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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조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93

by 라한
장승조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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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조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조한석

제목: 멈춰라 불꽃아


잔잔한 기계음 속에서, 조한석은 다시 눈을 떴다. 숨이 턱 막힐 듯한 고통이 폐를 짓눌렀고, 주위에는 익숙한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감돌았다. 회색빛 새벽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어둡고 텅 빈 병실을 음울하게 비추었다.


“한석, 괜찮아?”


낯익은 목소리에 한석은 고개를 돌렸다. 유소연, 그의 동료 소방관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피로와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밤새 간호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석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병원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특히 ‘그 능력’을 무리하게 쓸 때마다, 이렇게 병실로 실려 오는 일이 잦았다.


“다행히 상태가 크게 악화되진 않았대.”


소연의 말에 한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불길 속에서 시간을 멈추던 순간이 생생했다. 2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한 발을 뗄 때마다 온몸이 천근만근 내려앉았고, 폐는 부서질 듯 타들어 갔다.


“또… 그걸 썼구나.”


소연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속엔 애틋한 걱정이 묻어났다.


한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힘, 시간을 멈추는 능력. 그러나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소방관으로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이 힘을 쓰곤 했지만, 두려움도 함께했다. 자칫 발각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의사가 말하길, 한 번만 더 과하게 쓰면 정말 위험하대.”


소연의 말이 끝나자, 한석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하게 불이 켜진 도시의 모습이 병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대중은 지금도 이 세상에 초능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영영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다.


‘과연, 나 혼자서 이 길을 가야 할까?’


한석은 속으로 자문했다. 재해, 더 큰 재앙이 오면, 이 비밀스러운 능력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능력을 공개할 수도 없다. 일반인에게 알려지면 어떤 파장이 생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소연이 살포시 한석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쉬어. 너에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한석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누구의 도움?’ 초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는 세상에서,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석은 새벽녘에 잠이 깨 다시 복도로 나왔다. 여전히 환자복 차림이었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에 길고 스산한 병원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불편한 건 시선이었다. 자신을 보는 듯한 낯선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어 있었다.


‘누구지?’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 간호사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능력을 과하게 사용한 뒤 생긴 환각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나타났다. 길쭉한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 병원 복도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조한석 소방관님.”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한석을 불렀다.


한석은 순간 경계심이 발동했다.


“누구시죠?”


남자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머금고 한 발 다가왔다.


“처음 인사하는 건 아니지만, 이름이라면…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겠지.”


이 말을 들은 한석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용건인지 모르겠는데, 난 아직 퇴원도 못 했고….”

“조만간 큰 일이 벌어질 거야. 그리고 너는 그 중심에 서게 될 확률이 높아.”


한석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상엔 아직 숨겨진 힘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어. 대부분은 대중 앞에 절대로 드러나지 않지. 하지만 너처럼 그 힘을 위험천만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드물고.”


한석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는 어떻게 자신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게다가 말투를 보면, 이 남자도 일반인은 아닌 듯했다.


“잠깐, 당신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어느 정도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어. 다만, 그걸 오랫동안 숨기며 살았지.”


이 시점에서 한석은 확신했다. 이 사람 또한 초인이다.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이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네가 감지하든 못 하든, 이미 세상은 급변하고 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불길이 커지고 있지. 훨씬 거대한 사건이 일어날 거야.”


남자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속삭였다.


“물론 이건, 뉴스에도 크게 뜨지 않을 거고, 정부도 쉬쉬하겠지. 아직 그들은 초능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복도 끝을 바라봤다.


“기억해 둬. 곧 넌 혼자서는 감당 못 할 재앙과 마주치게 될 거야.”


한석이 뭔가를 묻기도 전에,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시야를 가리자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등골이 서늘해진 한석은, 방금 마주친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한석은 결국 퇴원을 하게 됐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폐에 잔상을 남긴 화상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회복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재발 우려, 즉 그가 또다시 과한 무리를 하면 회복이 불가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의사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한석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번처럼 구조를 위해 무리하다가는 몸을 망치거나, 더 큰 사고를 낳을 수 있습니다. 동료들에게 의지하세요. 혼자선 어려운 부분이 반드시 있을 테니.”


의사가 말한 ‘무리한다’는 것이 정확히 ‘능력을 쓰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의사는 애초에 초능력의 존재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환자의 신체 상태로만 판단하여, 극도의 체력 소모나 폐 손상을 야기하는 행위를 경고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한석은 그 말이 왠지 자신에게 던져진 암시처럼 느껴졌다. ‘능력을 숨기고 또 쓰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소연이 차로 태워 준다며 함께 퇴원 수속을 밟고 있었는데 한석은 서류 몇 장을 넘기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혹시… 이번 일이 좀 이상하게 기사로 나지 않았나? 구조한 시간이라든지, 불이 확 줄었다든지….”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몰라. 어차피 언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화재 사고로만 보도했어. 너에 대해서도 ‘과로로 쓰러졌다’ 정도로만 나왔고.”


한석은 미묘한 안도감과 이상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이 시간 정지 능력을 썼다면, 현장에서 혹시 이상한 목격자가 있었을 수도 있건만… 기사나 소방 내부 보고서 어디에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아무도 깨닫지 못했거나, 혹은 알더라도 쉬쉬하는 걸까?


“어쨌든 쉬는 동안은 절대 무리하면 안 돼.”


소연의 말에 한석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원하는 건 ‘영웅’ 소리보다도, 그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점점 더 위험하고 은밀 해져 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너머로 보이는 거리 풍경이 한석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 인파가 북적이는 모습… 모든 게 일상적이지만, 자기만 마치 비밀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석.”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화재 때도 네가 어떻게 구조를 했는지는 묻지 않을 게. 하지만… 혼자 모든 걸 책임지려 들지는 마.”


소연은 한석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완벽히 알진 못해도 이상할 만큼 극적인 구조를 해내는 장면을 몇 번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세히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한석이 오랫동안 지켜온 비밀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또 위험에 뛰어들 거면 제발 날 포함해서 다른 동료들도 함께 움직이게 해 줘. 알았지?”


한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가 말하는 ‘위험’에는 시간 정지의 반동, 그리고 초능력을 둘러싼 여러 미스터리도 포함될 것이다.


그렇게 소연의 차가 한석의 집 앞에 섰다. 짐을 챙겨 내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시야 끝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스쳤다. 전신을 검은색 옷으로 감싼, 체격이 다부진 인물이 건물 모퉁이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한석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 인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석은 황급히 그쪽으로 뛰어가 보려 했지만, 이미 텅 빈 거리만 펼쳐져 있었다.


“한석? 무슨 일이야?”


소연이 깜짝 놀라 묻자, 한석은 괜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잘못 본 것 같아.”


하지만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콩닥거렸다. 이미 몇 번이고,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느낌이 있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감시하는 이유는 뭘까?’


퇴원 후 일주일, 한석은 의사의 지시대로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능력을 쓰면 쓸수록 몸은 망가져 가고, 세상은 여전히 불길에 시달리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날 밤, 고요한 거실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보통이라면 받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


“여보세요?”

“조한석 소방관님이시죠?”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톤이었다.


“누구세요?”

“글쎄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군요. 장소와 시간을 정해 주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한석은 다소 당황했다.


“이봐요, 나 그런 장난 전화…”

“장난이 아니에요. 당신의 능력,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순간, 한석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역시, 누군가가 내 비밀을 알고 있어.’


“설마… 며칠 전 병원 복도에서 만났던?”


수화기 넘어 남자는 어렴풋이 미소 짓는 기색으로 답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네요.”


고민이 짧게 스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전화를 받고 응하지 않겠지만, 한석은 결국 약속을 잡기로 결심했다. 다른 초인도 혹은 초인에 대해 아는 인물도… 이대로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답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내일 밤, 10시. 이 근처에 조용한 카페가 있는데….”


한석은 다급히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 지 방 안을 둘러봤다. 가슴이 다시 두근거렸다.


‘드디어, 뭔가 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가?’


다음 날 밤, 약속한 시각이 되자 한석은 사람 많은 중심가를 피해, 뒷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평소에는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장소가 필요했다.


카페 문을 열자, 몇 개의 테이블 중 하나에 이미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길쭉한 코트는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고, 선글라스 대신 얇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왔군요.”


그가 자리에서 살짝 일어섰다.


한석은 조심스레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이런 장소를 아셨죠?”


남자는 잔잔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내가 미래를 조금 엿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믿을지 모르겠군.”


‘미래를 본다….’ 한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이 남자가 초능력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몰랐다. 자신이 시간을 정지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겠지만, 자신 조차도 남들이 믿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날 계속 지켜본 것도…?”

“그래요. 곧 다가올 더 큰 불길 속에서, 당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봤거든.”


한석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돌려 말하지 말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밝히세요.”

“우선, 세상에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당신 혼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겠죠?”


그러자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 느껴 왔던 이질감들을 되새겼다. 도영의 죽음, 잦은 이상 화재,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수상한 시선들….


“하지만 일반인은 이걸 거의 몰라요. 정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을 뿐. 그들은 초능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지만, 아직 전국적으로 조직화되진 않았어요.”


남자는 커피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문제는, 불길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가 곧 엄청난 재앙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점이죠. 그 화염은 보통 소방으로 진화할 수 없는 규모에 이를 수도 있어요.”


한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길을 다루는 초능력자? 그럼 난 시간 정지로 맞설 수 있을까? 상상이 안 된다.’


“당신은 내 능력을 어떻게 알고 있죠?”


한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화재 현장에서 시간을 멈추고 구조하는 장면을 어렴풋이 봤거든요. 단편적인 장면만 보이지만, 그게 반복되면서 내가 확신하게 됐죠.”


정적이 흘렀다. 카페 안은 두 사람 외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주인조차 다락방에 올라간 듯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죠? 또, 내가 혼자서 그런 재앙을 막으라면 무리예요. 지금도… 이 능력 쓰면 몸이 망가진다고.”


한석은 손을 꼭 쥔 채로 털어놓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혼자선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팀이 필요해요. 나 같은 예지자, 그리고 또 다른 능력을 가진 몇 사람을 모아서… 그 재앙을 막아야 합니다.”


‘팀이라….’ 한석은 속으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이 비밀스러운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이는 순간, 더 이상 평범한 소방관으로 머무를 수 있을까?


남자는 잔을 내려놓으며 결론 지었다.


“결정은 당신 몫이지만, 우린 시간이 많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가, 막을 수 없는 재해의 불꽃이 도시를 집어삼킬 테니까.”


카페에서 남자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한석은 오래된 기억을 되살렸다. 동료 김도영의 죽음. 아직도 그 때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몇 해 전, 화재 현장에서 처음으로 시간을 멈춘 능력이 발현됐을 때, 그는 아이를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2분을 썼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살렸지만, 불길이 거 세져 동료 도영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시간을 조금만 효율적으로 썼더라도….’


한석은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죄책감에 휩싸였다. 능력이 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후로도, 시간을 쓰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한계가 컸다.


길거리를 걷는 내내, 도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네 힘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그만큼 네 자신도 위험해지지 않을까?”


과연 도영이 지금 살아 있었다면, 한석에게 뭐라고 조언했을까? 팀에 합류해 재앙을 막으라는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위험하니 손대지 말라고 했을까?


언뜻, 아파트 외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일그러져 보였다. 시간이 멈출 때마다, 자신도 불완전하게 멈추어 버리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한석은 소연과 함께 소방서에 들렀다가, 카페 근처에서 가볍게 브런치를 먹었다. 휴직 상태지만, 복귀 여부를 상부와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소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석, 네가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집 앞에서도 자꾸 누군가를 신경 쓰는 것 같고.”


한석은 뭔가 결심한 듯, 그녀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물론 능력 전부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나 말고도 특별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함께해야 할 큰 일이 있는 것 같다’ 정도는 말해야 했다.


“소연,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라.”

“응?”


소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 직감한 듯한 눈빛을 보였다.


“설마… 그 사람들 중에, 네가 관여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한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어. 다만, 불꽃과 관련된 큰 재앙이 올 수도 있고, 내가 그걸 막을 열쇠라고 하네.”


소연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마음을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네가 결정한다면… 난 막지 않을 게.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달려들진 마. 네 몸 상태도 그렇고, 만약 공개적으로 드러나면 사회적 파장이 클지도 모르잖아.”


한석은 그녀의 말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소연은 늘 그렇듯, 자신을 가장 현실적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알겠어. 아직 팀을 꾸리고 있다는 사람과도 이야기 더 해볼 거야.”


그때, 소연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초능력을 쓰는 걸 대중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언론이 들끓고, 정부가 네 신변을 구속하려 들 수도 있어.”


한석은 잠시 생각하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겠지…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난 더 많은 걸 지키고 싶지, 모든 걸 망치고 싶진 않으니까.”


며칠 후, 한석은 약속 장소로 또다시 불려 나갔다. 이번에는 익명 메일을 통해, 도시 변두리의 폐건물 옥상으로 와 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 장소 역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엔 제격이었다.


한석은 조금 찜찜했지만,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의지가 더 컸다.


‘어차피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면, 피하기만 해선 해결이 안 돼.’


건물 옥상에 올라가자, 이미 그 남자. 자신을 예지자라고 칭했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덩치가 큰 중년 남성도 함께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초인 같았다. 한석이 나타나자, 예지자는 간단히 소개를 했다.


“이쪽은 A라고 불러 주세요. 자세한 건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불꽃 재앙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 중년 남성(A)은 신중한 눈빛으로 한석을 훑었다.


“소방관이라고 들었소. 시간을 멈춘다니, 대단해. 하지만… 몸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데.”


한석은 묘한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담담히 답했다.


“한계가 명확합니다. 원래는 엄청난 압박감과 중력에 의해서 움직일 수 없었지만 2분 정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있으니 만 못해서 움직이도록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몸 상태가 만신창이가 됩니다. 거의 이틀은 누워 있어야 해요. 시간을 정지할 수 있지만, 제 몸은 그만큼 위험해지고… 자칫하면 정신을 잃기도 해요.”


그러자 A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쓴다는 건 결코 공짜가 아니지. 나도 몸에 흉터가 많다오.”


한석은 순간 호기심이 솟았다. 이 남자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까? 그러나 묻지는 않았다. 아직은 서로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예지자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씩 접촉하고 있어요. 더 큰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일반 소방이나 군대만으론 감당 못 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가능성이 생길지도.”


‘우리가….’


한석은 짤막하게 읊조렸다. 이미 이들은 비밀리에 움직이며, ‘초인 팀’을 꾸리려는 수순에 들어선 듯했다. 만약 자신이 합류한다면, 앞으로 수많은 위험을 함께해야 할 터였다.


“조만간, 그 재해가 일어날 움직임이 시작한다는 징후가 보이네.”


예지자의 말에, A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들이 진짜 결심하면, 도시 하나쯤 불태우는 건 일도 아닐 거요.”


한석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이 상상되었다. 과연 그때, 자신이 시간을 멈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인들이 아무리 힘을 합쳐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그 무렵, 한석은 문득 다가온 기일을 맞아 동료 김도영을 추모하기 위해 작은 봉안당을 찾았다. 도영의 부모님이 마련해 둔 곳이었다.


검은 옷을 차려 입고 흰 국화를 준비한 한석은, 봉안당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사진 속 도영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도영아.”


과거, 도영에게는 ‘네가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어쩌면 소방관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라는 농담 섞인 격려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도영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던 그날 이후, 한석은 자신의 힘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더 큰 일을 앞두고 있어. 만약 이 힘으로 누군가를 더 지킬 수 있다면, 가야 할까?’


무심코 눈을 감자, 불길 속에서 의식을 잃었던 악몽들이 다시금 스쳐 갔다. 잠시 후, 조용히 뒤따라온 소연이 그를 바라보며 위로했다.


“도영이도, 네가 지금의 길을 선택하길 바랄 거야. 너무 자책 말고… 제발 네 몸도 챙겨.”


한석은 힘겹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소연.”


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팀에 합류해야 한다’는 확신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도영처럼 되지 않으려면, 그는 능력을 더 확장하거나, 다른 초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느꼈다.


추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석은 곳곳에서 화재 뉴스가 들려오는 걸 감지했다. 공장 지역 의문의 발화 사고, 고층 빌딩 불시 발화 같은 기사 제목들이 이어졌다.


겉으로는 단순 사고처럼 보도되지만, 한석은 벌써 몇 번이고 예지자와 A의 말이 떠올랐다. ‘불길을 다루는 초인’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아닐까?


도심 한복판, 전광판에서 나오는 뉴스 자막이 번쩍거렸다.


“현재 불분명한 원인으로 계속 발화가 발생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전기 합선이나 가스 폭발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확정된 바는 없다.”


한석은 그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슴 속에서 불길하게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대로라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 순간, 머릿속에 또다시 예지자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손을 쓰지 않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밤늦은 시각, 한석이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 너머로 초인종이 울렸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불안함을 느낀 한석은 문을 살짝 열어 봤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인가?’


의아해하며 문을 닫으려던 찰나, 어디선가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렸다.


“조한석 소방관… 나 좀 만나 줄 수 있나?”


한석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는 분명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지만, 골목 그늘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현관 밖으로 한 발 내디뎠다.


“누구시죠? 장난이라면 신고합니다.”


그제야 그늘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어두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 이름은 밝힐 수 없어. 다만, 불길을 다루는 자와 관련된 정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돼.”


한석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럼 당신도… 초인?”


그 사람이 대답을 회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 나타난 건 위험을 무릅쓴 거야. 불꽃 재앙이 일어나면, 우리 같은 초인도 다칠 수 있다. 특히나… 시간 정지 능력을 가진 네가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테지.”


한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걸 말해 주는 거죠?”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뗐다.


“난, 예전에… 불길을 다루는 자와 함께 움직인 적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받은 배신감으로, 그가 세상을 불태울 결심을 굳혔지. 그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초인들도 위험 해져.”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만은 서늘하게 빛났다. 한석은 간신히 침을 삼켰다.


“정부나 언론은 이런 일을 가만히 덮으려 할 거다. 대중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테니. 너희들 초인들끼리 조용히 해결해 줬으면 하는 게 그쪽 입장이겠지.”

“결국,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은 네 자유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경고한 만큼… 잘 판단해.”


그리고는, 한석이 말릴 틈도 없이 후미진 골목으로 사라졌다. 골목을 달려 나갔지만, 이미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한석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갖 불길한 상상과 현실적인 고민이 겹쳐져,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일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어. 불길을 다루는 자…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가 세상을 불태운다면, 당연히 수많은 인명이 위험해질 것이다. 소방관으로서, 그리고 초인으로서, 한석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막으려면 시간 정지 능력을 온전히 활용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2분만 넘겨도 거의 실신 상태가 된다.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그는 병원에 있던 때를 떠올렸다. 의학적으로는 설명 불가한 체력 소모, 그 특수한 고통. 남에게 이해 받기도 어려운 이 문제를, 이대로 방치해도 괜찮을까.


침대에 반쯤 누운 상태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별은 거의 보이지 않고, 흐린 구름이 도시의 빛 공해에 가려졌다. 마치 다가올 재앙을 예고하듯, 불길하게 느껴졌다.


“혼자서는 힘들어… 결국, 예지자와 그 팀을 찾아가 봐야겠다.”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석은 결심을 굳혀 갔다.


며칠 후, 예지자에게 연락을 받은 한석은 한 오래된 창고 건물로 갔다. 그곳은 평소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장소였다. 이미 몇몇 인물이 모여 있었다. 예지자, A,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 서로 간에 대화가 오갔지만, 다들 서로를 ‘가명’으로 부르는 등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한석이 들어서자, 예지자가 반갑게 손짓했다.


“결심했군요. 환영합니다.”


한석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걸 막지 못하면, 더 큰 피해가 생길 거라면서요.”


A가 옆에서 덧붙였다.


“우린 각자 능력이 다르지만, 뭉치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뭐, 이 도시가 전부 불타기 전에 어떻게 든 막아야겠어.”


한석은 시선으로 새로 온 두 사람을 살폈다. 한 사람은 테이블 한쪽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벽에 기대어 주위를 예민하게 살폈다. 둘 다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굳이 능력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서로 협력이 최우선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지자가 간이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최근 연달아 일어난 화재 사건, 특히 공장 지대나 고층 빌딩에서 발생한 의문스러운 발화 지점을 찍어 봤습니다.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특정 패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 패턴은 마치 시계 방향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석이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건… 도시를 천천히 둘러싸면서 불씨를 심고 있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이렇게 되면, 마지막에 도심부에서 큰 불을 일으켜 한꺼번에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는 시나리오가 가능하죠.”


짙은 긴장감이 공간을 뒤덮었다. 이런 시나리오는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고, 언론에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정부나 당국이 눈치챘어도, 초능력자 관련 정보는 전혀 공개하지 않을 터였다.


한석은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내 일이기도 하다. 소방관으로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계획을 세우기 전, 팀은 서로 능력을 간단히 테스트해 보기로 했다. 한석에게 주어진 시간은 2분. 그 정지된 세계에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버려진 창고 뒤편, 장비 몇 개를 세팅해 두고, 팀원들이 서서 지켜보았다.


“시작해.”


예지자가 신호를 주자, 한석은 심호흡을 하고 시간을 멈추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공기마저 고요해졌다. 대신, 한석의 가슴이 마구 요동치고, 온몸이 무거워졌다. 한 발을 떼는 데도 큰 힘이 들었다.


‘지금 1초, 2초….’


안에서부터 세는 숫자가 60, 70을 넘어갈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 상태에서, 한석이 움직이려 하자 온 세상이 한석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몇 미터 앞에 있는 모래주머니를 들어서 다른 쪽으로 옮겨야 하는 테스트를 했다. 육중한 모래주머니를 겨우겨우 끌어 이동시키는 모습은 마치 거북이 걸음을 연상케 했다. 모두가 정지된 상태로 혼자 진땀을 빼고 있었다.


‘돌아가야 해… 시간이 풀리기 전에….’


땀이 이마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번엔 중간에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도달하자,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2분이… 끝나 간다.’


여기서 실신이라도 하면 위험하다. 한석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리고 간신히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땅에 주저앉았다. A가 다가와 물통을 건넸다.


“고생했어. 역시 어려워 보이는군.”


한석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내가 이 상태로 대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가만히 지켜보던 예지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직 가능성이 있어. 방금 전, 정확히 2분이 조금 넘은 것 같다.”


한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2분 10초?”


그는 분명 2분 이상 시간이 지속됐다고는 느꼈지만,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능력이 스스로 조금씩 진화할 수도 있어요. 특히 네가 절박한 마음으로 한계를 넘으려 하면.”


예지자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거지.”


한석은 땀을 닦으며, 자신의 가능성을 조금 깨달었다. 아직 희망은 있다.


며칠 뒤, 팀은 마침내 ‘그 불꽃 재앙의 서막’이라고 볼 만한 사건을 맞닥뜨렸다. 도심 외곽의 대형 화학 공장에서 원인 불명의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사건 자체는 언론에 단순 사고로 보도되었지만 예지자는 이건 불꽃 초인에 의한 도발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했다. 실제로도 화학 물질이 터져 나오는 시점과 불길이 치솟는 양상이 수상했다.


결국 한석을 포함한 팀원들은 비공식적으로 현장에 잠입하기로 했다. 정식 구조대원들이 잔뜩 투입되어 있었지만, 초능력이 개입된 불길은 그들의 상식 밖일 것이다.


한석은 소방복을 대충 걸치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누군지 알아보기 어렵게 한 뒤 현장에 접근했다. 소연은 대원들과 함께 다른 쪽에서 진화를 지원하고 있었다.


“소연… 미안하지만, 이번엔 따로 움직여야 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붉은 화염이 하늘을 뒤덮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요란했으며, 구조대원들의 무전 소리도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한석과 다른 초인들은 파편 더미 사이를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공장 내부에 더 큰 폭발 징후가 있고, 거기에 ‘적’. 즉 불꽃 초인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붉은 불길 사이, 한 거대한 챔버 안에서 기묘한 열기가 감돌았다. 화염이 마치 생명체처럼 일렁이며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까만 옷차림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온몸에서 무언가 뜨겁고도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저게… 불꽃을 다루는 초인?’


한석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드디어 왔구나… 방해꾼들.”


그 인물은 낮게 웃었다. 목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A가 조용히 포효하듯 앞으로 나섰다. 그 역시 뭐라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네가 이 짓을 벌였나?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불꽃 초인은 비웃듯 어깨를 움찔하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챔버 바닥에서 화염의 기둥이 솟아나며 A를 덮치려 했다. A는 간신히 피했지만, 후폭풍에 구르면서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한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불길, 내가 시간을 멈춰서 접근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대로 두면, 불꽃 초인이 또 다른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


“시간을 써야 해…!”


그는 이를 악물고, 예지자가 주는 신호에 맞춰 시간을 정지했다.


세계가 멈추자, 불꽃 기둥도 그 자리에 얼어붙듯 정지됐다. 접근하려고 움직이자 한석은 매 순간 온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피부에 대미지는 없었지만, 심장 박동이 터질 듯 요동쳤다.


‘가야 해…. A를 구하고, 저 불꽃 초인에게 접근해야 해.’


그는 거북이걸음으로 A 쪽에 다가갔다. A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곧 다시 시간이 흐르면 불꽃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한석은 A를 부축해 안전 지역으로 밀어내듯 이동시켰다. 불길 사이를 조심스럽게 통과하려니, 마치 온몸이 무거운 모래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오대산에 짓눌린 제천대성이 이런 고통을 매순간 당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다음, 불꽃 초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으나,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안 돼, 숨이 막힌다…. 아직 2분까지 시간 남았을 텐데, 벌써 쓰러질 것 같아….’


눈앞이 흔들리고, 이명이 들렸다. 한석은 이를 악물고 바닥을 짚었다. 시간이 풀려 버리면, 자신은 물론 주변 동료들까지 위험해졌다.


한석은 결국 불꽃 초인에게 접근하는 대신,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 상태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2분이 다가오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불꽃 초인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그가 뭔가 더 큰 공격을 펼치려는 찰나, 예지자가 던진 쇠구슬 비슷한 무언가가 그의 발 밑에서 터지며 시야를 가렸다.


“흥… 이번엔 물러가 주지.”


불꽃 초인은 사라졌다. 어떤 방식으로 나갔는지 모르지만, 화염이 잠시 수그러들어 시야가 트였을 때, 이미 흔적도 없었다.


“젠장….”


한석은 무너진 잔해 위에 주저앉았다.


‘내가 좀만 더 능력을 다룰 수 있었다면 저자를 붙잡는 건 무리라도 무력화 정도는 가능했을 텐데….’


A는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른 동료들도 가벼운 부상만 입은 채 겨우 살아남았다. 예지자가 한석 곁에 다가와 살짝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 치고는 선방했어. 적도 우리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몰랐을 거야.”


한석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래도, 결국 놓쳤잖아요. 이 화염이 더 커지면, 일반 대원들이 감당 못 해요.”

“알아. 그래서 더 준비해야지. 우린 아직 초짜 팀이니까.”


그와 동시에, 현장 주변에서 일반 소방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 사람 있나요?”


소리치며 수색하고 있었다. 팀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사람 눈을 피해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왔다. 신분 노출은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늦게, 한석은 집으로 돌아와 온몸에 새긴 화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물리적 화상이라기보다, 능력을 무리해서 쓴 후유증에 가까웠다. 여전히 열기가 채 식지 않아, 몸이 떨렸다.


‘나 혼자라면 진작에 불꽃 초인에게 당했겠지.’


그는 아찔한 감각을 되새겼다. 팀의 존재, 예지자와 A, 그리고 또 다른 동료들.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 달았다.


더불어, 한석 스스로도 능력을 키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 2분 10초로 늘어나긴 했어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를 위해선 체계적인 훈련, 혹은 초능력을 연구하는 인물의 조력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시간을 늘리는 것도 필요했고, 정지된 시간에서 함축된 압력을 버텨내는 내구성도 필요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시꺼먼 연기가 먼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 일어난 화학 공장 폭발 사고는 언론에 ‘기술적 결함’으로 덮이겠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리라.


“불꽃 초인이 움직였다.”


한석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멈춰라, 불꽃아.”


이 말이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다짐했다.


“난 더 이상, 갇힌 채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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