에라야,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됐다.
“승전보가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고, 동시에 너무도 간절한 진심이었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승전욱은 오늘도 마음속으로 형을 불러본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 늘 자신이 전수의 동생 전욱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사실만이 진정 가족과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