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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논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23

by 라한
버논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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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논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한준희

제목: 책을 사자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따라 출근하는 걸 좋아했다.


“나 유치원 말고 서점 갈래!”

“유치원 갔다 오고, 그런 다음에 가자.”


준희는 나중에는 서점에 가는 게 아빠와 엄마의 일을 도와주는 격이 되어서 부모님이 운영하는 서점 보다는 도서관에 자주 갔다.


“독립서점에는 그 서점에서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어서 좋아. 그 공간을 오로지 담은 이야기들이 있거든.”


독립서점주의 아들이기에 독립서점은 어때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던 준희였다. 그럴 때 마다 자신이 직접 겪고 생각했던 걸 여실히 드러내는 준희였다.


“역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지, 준희가 말을 잘해.”


학교 제일의 말하기꾼이라는 말이 준희의 별명이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장에 초대되었고, 준희는 문득,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독립서점에서도 독서모임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는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혹시나 놓칠까 싶어 서둘러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구상을 이어갔다. 독서모임을 하면 어떤 책을 함께 읽을지, 어떻게 사람들을 불러 모을지, 또 어디에 광고를 낼지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독서모임이라... 아빠 서점에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책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니까 좀 멋있다.”


준희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부모님께 말문을 열었다.


“아빠, 엄마. 독서모임을 열면 어때? 요즘 학교에서도 독서모임장이 되고 나니까, 그 재미를 여기 서점에도 가져오고 싶어.”


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관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독서모임? 좋지.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할 생각이야?”

“맞아. 장소야 우리 서점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는데, 구체적으로 계획은 세워봤니?”


준희는 어젯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머릿속에서 정리한 생각들을 차근차근 꺼내 놓았다.


“우선,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쯤 모이면 어떨까 싶어. 주말이면 사람들이 시간이 좀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처음에는 책을 딱 한 권 정해놓고 읽고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시작해 볼래.”


아빠는 서점 카운터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서점이 한 시부터 세 시까지는 비교적 한가하니 그 시간을 빌려줘도 되겠구나. 손님들이 책을 고르며 어수선하지 않게, 서가 옆으로 작은 테이블을 몇 개 놓으면 어떨까?”

“그거 좋네요. 서점 한쪽을 조용히 꾸며두면 모임 장소로 쓰기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가 흐뭇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준희는 창문 밖을 잠시 바라봤다. 햇살이 서점 간판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바깥이 조금 포근해진 걸 보니, 어느덧 봄이 코앞이었다. 준희는 다시금 가장 큰 고민을 털어놓았다.


“음... 문제는 사람들이 얼마나 참여할지 모르겠다는 거야.”

“학교 친구들 몇 명은 당장 떠오르는데, 그 친구들도 부모님이 허락해주셔야 할 거고. 또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모으지?”


아빠는 이미 ‘서점 독서모임 안내’ 같은 문구가 적힌 포스터 디자인을 머릿속에 그리는 듯했다.


“이럴 땐 교보문고나 예스24 같은 온라인 서점에서 하는 이벤트 공지를 참고해보면 어떨까? 독립서점이라고 해도 온라인 홍보가 중요하잖니. 우리도 SNS에 올리고, 동네 카페나 맘카페 같은 곳에 공지를 띄워볼 수 있어.”

“좋은 생각이에요. 또 이 서점에 오는 단골손님들한테도 먼저 권해보면 어떨까? 여기서 꾸준히 책을 사가시는 분들이야말로 독서모임에 관심이 많을 가능성이 크니까.”


엄마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준희는 얼른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SNS 홍보, 단골손님에게 권유, 지역 커뮤니티 홍보... 좋아. 그럼 첫 책은 뭐가 좋을까?”


그러자 아빠가 최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순위표를 살짝 꺼내 보였다.


“요새는 한강 작가의 소설들이 정말 인기야.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가 동시에 상위권이라고 하더라.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니 말이지.”


“그냥 대중적 인기만 보고 정하는 것보다는, 처음 모임이니까 조금 더 쉬운 책이 좋지 않아?”


엄마가 조심스레 제안하자 준희가 생각에 잠겼다.


“또 이웃 중에는 어렵거나 무거운 작품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잖아.”

“맞아요. 너무 묵직한 주제면 첫 모임부터 들어오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왕이면 요즘 화제인 책으로 주목을 끄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준희는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장원영이 추천해서 화제가 된 초역 부처의 말 어때요? 내용도 막 너무 종교적이진 않고, 마음챙김이나 힐링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던데.”


아빠와 엄마가 눈을 마주치며 크게 끄덕였다.


“그 책이라면 완전히 문학 장르만 읽겠다는 부담이 없고, 또 읽다 보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퍼져나갈 수 있겠네.”

“동네 분들도 일상 스트레스 해소나 명상 같은 주제에 관심 많은 분이 꽤 있더라. 좋네, 초역 부처의 말로 첫 모임을 해보자.”


결정이 되자마자, 준희는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책을 구입할 사람들을 위해 서점에 재고를 넉넉히 들여놓고, 독서모임 참여자들에게 10% 할인을 적용해주는 이벤트도 생각했다. 포스터 시안도 구상해봤다.


독립서점 『책을 사자』 독서모임

첫 책: 『초역 부처의 말』 (코이케 류노스케 저)

모임 일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1시~3시

장소: 서점 안 독서 코너


준희는 포스터 문안을 본인 SNS에도 올리면서 친구들을 태그했다. 그리고 학교 독서모임 발표 시간에도 잠깐 홍보를 했다.


“여러분, 혹시 주말에 시간이 된다면 저희 집 서점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와주세요. 동네 주민도, 친구들도 모두 환영해요!”


그날 오후,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 중 몇몇이 포스터를 보고 시선을 멈췄다.


“이거 독서모임이래. 오, 요즘 스트레스 많아서 힐링 서적 찾고 있었는데... 신청해볼까?”

“토요일 오후면 나도 시간 괜찮은데!”


그중에는 서점에서 매주 새로운 에세이 코너를 찾아오던 단골도 있었고, 근처 중학생 딸과 함께 온 부모님도 있었다. 곳곳에서 포스터를 사진 찍어 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자, 준희는 은근히 뿌듯함을 느꼈다. 아빠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사람만 모이면 되겠는데?”

“책도 충분히 확보했고, 공간도 어느 정도 정비하면 되겠어.”


엄마는 카운터 아래 서랍에서 예쁜 메모지를 꺼내왔다.


“토론 때 사용할 발제문을 적을 때 쓰면 좋을 것 같아. 사람들 각자 고민거리나 질문을 적어보도록 하는 건 어때? 책 내용 중에서 궁금한 구절이라든지.”


준희는 그 얘기를 듣자, 잊고 있던 독서모임 운영 방법 관련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발제문. 그렇지, 그냥 모여서 잡담만 하면 산만해지니까, 내가 기본적인 토론 주제 몇 가지는 준비해가야겠어요. 예를 들어, 이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구절 하나씩 뽑아오기, 그 이유 말하기, 혹은 실제로 내 일상에 적용할 방법 같은 거!”


그리고 아빠는 깜빡 잊고 있던 부분을 추가했다. 엄마도 수긍했다.


“모임 인원이 너무 많아지면, 대화가 잘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미리 인원을 10명 선착순 정도로 제한하는 건 어떨까? 대신 대기자도 받아놓고, 혹시 결원이 생기면 연락하고.”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다 같이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하니까요.”


독서모임까지 남은 시간이 2주 정도였는데, 그사이 점점 신청 문의가 늘었다. 학교 친구들 몇 명, 동네 주민, 어떤 분은 포스터 보고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토요일 독서모임 신청하고 싶은데요, 혹시 나이 제한이 있나요?”

“아니요, 성인이나 청소년이든 상관없습니다. 중학생 이상이면 괜찮아요.”

“와, 아빠! 신청자가 많아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하죠? 다 받아도 되나?”


일주일 뒤엔 이미 모집 정원 10명이 넘어서버렸다. 준희는 깜짝 놀랐다. 아빠는 조금 신난 얼굴이었다.


“좋네. 예상보다 호응이 좋아서 기분 좋구나. 일단 선착순 10명까지만 받고, 그 뒤로 오는 분들은 대기 명단으로 두자. 혹시 모임 당일 결원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는 걸로.”


이렇게 어느덧 첫 모임 날이 다가왔다. 토요일 아침부터 준희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점 한쪽에 테이블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여분의 의자를 놓았다. 발제문을 인쇄해 두세 장씩 준비해놓고, 이름표도 간단히 만들었다.


‘이름을 알아야 서로 편하게 부를 수 있으니까.’


생각보다 이런 준비가 꽤 손이 갔지만, 준희는 신이 났다. 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서점으로 들어왔다. 포근한 3월의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며 서점 안에 한층 밝고 기분 좋은 분위기를 더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독서모임에 신청한 김지나라고 해요. 동네에 살고 있는데, 포스터 보고 관심이 생겨서 왔어요.”

“반가워요. 저도 지인 추천으로 알게 돼서 신청했답니다.”


서로 낯선 이들이었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덕분인지 금세 어색함이 풀렸다. 잠시 후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인사를 나누면서 가볍게 이야기를 건넸다.


“이 책, 장원영 아이돌이 추천했다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서 많이 읽더라고요.”

“저도 사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마음 챙김 쪽 책에 관심 생겼는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임 시작 시간이 되자, 준희는 서점 주인 아들이자 오늘의 독서모임 호스트로서 자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서점 주인 아들 한준희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몇 명이 수줍게 박수를 쳤고, 아빠와 엄마도 뒤에서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오늘은 초역 부처의 말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느낀 점을 나눠보려고 해요. 일단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이름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혹은 궁금했던 점 하나씩 말해주시면 좋겠어요.”


모두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책에 줄을 긋고 포스트잇을 붙여온 부분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사실 다 읽지는 못했는데, 인상 깊었던 구절만 발췌해서 읽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책을 완독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괜찮아요. 중요한 건 처음 이 모임에 오신 그 마음이고, 또 읽은 부분에서 얻은 생각들을 나누는 거니까요.”


준희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참석자 중에는 회사 생활에 지쳐 잠깐의 위로를 얻고 싶었다는 직장인도 있었고, 아이를 키우며 하루하루 바쁜 일상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주부도 있었다. 사람들은 책 속에서 발견한 짤막한 구절 하나를 꺼내며, 자기 삶 속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부분에서 ‘마음을 가벼이 하는 연습은 늘 작은 일상에서부터’라고 나오는데, 저한테는 이게 정말 크게 와닿았어요. 매일매일 회사 일로 스트레스 받다가도 커피 한 잔 마실 때 숨 돌리는 시간을 좀 더 소중히 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애기 재우고 나면 늘 늦은 밤인데, 그때 잠깐 휴식은커녕 집안일 하다 보면 새벽이 되기 일쑤였어요. 오늘부터라도 10분만 일찍 재워놓고 나 자신을 위한 차 한 잔을 마셔보면 어떨까 해요.”


이야기는 책의 문장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경험담과 조언이 오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중간에 준희가 준비해둔 발제문 질문들을 꺼내자, 대화가 한층 풍성해졌다.

‘만약 여러분이 이 책에서 말하는 부처의 가르침 중 하나를 일상에 실천해야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볼 수 있을까요?’ 질문을 본 사람들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예정된 2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사람들이 시계를 보고 놀랄 정도로, 모임은 집중도 높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며 한마디씩 정리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사실 저는 이런 독서모임이 처음이라 낯설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를 공유하니까 책을 두 배로 이해하게 되는 느낌이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책을 읽는다는 건 혼자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함께 읽으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네요.”


준희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모두 모임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달에도 같은 시간에 모임을 열 예정이니까, 혹시 또 오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 알려주세요!”


아빠와 엄마도 뒷정리를 도우며, 간단한 차와 과자를 준비해 뒀다. 모임이 끝나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 번에는 좀 더 깊이 있는 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누군가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을 언급했고, 또 누군가는 예스24 순위에서 1위를 한 정치사회 이슈 책도 궁금하다며 개인적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책들도 재미있지만, 오늘처럼 부담 없이 마음챙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아요.”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니, 독서모임의 방향성은 정말 다양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힐링, 어떤 이는 시사, 또 어떤 이는 문학의 깊이. 준희는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주제를 조금씩 바꾸면 어떨까? 첫 번째 달은 마음챙김, 두 번째 달은 한국 소설, 세 번째 달은 경제서나 자기계발서... 이렇게 하면 매번 색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서점을 떠나갔고, 준희는 뒷정리를 도우며 엄마, 아빠와 마주 보았다. 아빠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땠니, 오늘 첫 독서모임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했어. 나도 사람들이 책을 어떻게 읽는지,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함께 들을 수 있으니까 정말 신기하고 좋더라.”

“오늘 같은 분위기라면 분명 모임이 계속 커질 거야. 그리고 네가 말한 것처럼 주제를 살짝살짝 바꿔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아.”


준희는 서가 한쪽에 정리해둔 책들을 보며 이번 모임에서 느낀 뿌듯함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 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가 오가는 작은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희는 서점 이름을 다시금 읊조렸다.


“책을 사자.”


‘그러고 보니 정말 좋은 이름이야.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책을 ‘향해 다가가자’는 느낌도 들고.’


학교에서 ‘말하기꾼’이라는 별명을 받은 준희였지만, 정작 오늘은 말하기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배운 날이었다. 그건 바로 ‘함께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었다. 혼자 머릿속으로만 곱씹던 생각들이 다른 사람과 만나며 살아 움직이는 그 현장감, 그리고 도서 한 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빛날 수 있다는 다양성.


문득 저녁놀이 창문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며, 준희는 다가올 다음 달 독서모임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어떤 책을 함께 읽게 될지, 또 어떤 사람들이 모일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지 설레는 마음이 커졌다.


‘그날도 서점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맞이해야지. 그리고 오늘처럼,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마음 편히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


준희는 그 결심을 가슴에 새기며 서점 불을 끄고 나왔다. 서점 밖으로 나오니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어느새 초봄 기운을 가득 싣고 있었다. 아빠는 가게 셔터를 내리면서 한마디를 건넸다.


“오늘, 진짜로 책이 가득한 좋은 시간을 보냈구나. 준희, 수고했어.”

“이건 엄마가 오늘 모임 들으면서 적은 메모야. 재밌는 의견이 많아서 그냥 흘려보내기 아깝더라.”


메모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오늘 읽은 책에서 뽑은 문장들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게 하라.’

‘때로는 멈추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

‘타인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결국 내 마음도 키운다.’


준희는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따뜻함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책도, 사람도... 모두 고맙네.”


준희는 더 크게 자란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아마 오늘 밤은 무척 깊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으리라. 다음 달에 열릴 모임에선 또 어떤 책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엮을지, 벌써부터 두근두근했다.


그렇게, 독립서점 '책을 사자'의 첫 독서모임은 성공적으로 문을 열었다. 책을 사는 것,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모임이 잘되자 기분이 좋았는데, 새로 신청한 인물의 이름이 신경이 쓰였다.


"에이 설마,"


꼭, 혹시는 실망이 되고 설마는 진짜가 되었다.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이름인 '주하'의 주인은, 바로 그녀였다.


"주하..."

"?!"


주하도 준희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영겁과 같은 순간의 시선 마주침을 겪었다. 책 한 페이지 보다 아니, 한 권 보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합쳐도 읽을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게 서로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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