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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35

by 라한
주은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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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츠투하츠 주은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은주연

제목: 발렌타인


“나는 발렌타인이 되어야 했다.”


발렌타인. 이 나라 제일의 존재였다. 왕국에서 왕을 부르는 말이 바로 발렌타인이었다. 주연은 이곳에서 임금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아침부터 어머니가 찾아왔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어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을 발렌타인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주연의 기억속에 친부모의 기억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벅찬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야 했으나, 주연은 태어난 흔적도 없는 존재. 그래서 학교는 배를 안 굽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 주연에게 손을 내민 임금의 어머니. 그녀는 자신의 딸과 똑같이 닮은 주연을 찾아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주연이라고 하옵니다.”


잔뜩 움츠린 채로 인사를 건네야 했다. 주변에는 금방이라도 주연을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를 너무 무서워하는구나, 나가 있어라. 이 아이와 할 말이 있다.”


그때 그들이 밖으로 나왔고, 주연의 얼굴을 보지 못한 밖에서 기다리는 자들에게 은밀히 살해당했다는 걸 건물을 나오면서 알게 됐다.


“너는 이제부터, 주연이 아니다. 발렌타인으로 살아야 한다.”


주연은 그때부터 주연이 아닌 발렌타인. 이 나라의 임금이 될 자로 살았다. 처음 움막에서 그녀에게 들었던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에게는 딸이 있다. 너와 똑 닮았지.”


자신을 보는 시선들이 사라지자, 조용히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주연은 그때 그 눈빛에 속아버렸다.


“괜찮으세요?”

“이리 올래?”


살며시 다가온 주연을 포개어 안는 그녀였다.


“너는 내 딸을 똑 닮았구나.”


행방불명된 그녀 대신,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역할을 해주겠냐는 제안을 했고,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날 줄 몰랐던 주연은 그 제안을 승낙했다.


그러나 진짜는 돌아오지 못했고, 가짜는 이제 진짜보다 더 진짜가 돼서 그녀의 곁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 나라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연이 말하는 모든 건 사실 그녀의 생각이었다.


왕은 주연이 아닌, 주연의 가짜어머니인 것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신하들에게 명령을 하고 편전을 나오는 주연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의 불안이 조금은 세어 나갔다.


언제나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발렌타인이 된 주연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가면에 가려진 본 모습을 모른 채 그녀를 진짜 어머니처럼 따랐다. 그러나 발렌타인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녀를 믿을 수 없게 됐다.


주연은 그녀 몰래, 자신만이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진실을 알고 나서였다.


주연은 그녀 몰래, 자신만이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진실을 알고 나서였다. 처음부터 어머니를 배신하거나 적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문득 스쳐 간 기억의 조각이 주연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전하, 아침 문안 인사 드리겠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시녀들이 방문 앞에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연은 형식적으로 그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는 허락도 없이 문을 열려던 자를 손짓으로 막았다.


“됐으니 물러나거라. 이 시간에는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오지 마라.”


시녀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의 명령이 자신들의 주군인 ‘발렌타인’의 명령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임금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지, 이들은 알 수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주연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방 한편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주연만이 알고 있는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오래전부터 모은 것들이었고, 한 장씩 펼치며 잔뜩 구겨진 편지를 살폈다. 그중 하나에는 직접 보지 않았으면 차마 믿을 수 없을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너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서투른 필체였지만, 명백히 어떤 감정적 압박 아래에서 쓴 흔적이 역력했다. 편지 말미에는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별도의 서명은 없었지만, 편지를 전달해온 자가 ‘혜선’라는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주연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혜선. 그 이름은 어머니가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 했던 ‘진짜 발렌타인’과 닮아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입에서는 늘 “내 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따라다니던 이름이 바로 혜선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발렌타인이 된 후에야 이 이름을 듣게 되었는지, 주연은 한동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아니 어머니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들어간 서고에서 발견한 기록들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어머니가 직접 남긴 흔적이었다.


“이 아이를 찾지 못하면, 주연을 대신 기용한다.”

“주연이 하는 역할이 성공한다면, 혜선은 영영 사라져도 좋다.”


그렇다. 주연은 대체품이었다. 진짜 딸이자 진짜 발렌타인이 되어야 할 이는 혜선이었건만, 그녀가 도망쳐 버렸기에 주연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이었다. 어머니가 처음 주연을 만났을 때 왜 그토록 눈물을 머금은 표정으로 ‘너는 내 딸과 똑 닮았구나’ 했는지 이제야 비로소 퍼즐이 맞춰졌다.


주연은 그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더 이상 어머니를 믿지 못했다. 자신의 친딸마저도 가두고, 심지어는 살해할 수도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진실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주연이 애초에 태어난 흔적도 없는 존재였다는 것. 그러니 어머니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발렌타인이라는 위치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는 딸이 없어졌으니, 닮은 얼굴을 한 주연을 찾아다닌 건 당연했다. 그리고 주연의 기억 속에서 빠져 있던 진짜 출생의 비밀은, 어쩌면 영영 모를 뻔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연이 어머니 몰래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끼는 듯했다. 아직 꼬리가 잡히진 않았으나, 어머니의 신하들이 평소와 달리 주연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전하, 오늘 황궁 밖에서 열리는 축제가 있는데, 나가 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어머니의 측근인 고참 내관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권유했다.


“외출은 생각이 없다. 밖에 나가지 않겠다.”


주연의 냉정한 목소리에 내관이 고개를 숙였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백성들이 전하를 뵙고자 많은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전하께서 참석하셔야 축제가 무탈히 진행되오니, 이 내관이 감히 간청드립니다.”


외출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주연도 안다. 아마도 그곳에서 무언가를 꾸미려는 것이리라. 주연은 잠시 생각하다 시선을 그에게로 고정했다.


“좋다. 대신 너와 함께하지는 않겠다. 내가 직접 정한 사람만 동행할 것이니, 어머니께도 그렇게 전해라.”


내관은 놀란 얼굴이 되었으나,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예, 전하. 이 소신이 분명히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가 물러가자마자 주연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 있는 세상은 매일같이 어머니의 힘이 미치고 있었다. 왕은 주연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진실이 이미 백성들 사이에도 미묘하게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연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를 이 자리에 앉힌 사람도, 나를 끌어내릴 사람도 모두 어머니다.’


주연은 자신만의 군대를 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주연을 과연 누가 믿어줄 것인가. 발렌타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어린 꼭두각시가 아니라, 진정한 통치자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직접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첫 번째 걸림돌이,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애타게 찾는 ‘진짜 발렌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방 안으로 주연이 직접 허락한 사람이 들어왔다. 길고 검은 망토를 두른, 누가 봐도 특별한 자임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무엇을 가져왔느냐.”


그 인물은 옷자락에서 작은 서류뭉치를 꺼냈다.


“혜선이라 불리는 여인에 대해 알아낸 것들입니다.”


주연은 차분하게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겨보니, 혜선의 위치와 행적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어떻게 저렇게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 수가 있지.”


그 인물은 잠시 머뭇거렸다.


“곧 열리는 축제에 그녀가 나타날 것이란 첩보가 있습니다. 직접 목격한 자가 있으니, 틀림없는 정보로 보입니다.”


주연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자 달아났다는 혜선이 굳이 이 위험한 곳으로 돌아오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을 만큼, 어머니가 저지른 짓이 혜선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주연은 서류를 가만히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축제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된다면, 어머니도 분명 움직일 것이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주연은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작은 결심의 빛을 피워내듯이 눈을 떴다.


“둘 다 없애야 한다. 어머니도, 혜선도.”


갑작스런 선언에 그 인물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주연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어머니가 진정한 폭군이며, 혜선은 이미 지난날을 포기하고 살아온 자다. 난 발렌타인이 되었지만, 결코 누구의 꼭두각시도 아니야. 그리고 내 계획을 막으려는 누구든, 제거해야만 한다.”


사실 그런 결정이 쉽지 않다는 걸 주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해온 가스라이팅은 너무나 치밀하고 잔혹했다. 어쩌면 지금의 주연조차도 완전히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언가에 쫓기듯 판단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이었다.


“알겠나. 어머니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내가 해야 한다.”

“예, 전하. 모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그 인물이 돌아간 뒤, 주연은 방 안에 홀로 남았다.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의 이 얼굴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 이건 애초에 나의 이름도 아니었고, 나의 자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연은 달아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왕이 된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때 혜선이 떠났던 것처럼, 나도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주연은 한번 중얼거리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가 노리는 것은 분명하다. 혜선을 다시 붙잡아 주연을 완벽히 폐위시키거나, 둘 모두 제거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뒤, 어머니는 반드시 주연보다 먼저 행동할 것이다. 이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왕실 내관이 준비한 축제는 겉보기에는 아무 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곳곳에 검은 복장을 한 주연의 수하들이 민간인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그들은 오래전부터 주연에게 충성을 맹세해온 이들이었다. 모두가 어머니의 감시망을 피하는 데 급급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저히 위장에 성공한 듯 보였다.


“전하, 저쪽 무대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축제 현장으로 동행한 내관이 주연에게 말했다. 주연은 내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예를 갖춰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의 뒤에는 역시나 몇 명의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어머니가 심어놓은 감시자들이었다.


무대 뒤쪽에는 각종 의상과 장신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축제를 위해 마련된 공연자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그런 혼잡한 틈새에서 한 여인이 갑자기 주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전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목구비에는 묘하게 낯익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주연은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엇을 원하는가.”

“저를 기억하시나요. 아니, 처음부터 모르셨겠지요. 저는... 혜선입니다.”


혜선이라는 이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 주연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무대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도 어머니의 신하들이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왜... 이제 나타난 거지.”

“제가 떠났던 이유를 알고 계시다면,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알고 계셨겠지요. 하지만 그냥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만든 이 지옥 같은 권력 구조를 끝내지 않으면, 우리가 평안하게 숨 쉴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요.”


주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 말은 주연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나.”


그때, 주연의 시야에 드디어 어머니가 들어왔다.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채,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무대 뒤편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과 분노가 교차하는 표정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주연, 아니... 발렌타인.”


어머니는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더니, 혜선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외쳤다.


“잡아라. 저것이 가짜다.”


혜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짜라니, 진짜 딸은 바로 나인데.”


그러자 어머니는 독이 오른 듯 입술을 악물었다.


“니가 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난 순간부터 넌 딸이 아니다.”


주연은 무대 뒤편 조명 사이로 번뜩이는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하며, 이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폭발 직전임을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심어놓은 수하들도 이곳저곳에서 검을 빼 들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신하들 역시 분주히 움직이며 혜선을 포위하려 했다.


“그만!”


주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무대를 뒤흔들었다. 관객들은 아직 노랫소리와 춤사위에 도취되어, 무대 뒤에서 펼쳐지는 긴장감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예 가시 돋친 어조로 주연을 향해 말했다.


“주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 여자를 당장 내놓아라.”

“어머니께서 원하는 것이 그것뿐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젠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혜선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주연과 어머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자신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미 주연의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 그녀 쪽을 보호하려 들고 있었다. 혜선은 그들을 보고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래도 주연을 향한 의심은 거두지 못하는 듯했다.


주연은 무대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천천히 올라섰다. 그리곤 높아진 시선에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발렌타인입니다. 이제부터 이 나라의 주인은 오직 나여야 합니다.”

“네가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머니께서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의 손짓에 맞춰 무장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주연 역시 이미 준비해 둔 수하들을 불러들였다. 양쪽의 수가 비슷해 보였고, 각자 눈빛에서 서로를 베어버릴 듯한 살기가 엿보였다.


“멈춰라.”


하지만 이번에는 혜선이 손을 번쩍 들어 주연의 수하들을 막아섰다.


“주연,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 싸움이 단지 우리끼리의 혈투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주연은 의자에서 내려와 혜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나와 힘을 합쳐 어머니를 치자고?”

“그렇다 하더라도, 난 내 자리가 필요 없다. 이미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 부조리한 왕좌를 어머니에게서 빼앗고 싶다면, 나도 도울 수 있다.”


어머니는 이제 완전히 분노한 듯, 주변에 있던 무희들을 재빨리 물리치고 직접 다가왔다.


“네가 여기 나타난 것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더니. 감히, 날 배신하겠다는 거냐.”

“배신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니었던 자리를 되찾는 겁니다.”


눈앞의 혼란이 점차 커져만 가고 있었다. 군중들은 여전히 즐거운 춤사위를 이어가고, 무대 뒤편의 비명과 웅성거림은 축제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어머니가 이곳을 피로 물들일 준비를 마쳤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연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둘 다 없애야 한다.’


주연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결론이 선명했다. 그것이 설령 혜선이 함께 협력하겠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 주연의 목에 칼을 들이댈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미리 제거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한편 어머니는 옆에 서 있던 무관에게 손짓했다.


“가서 신고하라. 발렌타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당장 전하라.”


그러나 그 무관의 옷깃을 붙잡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주연의 수하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어머니는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혜선의 눈에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


“주연, 당신까지 이렇게...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겁니까.”

“어머니가 항상 그래왔잖아.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남겨두지 않았어.”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오리라는 걸 예상은 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계획보다 주연이 먼저 움직일 줄은 몰랐던 듯했다. 주연은 마음을 다잡고, 노도처럼 몰려드는 감정의 파도를 억눌렀다. 그리곤 가장 가까이 있던 수하에게 낮게 명령을 내렸다.


“혜선을 포박하라. 어머니도... 같이 끌어와.”


그 순간 혜선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고, 어머니 역시 놀란 기색으로 돌아섰다. 두 사람 모두 수하들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긴장감이 한층 고조되는 와중에, 주연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번에는 정말 단호한 눈빛이었다.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 감히 날 주종 관계로 묶어두려 했던 어머니도, 내가 빼앗은 왕좌를 다시 찾으려드는 혜선도.”

“주연, 이건 옳지 않아. 그 왕좌 자체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잖아. 당신이라면 더 나은 길을...”


그러나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난 도망치지 않아. 더 이상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싶지 않아. 나에게 새로운 시작은 어머니도, 너도 없는 세상에서만 가능할 거다.”

“내가 널 잘못 키웠다. 네가 이런 미치광이 짓을 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살려두지 않았어야 했는데.”


주연은 그 말에 잠시 흔들리는 듯했으나, 곧 차가운 표정을 되찾았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어머니.”


그리고는 시선을 수하들에게로 돌렸다. 어느새 그들은 흩어져 있던 병사들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부린 자들과 주연이 직접 키운 자들, 그리고 혜선이 설득해온 이들까지. 그 복잡한 얽힘 속에서 결국 한쪽이 무너져야 끝이 날 터였다.


주연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혜선의 모습을 번갈아 지켜봤다. 어쩌면 이 결말이 정말로 모두에게 파국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이상, 주연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발렌타인은 내가 아니어도 된다, 그런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발렌타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목소리에 실린 결의가 팽팽한 공기를 갈랐다. 혜선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어머니는 다시금 주연을 향해 달려들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주연은 더 빨리,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움직여라.”


마치 멈춰 있던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무대 뒤편이 혼란에 빠졌다. 병사들의 함성, 무희들의 비명, 악사들의 연주가 섞여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그 소리마저 잔인하도록 가차 없었다.


주연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스스로 세뇌해 왔기에, 이제는 두려움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와 혜선을 향한 불신이, 주연을 한층 더 차갑게 만들었다.


“모두 제압한다. 내가 끝을 낼 것이다.”


그렇게 선언한 주연의 눈빛에는, 더 이상 울음이나 망설임이 깃들지 않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이 있었고, 혜선의 편에 설 것을 결심한 자들도 있었다. 각자의 신념이나 충성심과는 무관하게, 이곳에서 벌어지는 건 생사를 건 승부였다.


“내가 발렌타인이다. 이 자는 가짜다! 혜선도 도망친 과거의 발렌타인일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 어머니의 신하와 주연의 수하가 칼을 부딪혔다. 피가 뿌려지고, 주변의 천막들이 찢어지며 무대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덮였다. 축제의 들뜬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 틈을 타 혜선이 주연의 앞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이미 주연의 수하가 빠르게 길을 막았다.


“비켜라. 난 주연을 설득하고 싶을 뿐이야!”


혜선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수하는 냉정하게 답했다.


“전하의 명령이다.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마라.”


혜선은 가슴 한편에서 무언가 뜨겁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로부터 도망쳤지만, 결국 주연도 또 다른 폭군이 되어가는 것인가. 그녀는 주연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이미 주연의 마음은 차단되어 있었다.


한편, 어머니는 의상을 휘날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중, 마침내 병사들 틈에서 벗어나 주연에게 접근할 틈을 만들었다. 무기 하나 들지 않았음에도 눈빛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감히.”


어머니가 손을 뻗자, 그 손목을 주연이 냉정히 붙잡았다.


“이곳에서 끝낸다. 더 이상 어머니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


그러자 어머니는 억지로 주연의 손을 뿌리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알던 것보다 더 큰 비밀이 이 안에 있어. 날 제거한다고 모든 게 끝날 것 같나?”


주연은 흔들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한번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난 결심했다. 누가 뭐라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혜선을 노리는 병사들, 어머니의 목숨을 끊으려는 주연의 수하들. 서로가 뒤엉켜 싸우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주연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잔인함을 각오한 두 눈에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결의만이 서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엔 의식에서나 사용하는 장식품처럼 보였던 검이었지만, 이렇게 실전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혜선이 소리쳤다.


“주연, 멈춰!”


주연은 혜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혜선의 눈에는 확신에 찬 불꽃이 이글거렸다. 아마 그 또한 체념이나 도망이 아닌, 싸워서라도 모든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하지만 주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래, 나를 쓰러뜨리고 네가 이 나라를 가져라. 하지만 내가 없어도, 네가 감당해야 할 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연은 비웃음을 삼키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결국, 발렌타인으로서의 이름은 피로써 유지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어머니의 가슴께로 검을 겨누었다. 혜선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무대 한편에서 날아든 화살이 주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한 것이다. 누가 쏜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무대 장막에 불을 붙이며 날아온 화살에 모두가 일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축제의 열기와 뒤섞여 무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불길을 틈타 얼른 뒤로 몸을 빼려 했고, 혜선 역시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하, 위험합니다!”


주연의 수하가 허겁지겁 달려와 주연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이미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를 향한 주연의 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금 겨누어졌지만, 불타오르는 장막이 시야를 가렸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으로 귀가 가득 메워졌다.


주연은 검을 든 채로 더 이상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설령 이 무대가 모두 불에 휩싸인다 해도, 자신을 이 자리에 세웠던 어머니와, 돌아와서 주연의 계획을 막으려 드는 혜선까지, 끝을 봐야 했다.


그렇게 결연한 표정을 짓는 주연의 눈앞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은 한순간의 폭발적인 열기와 함성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어쩌면 모든 게 바로 지금, 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끝이 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연은 기꺼이 그 길을 선택했다. 진실은 이미 숨길 수 없고, 발렌타인이 되었다면, 그 죗값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난 발렌타인이다.”


주연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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