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18
세븐틴 우지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우지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연훈재
제목: 대한무협협회
“다음 권은?”
“아직 안나왔어.”
훈재는 학교에서 무통으로 통했다. 무협유통자. 또는 무협의 통이었다. 친구들은 훈재가 가져온 무협 소설과 만화책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너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냐.”
“재밌다, 다른 추천할 거 뭐 있어?”
무협에 보던 장면 중 재밌는 장면은 친구들끼리 따라하기도 했다. 가끔 학교에 출석하는 양아치도 훈재만큼은 건들지 않았는데, 자신을 재밌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훈재는 그런 양아치들을 싫어했다.
“훈재야~ 우류 유통~”
어깨에 팔을 올리며 어깨동물를 하자, 훈재의 진짜 친구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홀로 남겨진 훈재는 양아치들 사이에 둘려 쌓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양아치들이 훈재를 괴롭히는 걸 목적에 두진 않았다.
“오늘은 뭘 가르쳐 줄거야?”
무협속에 등장하는 무공에 대해서 훈재에게 교육을 받는 양아치들이었다. 지들끼리 놀기 위해서, 그리고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괴롭힘의 대상을 받지 않기 위해서 훈재를 자신이 오늘 본 무공을 표현했다. 소림사, 화산파, 무당파 등 무림에 등장하는 무공 중 이런 모습으로 어떤 소설에서, 그리고 어떤 만화에서, 무협을 소재로 삼은 만화에서 등장시켰는지 표현해냈다.
그 모습을 눈을 꽉 감고 있는 건영의 모습이 보였다. 곧 훈재에 의해서 배운 무공, 즉 외공을 건영에게 선보일 양아치들이었다.
“야 안 일어나? 나는 내공이 없어서 안 아프다고!”
그렇게 장난칠 모습들이 눈에 선했다. 울지 않았지만, 아마 보이지 않는 눈물로 이 교실을 가득 채웠을 건영이었다. 훈재는 그런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건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르치는 수준에서 끝나지,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을 괴롭히는 무공을 양아치들에게 전수하는 꼴이 됐을 것이었다.
훈재는 그렇게 양심을 속이고, 자신이 읽는 무림의 이야기와 다르게 악행에 눈감았다. 하교길에 건영에게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양아치들에게 붙잡힌 채 하교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건영에게 다가가는 건 토끼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
훈재는 이런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다. 그렇게 침묵한 채 양심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처음 보는 낯선 곳에 들렀다.
“이런 곳이 있었나?”
훈재는 그의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무림협회’의 모습을 보고 이를 올려다봤다.
“무림협회?”
그때 그 건물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훈은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무공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 내공에 대해서, 그리고 외공에 대해서였다.
훈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심코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마교가 또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내일부터 신입 선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왔어.”
“바로 그 가짜 내공 사건도 그 연장선이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에 훈재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바짝 세웠다. 분명 ‘무공’이라는 단어가 들렸고, ‘마교’라는 말이 주고받혔다. 사실 평소 같으면 무협 소설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현실에서 듣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문득, 학교에서 자신이 양아치들에게 전해주던 ‘무공 지식’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그저 소설 속 설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낯선 건물 앞에서 실제로 무공을 논하는 이들을 보니,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그동안 봐온 무협 소설 속 이야기들… 혹시 이 세상에 진짜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럴리가 없잖아, 뭐지 이건? 코스프레인가?’
그 순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밖으로 나섰다. 키가 훤칠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마치 조직 생활을 하듯 엄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골목 모퉁이에 숨어 있는 훈재와 딱 눈이 마주쳤다.
“거기, 학생.”
정장 차림의 남자는 아주 잠깐 인상만 찌푸렸을 뿐,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지?”
훈재는 대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 ‘골목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건물’이라고 말하기엔, 상대방의 분위기가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드문드문 들은 대화 속에서 ‘마교’, ‘내공’ 같은 말이 언급되었으니, 이건 자칫 잘못하면 위험에 휘말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길을 가다 보니까….”
남자는 한동안 훈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훈재는 갑작스러운 시선에 움찔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시선에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살펴보는 눈빛에 가까웠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음, 그러니 우연히 보았다는 건가.”
남자는 중얼거리더니, 잠시 뒤 휴대전화처럼 보이는 기기를 꺼내더니 화면을 살짝 스캔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선별된 인재는 아닌데, 흥미롭네.”
그 말에 훈재가 다시금 물음을 품으려 할 때, 건물 안쪽에서 누군가가 남자를 불렀다.
“저기, 현 팀장님. 서류 결재 문제로 좀…”
“알겠네. 곧 갈 테니 잠깐 기다려.”
남자는 뒤를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그리고는 다시 훈재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혹시 이곳이 궁금하면 들어와서 얘기해볼 텐가? 해치지는 않는다네.”
그 말에 훈재는 잠시 망설였지만,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과 방금 들은 수상쩍은 대화가 머릿속에서 엉켜 돌아갔다.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는 호기심, 그리고 그동안의 자신이 이리저리 치이며 약자 입장에 서 있었던 무력감이 동시에 작용했다. 이 기회가 무언가 새로운 문을 열어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훈재를 안내하며, 남자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 이어진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깊은 곳으로 연결된 느낌을 주었다. 마치 평범한 건물과는 다른, 비밀스러운 통로 같았다. 벽면에는 간소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협 소설에서 봤던 문파의 문장과 유사한 느낌이 있었다.
‘무림협회… 정말로 이런 곳이 존재하나 보네.’
건물 안에는 책장이 빼곡히 늘어선 자료실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어떤 도장처럼 보이는 넓은 훈련장이 있었다. 대여섯 명 가량의 사람들이 한가운데서 맨손으로 대련 중이었는데, 그 움직임이 보통 격투기와는 달랐다. 마치 경공을 익힌 것처럼 몸이 가볍게 날아올라, 잠시 허공에 체중을 실은 채 공격을 주고받았다.
‘설마… 진짜 경공?’
입이 떡 벌어진 채로 훈재가 그 모습을 지켜보자, 함께 들어온 남자가 조용히 웃었다.
“처음 보면 다들 그런 표정을 짓지. 나는 현욱이네. 공식 직함은 무림협회 실무 지원 2팀장이지. 넌?”
“저는… 연훈재라고 해요.”
“좋아. 일단 우린 정부와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고, 무공을 가진 인재들을 선별하여 육성하는 일을 담당한다네. 소위 말하는 정파의 핵심이 여기 있다 보면 된다.”
현욱은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간략히 설명했다. 훈재의 눈에 비친 그는, 마치 공무원과 무림 고수 사이 어딘가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럼… 무림협회가 뭐 하는 곳인지 물어봐도 돼요?”
“물론이지. 여긴 정식으로 ‘국가무림지원센터’라는 별칭도 있어. 흔히들 그냥 ‘무림협회’라 부르지만. 정부가 정파와 협의하여 만든 조직이야. 무공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동시에 마교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지. 겉으로 공개되진 않았지만, 꽤 오래전부터 작동해왔어.”
“마교라니… 진짜로 마교라는 게 존재하나요?”
“음, 엄밀히 말하면 고전 무협에서 말하는 ‘악의 조직’과 비슷한 성격이긴 하지. 보통은 불법 마약 제조, 불법 무기 거래, 심지어 테러까지 가담하는 지하 범죄집단으로 알려져 있어. 하지만 그들에겐 실제로 내공을 지닌 이들도 많지. 순수하게 돈이나 권력을 탐하는 자들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음험한 무공을 구사하는 사파 고수들도 그쪽에 포진해 있다네.”
현욱은 대화를 하면서도 틈틈이 주변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마치 훈재가 이상한 언행을 보이지 않는지 체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훈재 입장에서는 거짓 없이 궁금증이 치솟았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무공이라는 게, 정말 우리가 소설에서 보는 경공, 내공 같은 걸 포함하는 건가요? 사람 몸이 어떻게 허공을 날 수 있는지, 그게 혹시 과학적으로 해석되거나 그런….”
“과학이라. 물론 얼마간의 해석은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오랜 전통의 ‘기(氣) 응용술’이라고 보는 편이지. 간단히 말해, 인간의 몸에 흐르는 기를 집중하고 단련해 축적하면, 평범한 사람에 비해 비약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면 돼. 훈련 방식은 문파마다 다르고, 역사도 길어.”
현욱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아지랑이처럼 공기가 일렁이더니 작은 바람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기류가 주변의 먼지를 휙 날려버리자, 훈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단해….”
“특별할 건 없어. 일정 수준의 내공을 쌓으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자,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은데, 일단 네가 이 협회의 체계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네.”
현욱은 다시 휴대기기를 꺼내 들고 훈재에게 작은 쇠팔찌 같은 것을 건넸다.
“손목에 차 보게.”
왠지 낯선 기운에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훈재는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도망치기엔 호기심이 훨씬 컸다. 팔찌를 찬 순간, 희미하게 파란 불빛이 번쩍이더니 기기가 삐 소리를 냈다.
측정 중… 미량의 기(氣) 반응 감지. 잠재력 판독 결과: B등급 추정.
현욱이 놀란 듯 반응했다.
“B등급이면… 흠, 의외로 높군. 처음 보는 학생인데, 소질이 있나 보지. B등급이면 충분히 협회가 관심을 가질 만한 수준이야. 기초를 배우면 금방 큰 성장을 기대할 수도 있지.”
훈재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눈만 깜박였다. 무림 소설에서나 봤던 ‘재능’ 이야기처럼, 여기에도 재능 등급이 존재한다니. 설마 이게 현실일 줄이야. 현욱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저도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물론 정확한 절차가 있어야 해. 네가 협회의 정식 교육 과정을 밟을 의사가 있다면, 등록을 진행해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가볍게 귓속말하듯 덧붙였다.
“사실, 최근 마교가 다시 준동하고 있어서 무공 잠재력이 있는 인재들을 더 빨리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야. 정부 측도 우리 협회에 인력 지원을 강하게 요구 중이고. 그러니 이 시점에서 네가 제 발로 들어왔다니, 정말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지.”
그 말에 훈재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제 발로 들어왔다’라는 말. 마치 자신이 예상치 못한 특별한 방식으로 걸려든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학교에서 양아치들에게 무공 지식을 가르치다가, 결국 이상한 일을 겪은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그때, 건물 안을 지나가던 또 다른 인물이 현욱에게 다가왔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흰 머리카락이 몇 올 섞였지만, 자세나 표정이 날카로웠다.
“현욱, 이쪽이 아까 보고된 ‘민간인’인가?”
“예, 다행히 B등급 측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면담을 진행 중입니다.”
남자는 시선을 훈재에게 돌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순간 훈재의 팔끝이 살짝 뻐근해졌다.
‘이건… 뭐지?’
“음. 기가 어색하게 흐르긴 하지만, 감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흥미롭군. 혹시 너, 어릴 때부터 몸이 좀 묘하게 뻐근하다거나, 가끔 식은땀이 난 적 없었나?”
“네? 그런 적… 있긴 있었어요. 날이 심하게 습하거나, 혹은 괜히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남자는 잠시 눈을 빛내더니, 현욱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안에서 기가 조금씩 흘러나왔던 거지. 그게 쌓이다 보면 대개 몸의 균형이 깨지거든.”
“이런 경우는 완전히 기초부터 잡아줘야 할 겁니다, 원장님.”
“그래야겠지. 우선 네가 이 안에서 무공을 좀 배워볼 마음이 있다면, 협회의 정식 절차에 따라 평가 시험을 치르고 수련 과정을 밟아야 한다. 물론 한두 달 짧게 끝날 일이 아니야. 괜찮겠나?”
원장이라 불린 남자는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훈재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학교에서 매일같이 자신이 동경하던 무협 이야기 속 장면이, 지금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머릿속 한쪽에서 이건 기회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싶습니다.”
단호히 대답했다. 그 순간, 옆에서 현욱이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럼 됐어. 오늘은 늦었으니 간단히 서류만 작성하고 내일부터 바로 체험 교육을 시작하도록 하지.”
곧 직원 한 명이 나타나 서류 몇 장을 꺼냈다. 거기엔 이름과 나이, 학교, 연락처 등을 기입하는 란이 있었다. 평범한 서류처럼 보이지만, 중간중간 ‘기(氣) 측정 결과’라든가 ‘문파 선호도’ 같은 항목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문파 선호도라니… 정말 무당파나 소림파 같은 게 존재한다는 거야?’
적어도 이 협회는 그걸 매우 진지하게 다루는 듯했다. 훈재는 꼼꼼히 적어내려가며, 혹시나 거짓 정보를 작성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부정확하게 쓰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 솔직하게 정보를 적었다. 어차피 집에서 허락받기도 전에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서류를 내고 나자 현욱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잘 선택했네. 사실 요즘 마교가 교세를 확장하려 애쓰고 있어서, 우리가 빠르게 우수 인원을 충원해야 해. 이를테면 네가 제때 와 줘서 든든하다는 뜻이지. 본격적인 훈련은 내일부터 시작이야. 오후에 학교가 끝나면 이곳으로 바로 오면 된다네. 교복 차림이어도 상관없어.”
“네…”
훈재는 살짝 얼떨떨한 채 대답했다. 뭔가 이야기가 술술 잘 진행되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B등급이라면 꽤 높은 평가라고 했으니. 건물 밖으로 나서려 할 때, 원장이라 불린 남자가 문 앞에서 마지막 당부를 했다.
“대외비다. 절대 밖에 나가서 함부로 떠벌리지 말거라. 그리고 혹시 학교에서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쪽에 연락하도록. 공권력과 협력 중이라지만, 우리가 은밀히 처리할 일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해.”
그 말에 훈재는 문득 학교의 양아치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무공’ 지식을 흉내 내며 아예 힘을 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서투른 ‘외공’짓으로 건영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어설프게 단련까지 하면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죄송합니다만… 만약에, 저랑 같은 학생들이 엉뚱한 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해요?”
원장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안 되지. 무공은 남을 해치려는 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법. 무공을 부당하게 쓰는 일은 마교의 범죄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함부로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우리 쪽에서 그런 문제를 인지하게 되면, 바로 조사하고 조치에 들어갈 거야.”
그 말은 상당히 단호했다. 동시에, 어딘가 든든한 보호막 같기도 하고, 협회가 생각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날 훈재는 어수선한 감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협회의 존재, 자기 안에 잠재된 ‘기’, 마교의 준동,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양아치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섞인 채, 어딘가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여전히 양아치들이 건영에게 또다시 새로 익힌(?) 무공 흉내를 써먹고 있었다. 별다른 효과는 없겠지만, 그 모양새만으로 건영은 쩔쩔매고 있었다. 멀찍이 그 광경을 본 훈재는 결국 더 이상 못 본 체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무림협회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교와 다를 바 없는 부당한 폭력.’ 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직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가만히 있기는 싫어.’
훈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마음 한구석에 뭔가 희미한 열기가 도는 느낌이 있었다. 아직 ‘내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 열기를 모아 몸을 움직이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예감이 들었다.
건영을 옥죄고 있던 양아치들에게 다가간 훈재는, 더 이상 언제처럼 소심하게 피하거나 농담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들 앞에 서서 또렷하게 말했다.
“그만둬.”
양아치 무리가 ‘뭐야?’ 하는 표정으로 훈재를 노려보았다. 이전까지 순순히 무협 이야기를 전해주던 녀석이, 갑자기 저항 의지를 내보이자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왜, 네가 뭔데?”
“어제까진 그냥 넘어갔는데, 이제 안 할 거야.”
짧은 시간 동안의 대치. 훈재는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이것이 ‘정파’라 불리는 길을 가겠다 결심한 첫걸음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무림협회로부터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소설 속 무공을 악용하려는 모습에 협조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건영이 고통받는 걸 눈앞에서 외면할 수 없었다. 양아치들은 헛웃음을 흘리며 뻗어오는 손을 들이밀었다.
“지금부터 너나 맞아봐라. 대장, 살살 좀.”
그들이 달려드는 순간, 훈재는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별다른 기술을 썼다기보다는 예전보다 조금 더 예리해진 감각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평소 같으면 그대로 잡혔을 동작을 가볍게 흘렸다. 마치 어제 협회에서 봤던 고수들의 발놀림이 뇌리에 남아 있던 것 같았다.
‘이건… 생각보다 괜찮은데?’
양아치들이 당황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훈재는 얼떨결에 팔을 뻗었고, 상대를 살짝 밀쳐냈다. 비록 무공이라 부를 만한 수준은 아닐지 모르나,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손바닥에서 뻗어나간 것만 같았다.
“윽?”
넘어지진 않았지만, 상대는 분명히 꽤 강하게 밀리는 느낌을 받았는지, ‘어?’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교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고, 구석에 있던 건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훈… 재야.”
그 사이, 교실 뒤편으로 밖을 살피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익숙한 정장 차림의 모습이었다. 바로 무림협회 2팀장 현욱이었다.
‘왜 학교 안까지…?’
현욱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뒤, 살짝 미소 지었다.
“확실히 감이 있군. 아직 교정(矯正)할 부분이 많지만.”
양아치들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정장 남자를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 뭐야?”
현욱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협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정부와 협력 중인 무인협회 소속이다. 너희가 무술을 악용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고, 그 행위를 중단시키러 왔다.”
그 말에 양아치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무, 무공? 지금 뭐라고…?”
"그거 다 얘가 시킨 것예요."
하고 키득거리는 양아치들이었지만, 순간적으로 현욱의 시선에 모두 굳어버렸다. 현욱의 눈빛이 매우 차가워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네 녀석들, 더 이상 학생들을 괴롭히면 안 돼. 하물며 소설 속 설정을 현실에서 흉내 내며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엄연한 범죄지. 만약 계속하면 교내 징계 수준이 아니라, 협회 차원의 제재가 뒤따를 거다.”
정체 모를 위압감에 양아치들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아무리 외부인이라 해도, 이미 학교 교실 안에서 이렇듯 당당하게 경고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보통이 아닐 터였다. 곧 그들은 씩씩거리며 반항하려다, 현욱의 차가운 눈매를 보고는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너, 훈재. 오늘부터 협회 교육을 받기로 했다고 하던데, 잘 해내야지?”
현욱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 말에 양아치들이 다시금 놀라서 훈재를 돌아봤다. 그러나 훈재는 이미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굳게 서 있었다.
‘뭐, 뭐지.’
교실 안이 고요해졌다. 건영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훈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주먹을 쥔 채 숨을 고르는 훈재의 품 안에, 어제 협회에서 등록한 ‘무림세계’가 작지만 강렬한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내공을 제대로 닦으려면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과거처럼 무력감에 휘둘리는 존재로 머무르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마교의 암습이 예고된 21세기 무림세계의 거대한 파란 속으로 훈재를 인도할 것이다.
“자, 그럼 준비됐나? 오후에 수업이 끝나면 협회로 바로 와. 앞으로는 내가 직접 네 훈련을 담당하게 될 거야.”
현욱의 말에, 훈재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 뒤편 어딘가에서, 간신히 뒤로 빠진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쩌면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훈재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렸으니까.
그나저나 어젠 자신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나와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분명한 건 21세기에도 분명 무림세계는 존재한다. 내공이 있는 자만 접근 가능하다는,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는 정파의 중심이. 그리고 어둠 속에서 기회를 노리는 마교가 서서히 위협의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스스로 걸어들어간 길 위에서, 훈재는 과연 어떤 무공을 익히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직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훈재의 마음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다음 권은 언제 나오나요?”
“아직 안 나왔어.”
몇 달 전만 해도, 책을 빌려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하루의 전부였던 훈재. 그러나 지금, 그는 고개를 들고 교실 밖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무협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는 세계 속으로.
그리고 곧, 무림협회 본부의 훈련장에 설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목표는 천하제일인.’
모든 무인들이 목표로 하는 길에 자신도 출사표를 던지고자 하는 훈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