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28
진예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진예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예정선
제목: 놀아요
“고마워요 정선학생.”
정선과 동아리원 동료들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돌봄 봉사를 통해 봉사활동 점수를 채웠다. 그렇게 상원을 만나게 됐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상원이라고 하는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돼세요?”
“어? 저요?”
정선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 말을 건넨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다가온 상원이 처음엔 신기했다. 그러다가 상원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아, 대학생도 아니고, 봉사활동 점수도 필요 없는데, 왜 하시는 거예요?”
사실 중고등학생이 아니면 대학생도 봉사활동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봉사 자체를 좋아하다가, 점수 보다는 점수 쌓는 곳에서 어떤 봉사가 있는 지 보다가 알게 됐어요.”
“아 정말요?”
알고 봤더니 상원은 대학교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교복을 샀는데, 그때 부모님이 갑자기 쓰러져서 알바를 한다고 중학교도 중퇴였다. 덕분에 군대도 가지 않았다는 게 그나마 자랑 아닌 자랑이었다.
“아.”
정선은 어느새 상원과 친해지게 됐는데 이게 마냥 친밀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걸 았다. 상원도 같은 마음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문득 데이트 아닌 데이트 제안을 하게 됐다.
“오빠. 교복, 입어 보고 싶지 않아?”
“교복?”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못 입어 봤으니까 입어보면 좋겠네 라는 생각을 꺼냈다. 사실 상원은 군대도 안 갔지만 전투복이라 불리는 군복도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군대도 안 간 자신이 전투복을 입는 게 우승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야 오빠. 요즘은 다 빌려주는 걸?”
정선은 상원에게 자신의 계획을 꺼내 허락 아닌 허락을 맡았다. 교복도, 군복도, 그리고 한복도 빌려서 입으면 충분히 입을 수 있었다. 못해 본 꿈을 이룬다는 핑계로 데이트와 같은 코스를 짜온 것이었다.
정선은 잠시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일찌감치 메모해 둔 '데이트 코스'라는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롯데월드, 교복 대여점, 그리고 잠실 일대를 도는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원래는 동아리 친구들이랑 ‘한 번쯤 가보면 재밌겠다’ 하고 생각했던 곳들이었는데, 어느새 상원과 함께 갈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왕이면 못 입어 본 교복도 입고, 못 가 본 놀이공원도 가고, 평생 못 해봤던 걸 같이 해보면 좋겠다.’
정선은 상원이 군복 이야기를 꺼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입고 싶었으나 입을 수 없었던 교복에 대한 그 호기심도, 어쩌면 단순한 ‘추억 쌓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상원은 분명 교복을 입는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진 않을 거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못 누린 시절을 잠깐이라도 체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오빠, 우리 봉사 끝나고 저녁에 잠깐 시간 돼요? 사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뭐가 궁금한데?”
“교복 대여점 위치가... 여기서 멀지 않을 거 같아서. 겸사겸사 같이 가 볼래요?”
상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데... 그럼 오늘 당장 가 볼 생각인 거야?”
‘정선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안하는 거 보면, 무슨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정선은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려 대충 얼버무리려다가, 솔직하게 계획해 둔 내용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놀이공원 교복 데이트가 요즘 꽤 인기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오빠가 교복을 한 번도 못 입어 봤으니까... 혹시나 싫지 않다면, 한번 입어보고 사진도 찍고... 그거 말고도 같이 해 보고 싶은 게 많아서.”
상원은 그녀의 수줍은 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남들에겐 평범한 일이었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꽤나 특별한 체험이 될 것 같았다.
“근데 교복 대여가 어려운 거 아니야?”
“예약이 안 되고 선착순이라는데, 일단 빨리 가보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오늘 봉사 끝나는 시간도 저녁 전에 마무리니까.”
정선은 교복 대여점 위치를 지도 앱에서 확인하며, 그와 동시에 롯데월드 야간 퍼레이드 시간까지 체크했다. 늦어도 오후 여섯 시 정도에는 놀이공원에 들어가야 매직아일랜드 야경도 보고 퍼레이드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봉사활동 담당 교사 겸 돌봄센터 실무자로 함께 일하던 ‘동아리원 담당’ 인물이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줄곧 정선학생, 오늘도 수고 많아요. 정도의 말만 건네며 이름이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던 그였다. 사실 이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를 배정하는 주요 책임자였지만, 정선과 상원에게도 별다른 소개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정선이 그에게 이름을 묻기로 했다.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나는 박민주라고 해. 원래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다가, 돌봄센터 겸직을 하게 됐어. 고생 많지, 너희?”
박민주라는 이름을 듣고, 정선은 새삼스레 그가 선생님다운 온화한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그동안 말수가 적어 잘 몰랐지만,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늘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던 사람이었다.
“박민주 선생님이셨구나. 오늘도 정말 감사해요. 저희, 이제 봉사 마무리하고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다음 번에도 잘 부탁해.”
정선과 상원은 돌봄센터를 빠져나오며, 교복 대여점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미 정선은 ‘감성교복’이라고 불리는 곳을 인터넷에서 찾아뒀다.
‘오빠가 좋아해 주면 좋을 텐데... 괜히 무리해서 가자고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둘은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상원이 슬쩍 물었다.
“정선아, 교복 빌리는 데에 돈 많이 드는 건 아니야?”
“음, 몇 시간 대여하는데 2만 원 전후라더라. 같이 사진 찍고 그러면,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 뭐. 나는 그냥 네가 같이 가자니까 좋아.”
정선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엔 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챙기던 상원이, 지금은 온전히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걸 기뻐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두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지나 도착한 곳은, 롯데월드 정문 근처 지하에 있는 교복 대여점이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매장 앞에는 벌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데이트를 하러 온 커플, 친구들끼리 추억 만들려 온 사람들까지 제법 다양했다.
“와,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휴일도 아닌데 이렇게 붐비다니... 인기 많다고 하긴 했지만.’
다행히 대기 줄은 길지 않았다. 정선은 점원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긴 뒤 교복을 골라보기 시작했다. 소매가 예쁜 자켓, 체크무늬 치마, 그리고 색색깔 넥타이와 리본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오빠는 어떤 스타일 입고 싶어?”
“난 그냥, 남색 자켓에 회색 바지? 너무 화려한 건 좀...”
“학교마다 디자인이 다 다르니까 골라봐. 이게 오빠에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다.”
정선은 상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교복 자켓을 가리켰다. 상원은 그 옷을 꺼내 들춰보다가, 얼떨결에 옆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거, 진짜 고등학생 된 기분이네.”
둘은 탈의실에서 각각 교복을 갈아입고 나왔다. 정선도 밝은 체크무늬 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입으니, 정말로 싱그러운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상원은 어색해하면서도, 괜찮아 보이는지 자꾸만 거울 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정선아, 묘하게 잘 어울린다.”
“히히, 오빠도. 아, 우리 이 상태로 롯데월드 바로 들어가도 되겠지?”
“그치, 교복 입고 가면 좀 튀긴 하겠지만, 요즘 워낙 많이들 그렇게 하니까.”
보증금을 내고 나온 뒤, 정선은 롯데월드 입장권 예매가 잘 됐는지 앱을 확인했다. 다행히 야간권으로 구입해 둔 티켓이 있어서, 긴 줄에 서지 않고도 바로 전자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놀이공원 정문으로 다가갈수록 반짝이는 조명과 들뜬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등장하는 회전목마 앞에서, 정선은 상원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예쁜 조명 아래 돌아가는 흰 말들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오빠, 우리도 저기서 사진 한 번 찍자.”
주변에는 이미 교복을 입고 사진 찍는 커플들이 꽤 많았고, 각자 포즈를 취하며 웃는 얼굴들이 즐비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정말로 이루어지네.’
상원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고 정선을 찍어 줬다. 정선도 상원을 찍어 주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 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교복 입은 두 얼굴이 화면에 나란히 들어오자, 둘 다 어색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잘 나오고 있어?” “응, 조금 더 가까이 와봐.”
찍힌 사진에는 환하게 웃는 정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상원은 사진을 확인하고 살짝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꽤 소중하게 남을 것 같다.’
두 사람은 놀이기구를 타러 이동하기 전에, 롯데월드 지하 1층 푸드코트에서 간단히 간식을 사기로 했다. 놀이기구 줄이 길 테니, 출출함을 미리 달래려는 목적이었다. 군것질거리로 유명한 츄러스 가게가 보여서, 초콜릿 소스를 듬뿍 찍은 츄러스를 하나씩 손에 쥐고 달콤한 맛을 즐겼다.
“달달하네. 근데, 바로 놀이기구 타면 좀 울렁거리지 않을까?”
“음, 괜찮아~ 조금 이따가 탈 거니까. 우리 먼저 실내 어드벤처부터 한 바퀴 돌까?”
정선은 상원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스릴을 좋아하면 아트란티스나 자이로드롭부터 가는 게 보통이지만, 처음 들어온 김에 천천히 구경하면서 익숙해지고 싶었다. 실내 어드벤처에 있는 회전 그네나 관람형 어트랙션부터 타면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교복을 입고 천장을 장식한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를 걷고 있으니, 정말 어딘가의 환상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자이로드롭 근처를 지나자, 하늘로 쑥 솟아오른 뒤 바로 떨어지는 사람들의 비명이 귀를 찢을 듯 들려 왔다. 상원은 그 소리에 놀란 듯 잠시 주춤했다.
“와, 저거 진짜 무섭겠다. 정선아, 저거 타고 싶어?”
상원은 자이로드롭을 보고 아찔했다.
'나도 나름 겁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엄청 아찔하네...’
정선은 그렇게 무서움을 타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원이 조금 당황해 보이자 굳이 자이로드롭을 고집하진 않았다.
“음, 나중에 용기 나면 타보자. 일단 좀 덜 무서운 걸로 몸풀기 하자. 그리고 매직아일랜드 넘어가서 야외 어트랙션도 구경하자.”
둘은 다양한 놀이기구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작은 회전 어트랙션부터 서서히 레벨을 올려, 결국에는 후렌치레볼루션이라는 롤러코스터도 타게 됐다. 탑승 줄에 서 있는 동안 상원은 계속 손에 땀을 쥐고 있었지만, 출발한 뒤에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듯 소리치며 웃었다. 두 사람 모두 교복을 입고 소리 지르며 달리는 모습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내리는 순간 서로의 얼굴을 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대사: “오빠, 얼굴 빨개졌어! 아까 소리 지르는 거 다 들렸다?”
“으하하, 나도 깜짝 놀랐어. 생각보다 무섭지 않고 재밌더라. 근데 어지럽긴 하네.”
저녁 시간이 가까워오자, 이제 야외로 나가 매직아일랜드를 구경하기로 했다. 스카이브릿지를 통해 야외 구역으로 걸어 나가니, 호수와 성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성 주변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며 점점 화려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수를 배경으로도 사진을 찍고, 곳곳에 있는 포토존에 들러 교복 데이트 인증샷을 남겼다. 특히 초승달 모양의 대형 조형물은 인기 사진 명소라, 잠시 줄을 서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내내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빠가 점점 더 편해지는 표정이 좋아. 오늘 데려오길 잘했어.’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정선이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곧 밤 8시쯤 되면 야간 퍼레이드 ‘World of Light’가 시작될 참이었다.
“퍼레이드 볼래? 한 번쯤 직접 보면 진짜 예쁘다던데.”
“그럼, 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놓치면 아쉽지.”
둘은 퍼레이드를 보기 좋은 스팟을 찾아 성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울려 퍼지는 경쾌한 음악, 화려한 조명,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퍼포머들이 줄지어 지나가자, 모든 관람객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형형색색의 꽃수레와 캐릭터들이 다가올 때마다 눈부시게 빛났고, 불꽃이 터지듯 조명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가 커져 갔다.
“와... 진짜 멋있다. TV로만 보던 건데.”
상원은 과장 없이 순수한 눈빛으로 퍼레이드를 감상했다. 정선은 그런 상원의 옆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여태껏 겪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감동이 묻어나는 듯했다.
퍼레이드가 마무리된 뒤, 둘은 놀이공원 안쪽에 있는 라라코스트라는 레스토랑에 잠시 들러 피자를 주문했다. 워낙 인기가 많아 줄을 서야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퍼레이드 여운에 대해 한참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피자를 나눠 먹으며, 서로가 몰랐던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중학교 그만두고 알바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음, 그래도 그땐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부모님이 편찮으시니까.”
정선은 그가 짊어졌을 무게를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하지만 상원은 이제는 웃어넘기듯 말했다. 그래서 봉사활동도 자발적으로 찾아왔던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했다. 그때 마치 정선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상원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엄마도 한결 좋아지셨고, 아빠도 요양 중이시지만 예전보단 호전됐고. 아무튼... 이렇게 교복도 입고 놀이공원도 오고, 뭔가 허전했던 부분을 채우는 느낌이 들어.”
“다행이다. 나도 사실 오늘 되게 즐거워.”
둘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매직캐슬 주변의 야경을 다시 바라본 뒤 평화롭게 걸어 나왔다. 어느덧 놀이공원 폐장 시간이 가까워져, 교복을 반납하러 가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오빠, 교복은 재밌게 입었지? 반납하고 나서도... 우리 다시 오자, 나중엔 한복 같은 것도 입고 다른 데도 가 보고.”
“그래, 그러자. 뭐든 같이하면 더 재밌을 것 같아.”
그날 밤, 정선은 집에 도착해 교복 데이트 사진을 하나씩 살폈다. 환하게 웃는 상원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내일도 봉사활동을 하러 돌봄센터에 갈 생각을 하니, 박민주 선생님과 아이들, 그리고 상원이 모두 반갑게 떠올랐다.
다음 날, 정선은 돌봄센터로 나서며 ‘이렇게 일상처럼 오가지만, 정말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다’고 느꼈다. 봉사활동은 단지 점수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주었고, 상원 같은 새로운 인연도 선물해 주었다.
돌봄센터에 도착하자, 박민주 선생님이 익숙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 다들 고생 많았지?”
“네, 덕분에요. 선생님도 오늘도 아이들 보시느라 바쁘시겠어요.”
정선은 교실 구석에 놓인 장난감 더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원도 그 옆에서 아이들의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모아서 상자에 담아 두었다. 한창 뛰어놀던 초등학생 아이들은 정선을 보며 반갑게 달려왔다.
“정선 누나, 우리랑 숨바꼭질해요!”
“근데 오늘은 교복 안 입었네?”
그 말에 정선과 상원은 서로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어제 둘이 놀이공원에서 교복 데이트를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우스웠던 것이다.
‘아이들은 뭘 봐도 솔직히 말하니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게 귀엽네.’
정선은 잠깐 장난감을 멈춰 두고, 아이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해 주었다. 상원은 또 다른 아이들이 하고 싶다는 그림 그리기를 도와 주며, 종이와 물감 정리를 챙겨 주었다. 어느새 봉사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점심시간 즈음이 되자 아이들이 줄줄이 학부모에게 인계되거나, 돌봄센터 방과후 일정으로 넘어갔다.
대사: “정선아, 우리 이제 잠깐 쉴래?”
“응, 좋아.”
두 사람은 건물 복도 한쪽에 마주 보고 앉았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더니, 다리도 약간 뻐근했다. 상원은 뜬금없이 휴대전화를 열어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뭘 검색하는 걸까?’
곧 상원이 화면을 돌려 보여 주었다. 서울 곳곳의 체험형 공방이나 한복 대여점, 그리고 한강 야경 명소 같은 정보였다.
“정선아, 우리 다음번엔 한복을 입고 경복궁 같은 데 가볼래? 이게... 네가 말했던 건 아니지만, 어제 교복 데이트가 너무 좋았거든. 못 해 봤던 걸 해 보니까 진짜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
정선은 그 제안에 눈이 반짝 빛났다.
'데이트라고 했다.'
“좋아! 나도 한복 입고 고궁 가는 거 로망이었어. 옛날에만 잠깐 생각해 보고 실제로는 못 해 봤는데, 이번엔 꼭 가자.”
둘은 언제 시간이 맞을지 달력을 대조해 가며 구체적인 날을 잡으려고 했다. 주말이나 공휴일엔 사람이 많으니, 평일 오후 시간을 활용하자고 합의했다. 봉사활동 시간이 끝나면 오후 한두 시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을 듯싶었다.
박민주 선생님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한복 데이트라니, 좋은 생각인데? 근처에 우리 돌봄센터 후원해 주시는 분 중에 전통 의상 대여점 하시는 분도 있어. 원하면 소개해 줄게.”
“정말요, 선생님?”
“응, 아이들 체험 행사 때도 협조해 주셨었거든. 한 번 이야기해 볼 테니, 날짜 잡히면 말해 줘.”
뜻밖의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 같아 정선과 상원은 쾌재를 불렀다.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뿐만 아니라, 봉사자들의 색다른 경험까지 도와주는 박민주 선생님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정말 안 되던 일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술술 풀리기도 하는구나. 운이 좋다.’
그날 오후, 봉사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정선과 상원은 센터 밖으로 나섰다. 아이들이 남긴 크레파스 자국처럼, 둘의 마음에도 밝고 따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원이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띤 채 물었다.
“정선아, 오늘 저녁은 뭐 해? 혹시 시간 되면 우리 간단히 밥이라도 먹을래?”
“좋아. 근처 신천 먹자골목 같은 데서 뭐 먹고, 나중엔 송리단길 쪽 카페도 한번 가 보고 싶다.”
“그래,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은 서울에서 ‘놀기 좋은 장소’ 리스트를 또 하나씩 채워 나갔다. 교복 데이트로 시작된 둘의 특별한 추억 만들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듯한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못 누려 봤던 학창시절, 놓쳐 왔던 즐거움, 그리고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새로운 경험... 그런 것들이 조심스레 교차하며, 둘의 관계를 한층 가까이 이끌어 주고 있었다.
정선은 자꾸만 마음이 설렜다. 아직은 ‘데이트’라는 말에 익숙지 않지만, 이미 둘이 공유하는 순간들에는 누가 봐도 달콤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교복을 갈아입으면서 느꼈던 설렘처럼, 이 관계도 점점 새로운 옷을 입고 발전해 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음번엔 또 어떤 추억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게 서로에게 작게 미소를 건네며, 오늘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복잡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마음 한켠에 따스한 온기를 품고 집으로 향했다.
돌봄을 하면서 자신이 돌봐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데이트'만 할 수는 없었다. 데이트의 목적을 달성해야했다.
"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선은 상원이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다. 내일은 손을 잡아볼까 싶었는데, 처음 시작된 생각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붉어지고, 아무도 쳐다보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어떡해! 라고 팔을 휘저었다. 오늘 밤은 다 잔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