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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25

by 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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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정율희

제목: 결혼 할래요?


“엄마랑 아빠는 어디서 만났어?”


어린 율희의 질문에 부모님은 고민했다. 정직하게 말해줄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말해줄 것인지에 대해서 였다. 그러다가 엄마가 조용히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랑 아빠는 그러니까, 선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둘이서가 아니라,”


율희의 엄마와 아빠는 결혼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누가 짝이 될까 궁금해 했고,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이 결혼하자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줬다.


그런 사랑속에서 율희가 태어난 것이었다.


“우와, 정말? 나도 나도 할래!”


율희의 말에 두 부모님은 씽긋웃엇다. 그저 어린 아이의 치기어린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았을까. 정말로 율희가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될 것이란 것을. 그 때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었다.


율희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실질적으로 사회를 인식하게 된 후 꾸준히 노력하게 됐다.


매력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율희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연애 프로그램에 나가게 됐다.


아마 이런 프로그램은 2번 이상 나가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짝을 잘 골랐어야지. 이 프로그램을 나가기 위해서 율희는 그동안 자신에게 고백해오는 남자의 고백도 거절했다.


나름 율희만의 첫사랑 프로젝트였다. 제발 환상적인,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가 나오기를 바랐다. 자신도 웬만하면 남자들의 이상형에 가깝게 아름다워졌으니까. 마땅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새벽 공기가 차갑게 남아 있을 무렵, 합숙 하우스 1층 로비에 남녀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프로그램 일정표에 따르면 오늘은 진솔 토크 데이라고 예고되어 있었다. 제작진은 반나절 동안 스튜디오가 아닌 합숙 하우스 내에서, 참가자들이 직접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모든 촬영 장비는 평소처럼 설치되어 있었지만, 진행 MC나 특별 미션 없이 자유롭게 상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었다.


새로운 아침이 열리자마자, 서린과 도현이 같은 식탁에서 차를 나누어 마시는 모습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서린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거울 앞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마친 뒤, 도현과 마주 앉았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 안에서 살짝 설렘이 느껴졌다. 반면 도현은 다소 차분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들을 곁눈질하는 다른 여성 참가자들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되었다.


수현은 창가에 앉아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서, 이현이 창밖을 바라보는 옆자리에 조용히 자리했다. 둘은 며칠 사이에 조금씩 친분을 쌓아 왔지만, 아직까지 서로에게 확실한 호감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이현이 스포츠 트레이너로 일하며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하는 모습은 수현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수현은 연예인처럼 튀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챙겨주는 세심함을 겸비해 있었다.


한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율희는 남세준과 몇 마디 나누다가, 최근 분위기나 다른 참가자들의 동향에 대해 물었다. 남세준은 간밤에 편집본 모니터링을 짧게 했는지,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고민이 생긴 듯했다. 자신의 프리랜서 생활과 자유로운 성향이 방송에서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율희는 그를 달래며,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매력 포인트가 될 거라 덧붙였다.


“요즘 카메라가 늘 나를 다르게 포착해 버리는 기분이야.”


남세준이 바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말로 심각하게 보이진 않아. 오히려 재밌게 봐줄 걸?”


율희는 남세준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아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민아는 프로그램 초기부터 남성 출연자들에게 폭넓게 관심을 드러내 왔지만, 그중 누군가를 확실히 콕 집어 대시하지는 않았다.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되,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 듯 보였다.


“이 집엔 남자들이 참 다양하네. 네가 진짜 끌리는 사람이 누구야?”


민아는 가볍게 율희에게 물었다.


“글쎄, 아직 딱 정하진 않았어.”


율희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내가 처음엔 이현을 좀 주시했는데, 운동 좋아하는 사람이 취향이라서. 근데 도현 오빠도 멋있더라. 남세준도 잘해 주고. 사실 다 괜찮아 보이긴 해.”


민아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 괜찮으면 결정은 언제 해? 조심하다가 기회 놓치는 거 아냐?”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은지가 책장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은지는 2030 창업가답게 현실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결국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가능성을 좁혀나가야 하지 않을까. 시간도 제한적인데.”


은지의 말에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율희는 아직 확실한 감정의 줄기를 잡지 못했고, 그 점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엄마와 아빠는 방송에서 분명 드라마틱하게 인연을 맺었지만, 그 뒤로 더 깊은 신뢰를 쌓아온 건 일상 속에서 쌓인 배려와 공감이었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여유롭게 거치지 않고 섣불리 결정해 버리면,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사랑은 어렵지만, 나머지 것들을 쉽게 만들어 준단다."


문득 부모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 2층에선 인영이 해준과 나란히 내려오며 낮에 대화 시간을 갖기로 약속했다는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해준은 회사 대표로 일하면서도 성실하게 촬영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절히 마음을 써 주었다. 조금 냉철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 책임감이 묻어나는 태도가 인영을 끌어당긴 듯했다.


“점심 먹고 나면 잠깐 산책 어때?”


인영이 계단 끝에 멈춰 서서 물었다.


“좋지. 오늘은 날씨도 괜찮다고 하더라.”


해준의 짧은 대답 뒤에 두 사람은 작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둘이 걸어가는 모습이 로비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인영이 유학 생활을 하며 국제적인 감각과 언어 능력을 쌓아 온 점, 그리고 해준이 사업가로서 보여주는 능력 있는 면모가 결합되면 상당히 세련된 커플이 될 것 같다는 반응이 들려왔다. 물론 아직 정식 커플로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마침 제작진도 카메라를 돌려, 이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진솔 토크 데이인 만큼, 메인 진행자가 따로 개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가자들을 따라다니며 관찰만 할 예정이라고 했다. 출연자 모두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감정을 더 진솔하게 표현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얼마 후,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섯 팀으로 나뉘어 자유 토크를 진행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어떤 이들은 1층 거실 소파에 모여 앉았고, 다른 이들은 옥상 테라스나 뒷마당 벤치 등 조용한 공간을 찾아갔다. 율희는 남세준과 도언, 그리고 수현과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봄볕이 살짝 드리우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오전에 분위기 어땠어?”


수현이 조용히 운을 뗐다.


“서린이랑 도현 씨가 꽤 가까워 보이던데, 다들 그렇게 느끼나?”


도언은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도현이 같은 남성 출연자로서 호감도를 꽤 받고 있다는 건 전반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언급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맞아. 나도 아까 거실에서 둘이 같이 차 마시는 걸 봤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스킨십하는 게 서린 스타일이긴 하지. 그래도 뭐, 알아서 할 일 아니겠어?”


남세준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같은 남자끼리 보기에도 둘이 호감이 있어 보이나?”


수현의 물음에 도언은 잠시 망설였다.


“음, 도현이 얘기를 많이 해 주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 꽤 자주 붙어 다니긴 해.”


율희는 그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서린이 이토록 빠르게 관계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 안에서의 전략일까, 아니면 진짜 감정이 커지고 있는 걸까.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결국은 프로그램 속 경쟁 구도를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참, 그런데 도언 씨는 어떤 스타일의 연애를 선호해? 우리가 아직 도언 씨 얘기를 많이 못 들어 본 것 같아.”


율희가 시선을 돌렸다.


도언은 이번 프로그램에서 아직 두드러진 스킨십이나 감정 표현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도 그가 누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사실 조금 느린 편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먼저 나서서 표현하지 않는 타입이거든.”


도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애도, 결혼도, 한 번 결정하면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커. 그래서 신중해질 수밖에 없달까.”


남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랜서적 기질과는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도언의 가치관이 왠지 안정적으로 들렸다. 수현도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호기심이 동한 듯 뒤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까지 여기서 마음이 가는 사람 있어?”


수현의 직설적인 물음에 도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소 지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 자체가 대답처럼 느껴지는 침묵이었는데, 결국 분위기가 묘하게 달아오르려던 찰나, 한층 아래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잠깐만 거실로 모여 주실래요?”


스태프 중 한 명의 안내였다.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단 안내에 따르기로 했다. 거실로 내려가 보니, 다른 출연자들도 이미 모여 있었고 제작진이 무언가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진솔 토크 데이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특정 질문이 적힌 카드 뭉치를 공개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카드는 연애와 결혼에 관한 깊은 질문들을 담고 있으며, 참가자들은 번갈아 한 장씩 뽑아 대답해야 했다.


민아가 제일 먼저 나서서 카드를 뽑았다.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ideal spouse’, 즉 이상적인 배우자의 핵심 조건이 있다면?”


민아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다.


“음, 나는 함께 있어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해. 외적인 조건보단, 일단 웃음 코드가 맞는 게 제일 중요해. 또, 상대방이 나를 위축시키지 않는 태도를 가진 사람? 그래야 오래도록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답변을 듣고, 인영이 차례대로 카드를 뽑았다. 이번엔 본인이 결혼을 통해 얻고 싶은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질문이었다. 인영은 갑작스러운 깊은 질문에 눈을 깜박였다.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자유롭게 해외를 오가는 생활은 줄어들 것 같아. 나름 국제 업무를 해 왔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을 거야. 그래도 함께 인생을 공유할 동반자를 얻는다면, 다른 방식의 성장과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어서 해준, 도현, 이현, 그리고 순서가 돌아가며 답변이 이어졌다. 하나같이 진지하고도 현실적인 관점이었다. 결혼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이나 사회적 제약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한다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스스로 먼저 내가 준비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집이나 직장 같은 건 물론 중요하겠지만, 결국 마음가짐이나 책임감 같은 부분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잖아.”


도언은 조용히 그런 생각을 밝혔다. 그 후 율희 차례가 되었다. 카드에는 가족, 특히 부모의 결혼 생활이 당신의 결혼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치 율희에게 딱 맞춘 질문처럼 보였고, 그녀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부모님이 결혼 프로그램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이미 공개했으니, 자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부모님이 방송을 통해 맺어진 분들이라, 남들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좀 더 열정적이면서도 신중하게 보는 편이야. 그분들이 처음에는 드라마처럼 만나셨지만, 그 뒤로 서로 꾸준히 노력하고 배려하는 걸 보며 자랐거든. 그래서 결혼이란 결국, 화려한 시작보다 이후의 긴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어.”


방 안이 차분해졌다. 다들 그녀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챘다. 결혼은 단순한 로맨스나 설렘 이상의 것이며, 때로는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해야 하는 길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 주었다.


한바탕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지자 민혁이 손을 들었다. 촬영에 익숙지 않아 늘 소극적으로 보였던 민혁이 의외로 이야기를 꺼내려는 모습에 시선이 모였다.


“다들 결혼 얘기를 하니까, 전 좀 궁금한 게 있는데… 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로 결혼에 가까운 관계까지 발전이 된다면, 그 뒤로도 서로의 직업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자신이 있어요?”


민혁은 솔직한 궁금증을 표했다.


“우리가 여기서 몇 주 동안 지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바깥세상으로 나가서도 합이 맞는지 확인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프로그램이 취하는 방식이 연애를 가속화하긴 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는 짧은 시간 내에 완벽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질문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돌이켜봐야 할 문제였다. 이때, 서린이 약간 웃음을 띠고 손을 올렸다.


“나는 연애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부터, 실제 결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어. 실은 나도 내가 이렇게 빨리 누군가에게 마음이 갈 줄 몰랐는데, 의외로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더라고. 그래서 난, 일단 부딪쳐 보려 해. 물론 프로그램 끝나고도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진심이라면 못할 건 없지 않아?”


서린이 지나치게 도현 쪽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솔직한 발언만큼은 존중해 주는 분위기였다. 확실히 마음이 움직인다면 대담하게 표현하는 서린의 태도가 방송적으로도, 또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으로 비쳐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현이 작은 박수를 치며 마무리를 유도했다. 그렇게 카드 토크는 어느덧 막을 내렸고, 제작진은 더 깊은 이야기가 기대 이상으로 많이 오간 것에 만족해했다. 출연자들은 한층 진지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오후를 맞아 각자 흩어져 개별적으로 대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율희, 잠깐 같이 산책하자.”


이현이 조용히 다가와 제안했다.


율희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 제안을 수락했다. 둘은 합숙 하우스 뒤편에 있는 작은 산책로를 따라 걸어 나갔다. 연이어 촬영 팀이 붙었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었다.


뒤편 숲길에 접어들어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오자, 두 사람은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좀 궁금했어. 부모님 얘기할 때 눈이 반짝이더라.”


이현은 살짝 멋쩍은 듯 웃었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율희도 쑥스러운 듯 대꾸했다.


“응. 결혼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에겐 평범한 제도 같은데, 너한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어.”


율희는 생각에 잠기다가, 조용히 대답을 건넸다.


“맞아. 난 어릴 때부터 그게 하나의 동화같이 느껴졌어. 어떤 사람은 결혼식은 형식적이라며 시큰둥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필수 관문이라 보기도 하지. 난… 제대로 된 동반자를 찾으면 좋겠다는 쪽이야. 엄마, 아빠처럼.”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작은 벤치에 앉아 깊게 호흡을 고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경쾌하게만 보였던 이현도 사실 내면에 고민이 있었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커리어 전환을 하면서, 결혼을 후순위로 미뤄 왔던 과거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자격지심이었는지, 방송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그러나 며칠을 함께 지내며, 뻔한 스펙보다는 진정성이 중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율희는 이현이 의외로 섬세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고, 마음 한편이 차분해지는 걸 경험했다. 그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이번 프로그램이 자신에게도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아직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갈팡질팡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안을 조금씩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곧 저녁이 다가오자, 제작진은 즉석에서 ‘디너 파트너 정하기’ 미션을 제안했다. 참가자들은 원하는 상대에게 다가가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할 수 있고, 한 번 거절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다고 했다. 단, 무작정 여러 명에게 제안하기보다, 마음이 끌리는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암묵적 룰이 존재했다.


시간이 흐르자 곳곳에서 재빠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서린은 망설임 없이 도현에게 다가갔고, 자연스레 둘은 한 팀이 되었다. 인영은 해준에게 눈짓을 건넸고, 그 또한 흔쾌히 수락했다. 민아는 조금 재밌는 그림을 만들어 보겠다며 남세준을 지목했다. 남세준도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현과 이현은 서로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은 뒤, 눈 맞춤을 통해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율희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민혁과 도언이 남아 있었다.


“율희, 혹시 괜찮으면 오늘 나랑 같이 식사할래?”


민혁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율희는 짧게 고민했다. 도언도 동시에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뭔가 말을 꺼내기 전이었다. 결국 율희는 민혁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남은 도언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게 약간 굳었다가, 이내 수습하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럼 나는… 음, 조금 늦었나 보네.”


도언은 크게 개의치 않은 척했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그렇게 즉석에서 팀이 정해지자, 제작진이 식사를 위한 테이블을 세팅했다. 6커플이 나란히 앉되, 분할된 공간에서 각자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된 구조였다. 율희는 민혁과 함께 앉아 마주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어떤 사람인지, 사실 아직까지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 기회를 통해 더 알아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기대가 생겼다.


식사가 시작되자, 다들 반가운 표정으로 각자 파트너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린과 도현 쪽은 묘하게 커플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인영과 해준은 무겁지 않게 일상의 이야기를 섞어 가며 서로의 취향을 탐색했다. 민아와 남세준은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으며 SNS 콘텐츠 제작을 운운했다. 수현과 이현은 건강식 메뉴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운동과 영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율희와 민혁은 한동안 어색한 웃음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대화 주제를 찾으면서 편안하게 풀어졌다. 민혁은 IT 엔지니어의 일상과, 가끔씩 느끼는 고립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회사에서도 주로 모니터 앞에서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아, 오프라인 소통이 서툰 편이라고 덧붙였다. 율희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하는 말을 전했다. 사람 앞에 나서기 힘든 성격이라도, 오히려 다른 면에서 깊이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어느새 식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민혁은 조심스레 물었다.


“율희는 부모님 얘기도 그렇고, 결혼을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여. 혹시 이 프로그램 끝나고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더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난 아직 결혼에 대한 확신이 덜 서서, 누군가에게 미안해질까 봐 겁나기도 해.”


율희는 잠시 고민했다. 민혁의 진중한 눈빛이 전해졌다. 결국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 감정 잘 알아. 누구나 결혼에 대해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중요한 건, 그 불확실성도 상대와 솔직히 나누고 대화를 통해 좁혀 나가는 과정 아닐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현실적인 결혼관과 개인적인 두려움을 조금씩 꺼내 놓았다. 비록 방송 촬영 중이고, 데이트 미션으로 이어진 식사 자리였지만, 그 속에서 꽤 진지한 교류가 일어났다. 민혁의 눈빛이 점차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고, 율희 또한 한 단계 더 마음의 문을 열어 보는 기분이었다.


한편, 주위의 다른 테이블에서도 웃음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프로그램 초반에 비해 확실히 긴장감과 설렘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생성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결혼을 상상하고, 누군가는 그냥 연애로 그칠 수도 있다고 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 모든 모습이 지금 이 시대 한국 청년들의 연애와 결혼관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다 함께 모여 간단히 티타임을 가졌다. 이때 제작진이 깜짝 정보를 공개했다. “앞으로 2주간의 일정 후, 최종적으로 선택된 커플은 실제로 방송 종료 후에도 동거 혹은 결혼을 전제로 한 관계 발전 과정을 촬영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본격적이고 현실적인 테스트를 거쳐 보고 싶다는 취지라고 했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여졌고, 출연자들 사이에 다시 한 번 긴장과 기대가 교차되었다.


방송 안에서 연을 맺는 것도 쉽지 않은데, 프로그램 이후까지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게 될 수 있을까. 모두가 동시에 같은 의문을 품었지만, 서린은 한결같이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고, 해준은 관심 있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민아는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남세준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율희는 다시 부모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과연 자신에게도 그런 드라마틱하면서도 진실된 결말이 가능할지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 아직은 시간도, 그리고 여러 미션도 남아 있었다.


그날 밤,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며,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숙소 구석구석에서 대화를 이어가도록 했다. 한 번 더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혹은 새롭게 다가가는 기회를 얻으라는 의도였다. 율희는 잠시 옥상에 올라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도시의 불빛이 아스라이 번지고, 싱그러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이곳에 와서 만난 사람들,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스쳤다.


그러다가 저 멀리,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도현과 서린의 뒷모습이 보였다. 둘은 손을 살짝 맞잡고 있었는데, 마치 여느 연인처럼 다정해 보였다. 율희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부러움을 느꼈다. 프로그램에서든 현실에서든,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어느 시점엔가 용기가 필요할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듯. 곧이어 1층 쪽으로 돌아오니, 남세준과 민아가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바보야.”


민아는 은근히 장난스럽게 남세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남세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율희는 그렇게 잠깐의 장면을 흘낏 본 뒤, 부엌 쪽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미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오늘보다 조금 더 변화해 갈 것이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건 뭔지, 그리고 이 안에서 누가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일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부모님이 그러했듯, 결혼이란 함께 ‘과정’을 살아낼 상대를 만나는 일이란 점. 율희는 그 길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내딛어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 끝, 혹은 그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가 지금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리라 믿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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