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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92 

by 라한 Jan 03. 2025
김수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김수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수연희

제목: 복수미


“상현아!!!, 지현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건 수미상관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그런 일을 당해야만 했다.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 피를 흘린 채, 숨이 끊긴 모습을 봐야 했고 그들의 사체를 직접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야했다. 


“서장님.”


연희를 양 옆에서 붙잡고 있는 부하직원들, 연희는 서울경찰서의 서장이었다. 


“상현아!!! 지현아!!! 상준아!!! 지윤아!!!”


목이 터져라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가 흥건한 방 안에는 이미 식어버린 시신들만이 연희를 맞았다. 벽에 온통 튀어 있는 붉은 흔적은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했음을 말해주듯 처절했다. 눈을 뜬 채 그대로 굳어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자라, 더 참을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아이들 뒤에서 등을 보이며 쓰러져 있던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내 아이들의 아버지, 한순간의 믿음이 사라진 표정으로 죽어버린 그 사람 역시 연희가 잃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가 단숨에 사라진 그날, 연희는 삶의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장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온몸을 덮치는 공포와 현실 부정, 거기에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절망과 분노가 연희를 집어삼키려 했다. 경찰서장으로서 수많은 사건을 헤쳐 왔지만, 이번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구급대원들이 들어왔다. 연희를 향해 뭔가 말을 거는 것 같았으나, 이미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연희는 몇 번인가 입을 달싹이며, 아이들의 이름을 애써 다시 불러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상현아… 지현아… 상준아… 지윤아… 눈 좀 떠봐, 응? 엄마가… 엄마가 왔어.”


얼어붙은 손으로 아이들의 뺨을 어루만지던 연희는 허공에 닿지도 못할 울음을 흘렸다. 마치 이곳이 현실이 아닌 악몽 속이라고 애써 부정해 보려 했지만, 뺨을 파고드는 싸늘한 기운은 이곳이 틀림없는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울경찰서 건물 앞,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서 어둠이 더 빠르게 드리우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전 특유의 무거운 기운, 마치 조금만 스쳐도 터질 것 같은 습도 높은 공기는 사람들의 숨조차 가쁘게 만들었다. 연희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경찰서 입구에 섰다. 해가 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 건물 간판이 하나 둘 불을 켜고 있었지만, 연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경찰서 내부가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가족의 온기가 사라진 텅 빈 집이었다.

아이들과 남편을 모두 잃고 나서, 집이란 말은 연희에게 더 이상 안락한 휴식처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저 한때 가족이 머물렀던, 그리고 참혹한 비극이 벌어진 장소.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서장님.”


동료 형사 강민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내가… 내가 지켜주지 못했어.”


연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서장님이 그런 말씀하시면… 저희가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합니까.”

“아직 아이들과… 그리고… 남편분 장례도 마무리가 안 됐잖아. 우리 모두 곁에 있으니까 너무 자책 말고….”


민식의 위로에도 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온몸에 찬 기운이 감돌았다.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장례식장에서 연희는 정갈한 한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았다. 그러나 서장이라는 직함으로 꾸준히 명예를 쌓아왔던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이미 예전과 달랐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연희를 보며 수군거렸다.


‘대체 왜? 누구의 짓이기에 저런 일이 벌어졌을까?’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연희의 가족이 몰살당한 이유를 궁금해했다.


“서장님, 괜찮으십니까. 마무리 다 됐습니다.”


동료 형사의 목소리에 연희는 고개를 겨우 들었다.


“…갈게요.”


장례식장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싸늘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두 눈의 피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고, 머리는 구름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가족의 마지막을 정리해야 하는 연희의 발길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혼백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모호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으면, 비명처럼 들려오던 상현이와 지현이, 상준이, 지윤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엄마! 우리 여기 있어!”


그렇게 부르는 것만 같았다. 꿈에서조차 그들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장난치고 기어코 돌아오기 어려운 곳을 향해 멀어져 갔다.


연희는 그것이 환청인지 꿈인지, 아니면 현실과 망상의 교차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실치 않았다. 하루 이틀, 일주일, 그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의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오히려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현실감을 안겨주었다.


분노. 다른 무엇보다 강렬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이 사건의 범인을 향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증오가 되고 있었다.


“서장님, 오늘 저녁에 면담 있으신 거 알고 계시죠?”


연희는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장례를 마친 뒤, 서울경찰서 서장으로서의 업무에 복귀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사무실 문 앞에 들어선 비서는 겸연쩍은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피해자 신분이니 의무적으로 심리 상담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경찰 내부 지침… 아시죠?”


연희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대답했다.


“알아요. 일정 잡아두세요.”


말은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속내는 복잡했다. 개인적인 사고 피해자이자 서울경찰서 서장이라는 공적인 위치가 겹치며, 온갖 외부 시선이 집중된 상태였다. 동료들은 그녀를 보호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복수심에 불타서 수사를 독단적으로 진행하지 않을까?”

“감정이 폭발해서 범죄자에게 법을 무시하고 응징해 버리면 어쩌지?”


그런 소문도 돌고 있었다. 연희에게 쏟아지는 눈길은 동정과 우려, 호기심과 탐색, 때로는 불쾌한 의심까지 섞여 있었다.


경찰서 복도를 지날 때마다 연희의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자신을 바라보는 후배 형사들의 시선, 짧은 수군거림 들이 귀에 닿을 때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검은 불꽃이 일었다.


연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 복도를 뒤덮는 어두운 그림자를 짓누르고 싶었다.


정의와 복수.

그 경계에서 그녀의 선택은 갈수록 불명확 해졌다.


‘반드시 잡아야 해. 내 손으로… 내 아이들의 원수를…’


가슴속에서 분노가 솟아오를 때마다 연희는 아이들이 숨이 끊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건 현장에 겨우 달려갔을 때 이미 싸늘해져 있던, 살아서도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들의 마지막 표정. 그 표정을 다시 생각하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냉혹함이 그녀의 안면 근육을 뒤틀었다.


새벽 3시,

서울 시내가 간신히 잠에 들었을 시간, 연희는 집무실 혼자 남아 사건 자료를 뒤적였다.

수사망을 좁혀가려면 사건 발생 시점에 사소한 단서 하나까지 놓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범인은 매우 치밀해 보였다.

현장에는 눈에 띄는 흔적이 거의 없었고, 지문도 흉기조차 찾지 못했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범행 현장이 흡사 유령이 다녀간 듯 깔끔했다.


가족이 몰살당한 그날 혹시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는 인물이었는지 문을 강제로 열지 않고 들어온 흔적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저 경찰업무라면 수없이 경험했을 법한 정황임에도 이번만은 달랐다. 연희의 마음은 지금 당장 범인이 목전에 나타난다면 그를 체포하기보다는 복수를 감행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봐야 돼…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해.”


책상 가득 놓인 서류와 사진, 그 중간에 아이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상현, 지현, 상준, 지윤. 모조리 피로 물든 그날의 장면과, 해맑게 웃던 이전 모습들이 교차했다. 뒤섞여버린 기억들이 연희의 동공을 흔들었다.


‘엄마가 꼭… 반드시… 잡을 거야.’


연희는 두 손을 꽉 쥔 채, 사진 속 아이들에게 속삭이듯 다짐했다.


“서장님,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런 상태로는….”


다음 날 아침, 연희를 붙잡고 간곡히 말리는 이는 서울경찰서 베테랑 형사 최영식이었다.


“서장님, 가족 잃은 슬픔 알지만… 한 발짝 물러서셔야 합니다. 서장님이 이 사건에 직접 뛰어드시면, 감정이 통제 안 될 수 있어요.”


연희는 잠시 침묵했다. 영식은 오래된 동료이자 그녀가 신뢰하는 인물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영식아.”

“네, 서장님.”

“네가 말한 거 알아. 나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그런데… 내 아이들이잖아.”


마지막 말이 목에 걸려 눈물이 되었다. 연희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영식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연희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주었다.


“정의가 뭔지, 복수가 뭔지 요즘은 전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미 울음도 말라버린 목소리였다.


그렇게 연희는 차분히 사건을 진행하는 듯 보이면서도 내면에서는 날카로운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 손으로 직접 심판해 주겠다’는 어머니로서의 결연함이었다.


그녀가 경찰의 수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평생 지키고자 했던 원칙. 그러나 이제 그 원칙이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법과 정의’를 이야기해 온 동료들은 그것을 눈치채고는 있지만, 강하게 막을 수도 없었다.


서장의 권위, 그리고 연희의 절망감이 얽혀, 경찰 조직 내에서는 불편한 침묵만이 흘렀다. 상부에서 조차 이 사건을 재빨리 해결하라고 독촉하지만, ‘서장이 직접 수사에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우려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서장님은 현재 정신 상태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경찰이 할 말입니까.”


복도 어귀에서 들리는 험악한 목소리들.

연희는 거리를 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맞아. 지금 내 정신은 멀쩡하지 않지.”


그러나 분노는 누구보다 선명한 형태로 연희의 의식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순 없어. 내 아이들이 겪은 고통은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까.”


밤이 깊어갈수록, 서울의 골목들은 한층 더 스산해졌다.

안개 와도 같은 미세먼지가 어둠과 섞여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야근길일지 모르지만, 연희에게는 오늘이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서장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온다면 내려오겠다. 경찰의 교본이 규정하는 절차와 형식이라면 잠시 무시해도 좋다. 오로지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갈증이 그녀의 온몸에 퍼졌다.


“정말 나였으면 좋겠어? 네가 우리 아이들을…?”


차가운 밤공기를 찢고, 연희의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맴돌았다.

혹시 가까운 지인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일까.

아직 아무 단서도 없지만,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주변인물 중 누군가가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그녀는 끝내 떨리는 손을 감싸 쥐며 밤길을 걸었다.

두 눈에는 피로가 가득해 보였지만, 뒷목 덜미에 흐르는 식은땀과 심장의 고동은 거 세져 갔다.


새벽 2시 45분,

연희는 다시 한번 사건 현장이었던 집을 찾았다.

피가 말라붙은 채 정리되었지만 검붉은 흔적들이 남은 벽과 바닥은 눈에 선했다.

자신의 마지막 가족들과 함께 보냈던 거실, 식탁, 아이들 장난감이 굴러다니던 방, 하나하나가 이젠 묘지와 다름없었다.


그날, 혹시나 아이들이 범인과 대화를 나눈 흔적이 있을까?

그녀는 손전등을 들고 서랍장과 작은 틈새를 살펴보았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필기 도구들, 공책, 한쪽 모서리가 구겨진 사진 한 장….


“우리 모두 같이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이네.”


사진 속에서 연희는 환히 웃으며 남편과 네 아이를 품고 있었다.

상현이와 상준이가 앞에서 장난치고, 지현이와 지윤이가 뒤에서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순간.

연희는 사진을 들고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붙들었다.


‘왜, 도대체 왜… 우릴 이렇게 무참히 부숴놓은 거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침울한 분노가 맴돌았다.

아이들이 하나씩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시간 날 때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소소한 다툼도 있었지만 결국 웃으며 해결해 온 가족.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했을 가정이었겠지만, 연희에게는 세상 전부였다.


그날 밤, 집을 나서려는 순간 창밖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집 주변에서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한 불길함.

연희는 호흡을 가다듬고 현관 쪽으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다.


“차소리도 없고, 인기척도 사라졌어.”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가로등 밑을 살폈다.

다만 조금 전 바람이 흔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약간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어둠 속에서 연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깔린 달빛이 칼날처럼 서늘했다.


‘내가 감시당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가 의심을 키워서 헛것을 본 걸까.’


그러나 이내,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사건은 네가 지키는 서울경찰서 안쪽에, 혹은 네 가까이에 범인이 있을지 모른다.’


경찰 내부, 비난 섞인 소문이 조금씩 퍼져 가고 있었다.

서장인 연희가 냉정함을 잃고 개인적인 복수에만 눈이 멀어 수사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우려였다. 가족을 몰살당한 비극의 피해자인 동시에 경찰 조직을 이끄는 수장. 이 두 가지가 충돌하며, 연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연희는 이미 어떤 결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조직에 오래 몸담았지만, 내게 진짜 소중한 것은 결국 가족이었어."


그녀가 속으로 되뇌는 그 말은, 복수심을 합리화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서울경찰서 브리핑 룸은 묘하게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최근 잇따른 강력범죄 사건과 관련해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었다. 경찰 기자단이 자리를 잡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오늘 브리핑은 서울경찰서 최영식 형사가 진행합니다.”


서장인 연희는 밖에서 소리만 들으며, 브리핑 룸 문을 열지 않았다.

대중과 언론 앞에 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이었다.

복도를 지켜주던 민식이 다가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서장님, 언론 쪽에서도 계속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몰라. 응대할 여력이 없어.”


연희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복도 창가에 기대 앉았다.

카메라 불빛도 기자들의 목소리도 그녀에겐 거슬릴 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누가 우리 아이들을 죽였는가’라는 질문만 맴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희의 눈빛은 더욱 매섭게 빛났다.


하나씩 드러나는 단서들을 통해, 가족 몰살 사건이 단순 강도살인이 아닐 수 있다는 짐작이 들었다. 가장 큰 의문은 남편이 살아 생전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리고 아이들이 알지 못했던 비밀이 있는 지였다. 연희는 남편의 개인적인 서류나 노트북, 그가 몰래 남겨둔 흔적들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서랍 깊숙이 숨겨진 작은 USB 메모리를 발견했다. 그 속에는 아직 열어보지 못한 파일이 가득했다.


‘무엇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연희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USB를 가방 안에 넣었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남편과 관련된 그것이 혹시나 이번 사건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운 그림자들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연희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자신을 붙잡아줄 한 사람을 떠올렸다.


평소에 신뢰했던 프로파일러이자 심리학 박사, 한승우.

다른 강력 사건에서도 여러 번 함께 작업했던 그는 사건의 흐름이나 범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탁월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금의 연희를 만나려면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연희 스스로도 자신이 심리적으로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승우가 연희의 ‘복수심’에 손을 대려 한다면, 그녀는 아마 그가 내뱉는 모든 ‘이성적 제안’을 거부해버릴지도 몰랐다.


“서장님, 문 좀 열어주세요.”


연희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연희는 서류 더미와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겨우 시선을 돌렸다. 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민식이었다.


“왜 이 시간에?”

“얘기 좀… 해야 될 것 같아서요.”


연희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민식은 어색하게 서 있다가, 무겁게 들고 온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게… 범인에 관한 새로운 증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


민식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사실… 서장님이 아이들 사망 후에 놓쳤을 만한 부분이 있어서… 제가 좀 조사했어요. 서장님께 직접 보고 드리기가 조심스러웠는데,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희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놓쳤다는 게 뭔데?”


민식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건넸다.


“서장님의… 남편 분, 그리고 아이들이 최근에… 이상하게 몰래 움직였던 정황이 있어요. CCTV에 담긴 장면입니다. 서장님 몰래, 어딘가를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희는 봉투를 열어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봤다. 사진 속에 보이는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

정체를 알 수 없는 허름한 창고 같은 곳에 드나드는 아이들의 그림자.

그리고, 남편이 낯선 이와 몰래 서류를 주고받는 순간이 잡힌 사진.


연희의 손이 떨렸다.


“이게… 무슨….”

“저도 아직 확신은 없지만, 이 장소가 어떤 범죄 조직과 연관된 곳이라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민식은 연희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장님, 혹시 남편분이 어떤 사건에 엮여 있었는지, 아이들도 같이 위험에 노출된 건 아닌지… 좀 더 들어가 봐야 합니다.”


연희의 눈에서 불길한 그림자가 짙어 졌다.


“그래. 조사해. 모든 걸 다 뒤집어엎어서라도, 절대 놓치지 말아.”


비극의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 채, 가족을 송두리째 잃은 어머니이자 경찰서장.


연희에게 남은 것은 뜨거운 복수심과, 조직 내부의 시선, 그리고 분노에 휩싸인 정의감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남편이 비밀리에 거래하던 흔적 그 조각들이 하나 둘 연결되기 시작하며, 연희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더욱 거센 불길이 일었다.


“법이 뭐고, 정의가 뭐지? 내 아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가 직접 심판을 내릴 차례 아닌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한 공포가 연희를 휘감았지만, 그와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분노가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이제 연희는 분노를 지침삼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걸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단순한 강력 범죄가 아니라, 어떤 음모나 더 큰 배후가 있다는 직감이 그녀의 직업적 예감과 어머니로서의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흩어진 서류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종잇장 위에 얼룩지며 스며들었다.

연희는 그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사진을 품에 안았다.


“기다려. 엄마가 반드시… 모두를 파헤쳐서 너희를 짓밟은 그 자를 찾아낼 거야.”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하듯, 연희는 이 어둠의 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 뒤로, 한줌의 복수심과 정의가 어긋난 그림자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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