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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29

by 라한
해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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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인보나

제목: 빙해


“보나야. 다시 한번 생각 해봐. 정말로?”


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이 변함이 없음을 확실히 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똑같아.”

“와. 진짜. 대단하다. 나는 그냥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렇게 떠나네.”


가족도 친구도 말리려고 하는 건 바로 보나가 이제 며칠 후면 남극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남극에 생활해보고 싶다는 말에 그럼 한 번 해봐. 라고 등을 살짝 떠밀어 줬을 뿐인데, 정말로 그 일을 해냈다.


“아니,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건 어떻게 또 찾아냈어?”

“원하면, 길은 열리더라고.”


남극인은 우주인 보다는 확률이 높았다. 우주로 가는 것만큼 고된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한국인 중에서 남극 땅 밟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우리 보나가 그런 몇 안되는 사람이 됐네.”

“남극이 녹아 버리기 전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약간 불협화음에 가까웠다. 남극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보나와, 그런 보나를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 지웅이었다. 특히 지웅은 이제 곧 보나와 1주년이었는데, 이렇게 보나를 떠나 보낼 수 없었다.


“보나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없어?”

“지웅아. 그냥 우리 헤어질까?”


지웅은 충격을 받았지만, 보나는 어쩌면 지웅에게 이게 가장 좋은 답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자신에게 이래라 저레라 하는 것도 사실 별루였다. 보나가 지웅과 사귀게 된 건 자신에게 다 맞춰줬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가라 마라, 내가 그래도 남자친구인데, 그 놈의 남자친구라는 말이 약간 짜증 게이지가 맥스에 다다를 정도로 차오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몰랐다. 남극에서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짧아도 6개월. 길면 몇 년 동안 남극에 살게 될 지 몰랐다.


“보나야. 아니야 내가.”

“우리 헤어지자. 이제 우린 남남이야.”


그렇게 보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웅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 사라졌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아주 쿨하게 인사를 했다. 그나마 그러지 못하는 게 혈육의 정으로 이어진 가족이었다.


약간 가족을 자주 못 본다는 건 눈물이 날 뻔했지만, 영상통화도 가능하고 그곳은 현재 보나의 꿈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가자, 남극으로.”


보나는 길게 숨을 내쉰 뒤 공항 로비를 걸어 나갔다. 6개월 동안 정들었던 원룸 열쇠를 집주인에게 맡긴 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애쓰고 있었다. 가벼운 캡모자 아래로 길게 뻗은 머리칼이 어깨를 스쳤다. 목도리도 아닌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여행용 가방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 누가 봐도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극.’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대학 시절 교환학생 경험도 떠올라 설레지만,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지구 최남단의 얼어붙은 대륙에서 지내게 될 생각을 하니 아직 실감이 잘 안 났다. 무엇보다도, 아침까지만 해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던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그토록 말렸고, 한편으론 친구들도 ‘진짜 대단하다’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보나는 눈을 감을 때마다 어떤 청량한 바람이 귓전에 맴도는 기분이 들어, 결국 출발을 선택했다.


최근 가장 찜찜했던 건 지웅과의 결별이었다. 돌아보면 지난 1년은 즐거운 추억도 많았다. 처음에는 서로 모난 구석 하나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남극 행 이야기가 나오면서 균열이 깊어졌다. 내가 남자친구인데라는 말이 거슬리게 들렸던 것도, 지나치게 말리는 지웅의 태도 때문이었다. 결국 보나는 차가운 말을 내뱉었고, 그 길로 그의 곁을 떠났다.


‘이게 최선이었겠지.’


보나는 애써 마음을 굳게 다지며 탑승 수속을 마쳤다. 곧 국제선 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다. 목적지는 칠레 산티아고. 거기서 국내선을 갈아타 푼타아레나스로 내려간 뒤, 특별편으로 남극 킹조지섬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쉬운 여정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고 나면 몇 달간, 혹은 어쩌면 그 이상 남극의 기지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었다.


수속대에서 여권을 확인하던 직원이 보나의 항공권에 적힌 독특한 최종 목적지를 흘끗 보곤 살짝 미소 지었다.


“남극으로 가시는 건가 봐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 네. 운이 좋았어요.”


보나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주변에서 숱하게 받았던 반응이지만, 어떤 사람은 ‘제정신이냐’며 혀를 찼고, 또 어떤 사람은 ‘부럽다’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극이 녹아버리기 전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오래전부터 키워 왔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온난화의 위협이, 어떻게든 자기 발로 딛고 느껴야만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출발 시간이 임박해지자 보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 속 엄마는 다시금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아빠는 무뚝뚝하게 “몸 조심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언니와 동생은 숨죽여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보나는 미소를 지으며 금방 돌아올지도 몰라. 걱정 말라구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휴, 큰일이네… 기지에 도착하면 꼭 연락 좀 하렴.”

“알았어, 엄마. 사랑해.”


통화를 끊고 나니 괜스레 목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가족 앞에서는 웃어 보였지만, 비행기 탑승이 가까워질수록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설레임과 두려움. 그 간극을 온몸으로 느끼며 비행기에 올랐다. 칠레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기내식도 몇 번이나 나왔고,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한두 마디 나누다가 곧 서로 피곤해 잠이 들었다. 중간 경유지에 내려서 다시 갈아타고, 그렇게 서른 시간 넘게 공중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가방을 찾고, 또 한 번 비행기에 몸을 실어 푼타아레나스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남반구라 겨울과 여름이 반대이긴 했지만, 일단 남극 같지는 않았다. 활짝 갠 하늘 아래서, 보나는 남극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사전 안내 메일에 적힌 대로, 현지 담당자가 공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인보나 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눈이 동그란 여성 담당자는 간단한 명찰과 서류를 건넸다. 남극 입성 전 꼭 받아야 할 교육 일정표와 비상 연락망 등이 적혀 있었다. 보나는 그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내일 아침, 소형 항공기를 타고 킹조지섬으로 이동한다. 날씨가 좋다면 곧장 남극 기지로 갈 수도 있겠지만, 만약 바람이 거세거나 기온이 급하강하면 일정을 변경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남극 생활의 시작이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드디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좁은 게스트하우스지만,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나서인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누이자마자 천국처럼 편안했다. 그때 문득 지웅 생각이 스쳤다. 보나는 베개 위에 시선을 두며 괜히 핸드폰을 열었지만,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도록 정리해버린 상대의 번호가 텅 빈 화면 뒤에 떠오르는 듯했다. 만약 다시 통화를 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미안해… 하지만 돌이킬 순 없어’라는 말이 맴돌 뿐이었다.


‘이제 앞으로 내 길을 가야지.’


어느새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내일이 되면 진짜로 남극 땅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구차하게 뒤돌아볼 필요 없잖아’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공항이 아닌 군용 비행장으로 이동할 때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화물용 박스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 항공기가 굉음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일행들은 간단한 기체 안전교육을 받았다. 뒤늦게 도착한 한 참가자가 숨 가쁘게 뛰어오르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도 남극 가는 팀 맞죠?”

“네, 맞습니다. 여기 6명 팀이 다였나 봐요.”


보나는 그 사람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름표에 ‘김민재’라고 적혀 있었다.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에 오랜 야외 경험이 있어 보이는 몸가짐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곧장 보나에게 손을 내밀며 반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재라고 합니다. 생물학 전공했어요. 보나 님은 무슨 일로 남극 가세요?”

“아, 저도 연구 보조원 비슷한 역할이에요. 저는 보나라고 해요.”


짧게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마음 한편에 ‘처음으로 만난 동행’이라는 작은 안도감이 번졌다. 남극은 낯선 환경이니만큼, 함께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다.


소형 항공기에 올라 자리벨트를 매자, 기체가 천천히 활주로를 굴러 나갔다. 창밖 풍경이 흔들리더니, 곧 구름 사이로 파고들었다. 엔진 소음이 귓전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머릿속은 수많은 상상으로 가득 찼다. 지금 이 비행기를 타고 멀어질수록 한국에서의 모든 것,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지웅까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비행 후, 기체가 하얀 빙하가 드러나는 섬 근처로 다가갔다. 킹조지섬. 남극에서도 북쪽 끝자락이라 비교적 기온이 덜 혹독한 곳이라고 들었지만, 땅에 닿기도 전에 엔진창으로 불어대는 눈바람이 기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보나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민재가 걱정스레 물었고, 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세요?”

“네, 조금 흔들려서 그렇지, 괜찮아요.”


착륙 후, 활주로라기엔 허술해 보이는 평지에 내렸을 때, 모든 게 낯설었다. 발을 딛자마자 강한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고, 하늘엔 회색빛 구름이 잔뜩 몰려 있었다. 어서 이쪽으로!라며 안내원들이 군용 트럭으로 이들을 태웠다.


잠시 후 도착한 기지에는 이미 여러 나라의 팀이 머무르는지,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뒤섞여 들려왔다. 보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컨테이너를 개조한 듯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바쁘게 움직였다. 한쪽 구역에는 작은 연구소와 숙소 건물이 보였고, 다른 쪽에는 중장비들이 세워져 있었다. 기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일행을 반겼다.



“환영합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선발대가 어제 도착해서 여러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보나는 약간 얼어붙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기지장과 스태프들은 이들에게 안전 수칙과 일정 등을 간략히 안내했다.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동시에 각자 역할이 분명해 보였다.


“첫 2주 동안은 기지 내 생활과 기초 연구 실습을 병행합니다. 바깥 나가는 건 날씨를 보고 조금씩 시도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중에도, 코끝이 시려왔다. 남극의 바람은 이렇게 차가운가 싶어, 보나는 아직 실감이 덜 났다. 그러나 이 험난한 공기 안에서 살아갈 준비를 해온 이상, 더 이상 주저할 곳은 없었다.


숙소에 들어와 보니, 방은 세 사람이 쓰도록 배정되어 있었다. 침대 세 개, 간단한 책상과 옷장, 무엇보다 난방 시설이 최우선적으로 갖춰져 있었다. 보나는 방 안 온기가 훈훈해 안심하면서도, 언젠가는 발전기나 난방장치가 고장 날 때도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처음 보는 대원이 같은 방이었다. 서로 짧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누구 할 것 없이 오늘은 조금만 정리하고 쉬죠라는 말이 오갔다. 장거리 이동에 온몸이 지쳐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전율이 일었다. 남극이라니. 정말 여기까지 와버렸다.


가방을 조심스레 열자, 엄마가 몰래 넣어둔 듯한 작은 손편지 봉투가 발견됐다. ‘우리 딸, 몸조심하고. 늘 건강해야 해. 우리가 많이 사랑해.’ 보나는 편지를 읽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러면서 문득 지웅에게도 한마디쯤 전할 말을 남겼더라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떠나기 전의 결정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여기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이어가야 한다.


저녁 무렵, 기지 식당에서 첫 식사가 있었다. 박스째 실려 온 식재료로 만든 스튜와 빵, 그리고 온수가 넉넉하지 않아 간단히 샤워만 할 수 있다는 안내도 뒤따랐다. 한편으론 불편했지만, 다른 쪽으로는 오히려 속이 편안해졌다. ‘도심의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져 오로지 생존에 집중하는 느낌.’ 보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듬었다.


식사 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이어졌다. 기지장을 포함해 연구팀, 기술팀, 의무팀 등 주요 담당자들이 돌아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기상 악화 시 대처 방법, 비상연락망, 시설 점검, 그리고 야외 탐사 일정 등. 보나는 노트에 빼곡히 필기를 하다가, 문득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빛에 시선을 주었다. 흐릿하지만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이제 저녁인데, 날씨가 급변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체온 관리에 신경 쓰시고, 필요하면 내일은 실내 교육만 진행할 수도 있으니 아침에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행사가 끝나자 대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반가운 얼굴끼리 껴안기도 하고, 초면인 사람들과 명함을 교환하기도 했다. 언어가 달라도, 모두 이 극지방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넘쳐 보였다. 보나는 혼잡한 식당 한가운데 서서, 이곳이 곧 자신의 생활 터전이 될 거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보나 님, 여긴 어떤 계기로 오신 거예요?”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낯선 동료 연구원이었다. 보나는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예전부터 남극에 가보고 싶었어요. 궁금하잖아요, 지구 한쪽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래서 연구 보조원 모집 공고를 보고 도전했죠.”

“정말 대단하시네요. 잘 오셨어요. 저도 여기서 어떤 걸 볼 수 있을지 무척 기대돼요.”


그렇게 새로운 인연들이 이어지고, 마음 한편으론 ‘이곳에서 만날 사람들 가운데 나와 특별한 유대가 생길 수도 있겠지’ 하는 희망이 들었다. 지웅과는 달리, 보나가 하려는 길을 함께 걸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생길 수도 있다는 묘한 기대감이었다.


밤이 깊었지만 숙소로 돌아온 보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혹시 창밖으로 남극의 밤하늘이 보일까 싶어 커튼을 살짝 열자, 거센 바람에 작은 창문이 덜컹거렸다. 어둠 속에서 하얀 눈이 날려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 풍경만으로도 왠지 모를 뭉클함이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줄은.’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고, 머릿속으로 지난 수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부모님과의 실랑이, 친구들의 응원, 지웅과의 권태어린 말다툼, 이별… 그리고 결국 이곳에 선 자신.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도 없고, 되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옆 침대에서 민재가 일정표를 훑어보다가 조용히 불을 끈 모양이었다. 곧 방 안이 고요해졌다. 보나는 깜깜해진 숙소에서 다시금 속삭이듯 다짐했다.


‘나는 새로운 걸 찾으러 왔으니까. 여길 정말 내 공간으로 만들어야지.’


창밖에 울리는 남극의 바람 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낯선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나가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눈을 붙였는지도 모르게 새벽을 지나고, 아침이 되자 기상 점검 알람이 기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보나는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살짝 폈다. 정신이 채 들기 전에, 동료들이 분주히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누가 문을 두드리며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라고 외쳤다.


이제 막 시작된 남극에서의 날들. 보나는 부스스한 머리로 코트 지퍼를 올리며, 오늘이 남극 생활의 첫 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리고 처음 맡아보는 얼음 바람 속에서 한 걸음을 내딛으며, 그렇게 남극의 아침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와, 남극이라서 그런지 진짜 춥긴 엄청 춥네."


당장이라도 얼어버릴 듯한 추위였지만, 보나는 춥다고 떨지만 않고 뜨겁게 걸어갈 생각이었다. 마음의 온도는 이미 100도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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