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16
세븐틴 호시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호시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윤호영
제목: 세월의 세월
“세상의 난이도는 헬! 내가 잘하면 알아서 잘 풀린다!”
호영은 개인의 노력으로 세상이 아직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못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컸다. 그런 중에 노동조합이라던지 이런 부분 때문에 한국의 성장이 멈췄다고 생각하는 뉴스들을 접하고 그 생각에 동조했다.
“망할 놈들의 노조! 다 쓸어버려야해.”
호영은 자신이 나중에 당연히 ‘노동자’ 측의 계급이 아니라 ‘사용자’ 측의 계급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한국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될 지, 아니면 의사가 될지, 어쩌면 대한민국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경제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호영은 그렇게 자신의 성적을 유지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유튜브를 틀었는데, 10주기라는 무언가를 하는 게 보였다.
“뭐가 10주기?”
그날의 날짜는 4월 16일이었다. 그런 날짜를 보고 호영은 이 날 뭔가 있었나 싶었다. 뭔지 몰라서 그냥 보고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이야기였다.
“아, 그게 벌써 십년이 됐나?”
그때 무대에 올라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아직도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내용이 있엇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주장하는 가족들이었다.
“뭐야, 귀찮게. 이제 그만하면 됐지. 사고로 죽은 분들 유감이긴 한데… 벌써 십 년이 지났잖아.”
분명히 특검이든, 검사 든, 인양됐을 때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호영은 인정하지 않고 아직까지 저런 주장을 하는 가족측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채널을 돌려 재밌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밥이나 먹어야지 싶었다.
뭘 시켜먹을 까 하다가 라면을 끓여 먹기로 하고 바로 보글보글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끓었다. 그런데 깜짝 실수하여 라면을 쏟았는데, 너무 뜨거웠다.
“아악 뜨거워!”
화상이 염려된 호영은 바로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의사를 기다리는데, 예쁜 간호사가 눈에 띄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호영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미인인 줄 알 수 있었다.
‘오… 저분, 마스크로 얼굴 반이나 가렸는데도 느낌이 다르네.’
눈썹 위로 흘러내린 잔머리와 우윳빛 피부, 또렷한 눈매. 잠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호영은 마음속으로 간호사들은 대체 왜 이렇게 예쁜 사람이 많지?라고 생각하며 갑작스러운 통증을 잠시나마 잊었다.
곧 그 간호사가 다가와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물어왔다. 호영은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손목을 내보이며, 국물을 쏟아 화상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간호사는 호영을 부축해 치료실 쪽으로 안내했다.
응급치료를 받는 동안, 호영은 간호사의 이름표를 슬쩍 봤다. 김다은’이라는 글자가 작게 박혀 있었다. 다은은 능숙하게 소독약과 연고를 바르며,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심한 화상은 아니지만, 잠시 물집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다음번에 드레싱할 때는…”
그 하루 동안, 호영의 머릿속은 기이하게도 ‘세월호 10주기’ 같은 복잡한 뉴스 대신, 이 간호사의 얼굴로 가득 찼다. 병원에서 나오며, 그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가볍게 연애해볼까?”라는 단순한 유흥심을 넘어서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호영은 2차 드레싱을 받으러 며칠 뒤에 다시 그 병원을 찾았다. 접수대에서 김다은 간호사님을 볼 수 있냐고 살짝 물어보니, 간호사 교대 시간을 알아보라며 대기하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호영은 뭔가 들뜬 기분이었다.
한참 기다리다 마침내 다은이 복도에 나타났다. 다은이 호영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세심하게 확인해 주었다.
“지난번보다 상태가 좋아지셨네요. 조금만 주의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은 씨. 아, 아님 간호사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그냥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환자분이시면 뭐 ‘선생님’이라 불러주셔도 되고요.”
호영은 상대방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태도에 뭔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잠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아까 간호사님 가슴 명찰에 노란 리본이 달려있던데,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아, 이거요…”
다은은 명찰 끄트머리에 살짝 붙어 있던 노란 리본 배지를 가만히 손으로 만졌다. 그 표정은 잠시 굳었지만,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실 제가 세월호 생존자예요. 그날, 그 배 안에 있었죠. 그래서 4월 16일이 되면, 아니 사실 1년 내내 잊지 않으려 리본을 달고 다녀요.”
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런 우연이…’라는 생각과 함께, SNS에서야 숱하게 보던 ‘세월호 유가족들, 생존자들’ 이야기가 눈앞에 있다니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 그렇구나… 많이 힘드셨겠네요. 음, 이제 괜찮아요? …그, 몸 상태나, 뭐 PTSD 이런 거…”
호영은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했다. 다은은 담담히 웃었다.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다행이죠. 근데… 마음의 상처는 오래 가더라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려고 했어요. 그날 못 돌아온 친구들이 제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까요.”
다은은 이내 환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너머에는 무거운 그림자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호영은 속으로 왠지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음속 깊이 ‘왜 저러나’ 하고 혐오에 가깝게 여겼다.
그날 이후, 호영은 자꾸만 다은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이 멀지 않아 다시 방문할 핑계를 생각했지만, 상처가 다 아물어 굳이 치료받을 일은 없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병원 인포메이션에 제가 뭘 좀 전해드릴 게 있어서…라며 메시지를 남겼다.
며칠 뒤, 다은에게서 짧은 휴일에 점심이나 먹자며 연락이 왔다. 호영은 한껏 들뜬 기분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서울 시내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다은은 사복 차림도 깔끔하고 수수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둘은 취미나 학창시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세월호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사실… 그날 나는 단원고 학생은 아니었는데, 그 배에 가족 여행 차 탔었거든요.”
“아, 그렇구나…”
“단원고 학생들도 나와 별로 나이 차이 안 났어. 내가 스무 살 때였으니까. 근데… 음, 정말 많은 애들이 미처 나오지도 못하고….”
다은은 손가락으로 종이컵 테두리를 조심스레 문질렀다. 눈가가 젖어들기 직전, 그녀는 울음 대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구조가 빨랐으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았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는 부분이 많아. 왜 대피 명령이 없었고, 왜 헬기도 있었는데도 제대로 인명구조를 안 했는지, 아직 궁금해요.”
호영은 괜히 뜨끔해졌다. 얼마 전만 해도 “이미 밝혀진 거 아니야?” 하며 무심했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호영은 이상한 갈증 같은 걸 느꼈다. 다은에게 관심이 커질수록,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생존자’가 눈앞에 있고, 그녀의 표정과 말에서 그날의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자신은 왜 그런 고통을 진상규명 운운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정도로 치부해 왔을까.
호영은 인터넷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세월호 관련 자료, 10주기 행사,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혹, 유가족들의 증언. 처음엔 반신반의하며 클릭했지만, 그 수많은 기사와 영상이 쏟아져 나오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당일 해경 지휘부는 왜 구조 신호를 늦게 보냈을까?”
“선장이 퇴선 명령을 하지 않아 승객 대다수가 배 안에서 기다리게 됐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복합적 인재다.”
호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거기에 달린 댓글들은 이분법적이었다. 유가족을 비난하는 쪽은 이제 그만 해라, 보상금 노리는 거 아니냐 같은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는 우리 아이들 죽음의 진실을 묻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며 답글을 달고 있었다.
“그런 논리를 아무 생각 없이 믿고 있었단 말이야? 나도 그랬지….”
호영 스스로도 예전에는 돈 더 받으려 저러나 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기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다은은 주말마다 세월호 관련 봉사활동과 추모 행사를 도왔다. 안산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이나, 다시 팽목항을 찾는 일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호영은 그런 다은을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병원 근무가 끝난 후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조그만 간식을 사들고 찾아가거나, 문자로 힘내요라며 안부를 전했다. 어느 날, 다은이 용기를 낸 듯 호영에게 말했다.
“주말에 안산에서 추모행사가 있어요. 혹시… 시간이 되면 같이 갈래요?”
호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묘한 두려움이 스쳤다. ‘거기 가서 뭘 하지?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다은의 초대에 거절할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호기심과 미안함, 그리고 그녀를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얽혀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안산 합동분향소. 시청 앞에는 노란 리본과 추모 문구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호영은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마주하고, 괜히 시선을 내렸다. 후회 섞인 자책이 스쳤다.
“예전엔 저분들을 왜 저렇게 오래 울고 있냐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는 작은 공연과 추모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데, 마음 한켠이 몽글몽글하면서도 서늘했다.
“세월호 이후 바뀐 게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진상규명을 외치고, 안전한 사회를 약속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유가족 대표가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도 함께 울먹이는 모습이었다. 저마다 노란 리본을 달고, 사진 앞에 헌화를 하며, '잊지 않겠다'는 문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호영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이 공간의 슬픔과 간절함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그러다 다은이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괜찮아요?”
“응… 그냥, 뭐라 해야 할지…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사실, 이제라도 이렇게 찾아와 주는 사람이 더 고마워요. 아직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이들이 많으니까.”
다은은 살며시 웃었다. 그 순간 호영은 눈물이 나올 뻔해서, 고개를 돌렸다. 행사가 끝난 뒤, 다은은 지친 기색이었지만 어딘가 단단해 보였다. 호영은 한 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정부가 세월호를 단순 해난사고로 처리하려 했고, 유가족들이 그 반대를 밀어붙여 여기까지 왔다는 등의 뒷이야기였다. 호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구나." 그는 차라리 부끄러워지고, 동시에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호영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한참 동안 ‘세월호 생존자 인터뷰’, ‘유가족 증언’, ‘정부 대응 실패’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 영상을 봤다.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마치 가슴을 후벼파는 기분이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은 처벌받았을까?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밝혀졌나?”
그는 문득 스스로 묻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며칠 후, 다은이 또다시 주말에 팽목항을 간다고 했다. 생존자와 유가족들 몇몇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추가로 추모 공간을 정비하고, 아직 남은 바다를 바라보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모임을 가진다고. 호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도 갈게 하고 과제며 뭐며 다 제쳐둔 채 새벽 기차에 올랐다.
팽목항에 내리자, 아침햇살이 희뿌옇게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노란 깃발과 리본, 스티커들이 부표처럼 남아있었다. 유가족들이 가져온 꽃을 바다에 띄울 때, 잔물결이 그 꽃을 살포시 태우고 움직였다.
“아직도…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죠.”
다은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사고 당시 직접 빠져나왔지만, 곁에 있던 친구 몇 명을 잃었다고 했다. “같이 놀러가자”고 설레며 떠났다가, 자신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몇 해를 보냈다는 고백도 했다.
호영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저 괜찮다는 듯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그는 복잡한 감정을 꿀꺽 삼키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날 호영은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을 직접 마주하며, 과거 자신이 떠올렸던 선입견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생히 체감했다. ‘배상금 타령’이라는 둥, ‘언제까지 우려먹냐’는 둥, 인터넷에서 떠돌던 말들이 사실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돈이나 특혜가 아니라, 단 하나의 진실, <왜 그날, 아무도 우리를 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해명을 원하고 있었다.
오후 즈음, 모임을 마친 이들은 작은 음식점에 들러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서로 말을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눈빛에서 교감이 오갔다. 한 유가족이 호영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젊은 분이신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 봐요?”
“아, 저는… 그냥… 제, 제 친구가 여기 와서 봉사를 하거든요. 그, 김다은 간호사.”
“아, 다은 씨. 고맙지요. 그리고 당신도 고마워요. 우릴 기억해주러 와줘서.”
그 평범한 감사 인사가 호영에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저 다은을 따라왔을 뿐인데, 벌써 뭔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기분이 든다.’
시간이 흐르자, 호영은 다은 곁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분향소 봉사, 추모행사 물품 정리, 세월호 관련 전시 부스 운영 지원 등등.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 젊은이들도 많이 만났다. 꽤 많은 이들이 그날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차 호영은 스스로 진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과거엔 관심 없던 법률 정보와 사고 원인 조사 자료 등을 찾아보고, 정부와 기관 책임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나? 같은 이슈를 궁금해하며 사람들과 토론했다.
예전 같으면 노조나 시민단체가 시끄럽다고만 여겼던 호영이, 이제는 이렇게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호영과 다은은 봉사를 마치고 나서 조용한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기울였다. 다은은 창밖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고마워요. 사실, 처음에 호영 씨가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는 건 눈치챘는데, 이 일이 이렇게나 깊을 줄은 몰랐죠.”
“아니, 내가 오히려 고맙지. 덕분에… 내가 몰랐던 걸 깨닫고 있으니까.”
“가끔은 내가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벌써 10년이나 됐는데도, 바뀐 게 크게 안 느껴지기도 하고.”
다은이 고개를 떨구자, 호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거잖아. 시간이 지났지만, 그날의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잖아. 우리, 좀 더 노력해보자.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그리고 정말 안전한 사회도….”
다은은 살며시 웃었다. 그 미소는 아픈 기억을 안고 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희망이 어른거렸다.
호영은 그날 이후로 본격적으로 세월호 관련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토론회나 세미나에도 얼굴을 비췄다. 예전이면 절대 듣지도 않았을 정치, 사회 이슈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싶어지는 장면이 참 많았다.
특히, 사고 당일 해경의 초동 대응 부실, 선원들의 탈출 과정, 선사와 정부 간부들의 이권 유착 문제 등 구체적인 이야기를 접할수록 몸서리가 쳐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게 정말 내 나라가 맞나?' 그렇게 분노가 일었다가, 혹시 내가 들은 이야기도 과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면 다시금 더 많은 자료를 찾아봤다.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진실은 이미 많은 부분이 나와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호영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걸 모른 채, 아니면 알고도 외면한 내가 부끄럽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한다.’
어느 밤, 그는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다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은아, 혹시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주관하는 활동에 내가 함께할 수 있을까? 기자회견 같은 거… 참여하고 싶어.”
이제 더 이상 그는 그저 참사의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즈음, 다은은 가만히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사실 나도 혼자 힘으론 벅찬데, 같이 해줘서 정말 힘이 돼.”
그들은 ‘노란 리본 행동’이라 불리는 다음 달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안산과 서울을 오가게 됐다. 이번엔 진상규명 촉구 발언, 단원고 추모 플래시몹, 그리고 세월호 기억 전시회도 열릴 예정이었다. 호영은 기획부터 홍보, 현장 안내까지 손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나섰다.
행사 당일, 호영은 노란 바람개비가 쉼 없이 돌아가는 공터에서 많은 시민들을 맞이했다. 일부는 발길을 돌리기도 했지만, 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전시물을 보고 유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무대에서 추모 발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호영은 계획에 없던 상황을 맞이했다. 유가족 대표가 그에게 이번엔 젊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며, 무대에 올라 짧게 소감이라도 말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호영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했지만, 마이크를 들었다. 시선이 수백 명 관객 위를 스쳐 갔다.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그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왜 서 있는지를 되새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실 세월호에 대해 관심도 없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이었죠. 왜 아직까지 이 일을 계속 들먹이냐고, 싫어하기까지 했어요. 근데…”
그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다은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제가 만난 누군가는 이 사고에서 살아남은 분이었고, 그분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외면한 걸 후회하지만, 이제라도 목소리를 보태고 싶어요. 사고의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고, 책임질 사람이 책임져야 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바뀌지 않을까요? 앞으로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호영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거짓 없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관객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발언을 마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호영에게, 유가족 중 한 분이 다가와 손을 꼭 잡으며 “고맙다”라고 했다. 그 말이 호영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호영은 이제 다은이 없는 과거도, 세월호를 부정했던 지난 세월을 온전히 덮어버렸다. 완전히, 세월호의 시간을 되찾을 때까지, 다은의 곁에서 계속, 세월의 시간을 쫓을 생각이었다.
이제 세월의 시간은, 호영의 시간이 되어간 것이었다. 진실이 어디 있든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각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