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36
예온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하츠투하츠 예온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연희라
제목: 클래스메이트
“하아.”
희라는 교문 앞에서 자신의 가슴에 두 손을 올린 채로 심호흡 했다.
“잘할 수 있어. 연희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설레이기도 하면서 두려움도 동반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다 같이 모두가 처음인 1학기 첫날이라면 모를까, 오늘은 희라만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전학생’이던 희라. 그래서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지, 설레임이 반, 그리고 그 반 이상으로 두려움이 훨씬 컸다.
“희라, 잘 할 수 있지?”
엄마의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천으로 이사를 와야만했던 희라였다.
“엄마…”
엄마는 자신은 두고 가면 안되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희라도 잘 알고 있는, 희라에게도 엄마가 필요하고, 엄마에게도 희라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희라야. 우리 희라는 잘 할거야.”
엄마도 팀장직 승진과 함께 이직한 회사. 남들이 바라는 억대연봉을 드디어 잡은 것이었다. 남편 없이 세 딸을 건사하느라 고생한 엄마에게 이제 드디어 한 줄기 빛이 찾아온 것이었다.
“알겠어요.”
유일하게 학생인 희라. 두 언니는 이제 사회로 나갔다. 그래서 마지막 딸만 사회로 보내면 엄마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부모 자식에서 키워지고 있다고 부모님 사랑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작은 아버지가, 그리고 큰 아버지가 제수씨 고생한다고 틈틈이 엄청나게 지원해주었다.
아버지는 소방관이셨다. 마지막에 희라와 비슷한 아이를 구하며 돌아가셨다. 다행히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선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었다.
비록 온전하기 구하진 못해서 한쪽 눈은 실명했다고 했다. 구해진 아이의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한쪽눈을 실명한 책임을 물으려 했지만 아버지가 결국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자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살짝 들었다.
그때 희라는 죽음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큰 충격으로 희라의 동생으로 태어날 아이를 유산했다. 희라네 가족에게 있어서 두 일원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게 어느새 거의 10년도 지났다. 이제는 아버지의 기일이 아니면 아버지 생각에 빠져있지 않았다.
희라에 비해 다른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더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았는지, 더 많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 마다 희라는 막내딸로서 애교를 보이며 두 언니를, 그리고 어머니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18살 고등학생이 됐다. 전학 온 고등학교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는데, 엄마가 미리 준비한 교복 때문에 전학생이라는 티는 나지 않았다.
아무도 희라가 전학생이라는 걸 말하지 않으면 모를 거 같은 분위기였지만, 첫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기, 새로운 전학생 희라라고. 어, 저기 나현이 옆자리가 비었네. 저기 가서 안을래?”
“안녕 애들아. 잘 부탁해.”
희라는 어색한 첫 인사를 끝내고 나현이 옆자리로 앉았다. 나현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쩐지 희라의 모습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때 나현이가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로부터 들었다. 모두들 알지만 시시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안경은 일부러 쓰고 다니는 거라고 했다.
그때 나현이가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로부터 들었다. 모두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굳이 새삼스럽게 꺼낼 만한 ‘비밀’도 아니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희라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나현이 눈을 쳐다볼까 봐 조심스럽고, 혹시나 상대가 불편해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미 그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희라는 작게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은 한쪽에 든 도수만 높아서 쓰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곁에서 들렸다.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감추려는 듯한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면 너무 놀랄까 봐, 혹은 쓸데없는 동정이나 호기심을 받기 싫어 차라리 ‘보호색’처럼 안경을 쓰고 지내는 걸지도 몰랐다.
첫날부터 과도한 관심이나 질문은 부담일 테니, 희라는 오히려 평소처럼 간단하게 인사만 건네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사실 전학도 처음이라 이 학교 분위기가 어떤지 전혀 몰랐고, 섣불리 나현이에게 힘들지 않아? 같은 말부터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나현이는 조용히 노트를 펼쳐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저도 뭔가를 계속 메모하는 모습을 보니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인 것 같았다. 희라는 잠시 관찰하듯이 나현이를 봤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혹시 뭐 듣는 거야?”
희라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현이가 눈을 들어 희라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계심이라기보다는 약간의 낯설음이 스며 있었다.
“그냥 공부할 때 듣는 피아노 연주곡. 집중 안 될 때 틀어놔.”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희라는 괜히 부러워서 웃음이 났다. 자신은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면 가사나 멜로디에 집중해버려 오히려 공부가 안 되는데, 나현이는 달랐다. 아마도 학업 성적도 꽤 좋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나현이가 먼저 반문해왔다. 희라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싶어 조금 마음이 놓였다. 자신의 존재를 아예 외면해버리는 사람보다는 이렇게라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훨씬 편했다.
“서울 쪽에서 왔어. 근데 바로 전에는 한동안 지방에 있었다가, 이제 인천으로 온 거지. 엄마 직장 때문에.”
희라는 짧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나현이가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노트에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걸로 대화는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희라는 더 어색해지기 전에 한번 쯤 다른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 만큼 친화력이 좋은 성격도 아니고, 특별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반 분위기를 파악하기로 했다. 한편에서는 몇몇 친구들이 유명한 아이돌 그룹 신곡 영상을 휴대폰으로 돌려 보고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교복 위에 걸칠 카디건 색깔이 규정에 맞냐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 그거 규정상 안되지 않아? 색깔이 교복이랑 안 맞잖아.”
“응? 작년부터 바뀐 거 몰라? 보라색도 무채색 계열로 간주된다고 학생회에서 공지했어.”
“보라색이 무채색?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벼운 투덜거림들이 오가고, 곧이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문제 같았지만, 왠지 고등학생다운 에너지가 느껴져 희라는 그 장면을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켜봤다.
그때 교실 뒤편에 홀로 앉아 있는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어폰도 꽂지 않은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희라는 괜히 궁금해져서 한 발짝 다가가려다 이내 멈췄다. 혹시나 민폐가 될까 싶어 그만뒀지만, 문득 그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어… 안녕?”
희라는 당황스러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남학생은 표정 없이 희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기에 차가운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지만, 마주침을 피하려는 듯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가까이 가기에 쉽지 않은 아우라가 풍겼다.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곧바로 수업이 시작된다고 했다. 희라는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교단으로 들어오는 담임 선생님의 얼굴은 호탕해 보였고, 근엄함보다는 친근한 느낌이 강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았다. 오늘부터 새로 전학 온 친구가 있으니 특별히 더 협조적으로 지내주기 바란다. 애들아, 우리가 이 반에서 함께 지낼 날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선생님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출석부를 탁탁 두드렸다. 반 애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책상 위를 정리하거나, 벌써부터 조는 기색을 보였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수학 문제집을 슬쩍 꺼내놓고 선행 학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칠판에 오늘의 학습 목표를 적었다. 주제는 문학 작품 감상과 분석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는 중에 담임 선생님은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하듯 말했다.
“그런데 요즘 너희 힘들지 않니? 모의고사도 얼마 안 남았고, 이번 학년도 이미 중간고사 마무리됐고 기말이 기다리고 있고. 고3인 친구들은 지금 더 숨 가쁠 거고. 우리 반에서만 보더라도 몇몇은 밤을 새우고 등교하는 것 같더라. 성적 압박감 많이 받는 건 알지만, 건강 잘 챙겨야 돼.”
반 아이들은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 학교도 야간 자율학습이 유명할 만큼 빡세기로 소문나 있었다. 끝나고 나면 밤 10시가 훌쩍 넘고, 그 뒤에 학원까지 가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돌보는 거야. 잠도 잘 자고, 스트레스 관리도 해야 해. 물론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
선생님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교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희라는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자신이 전학 오기 전 다녔던 학교에서도 입시 이야기는 언제나 화두였다. 심지어 기숙사 생활을 하던 시절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까지 공부해야 했던 힘든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기대했던 게 사실이었다.
빗나간 기대에 실망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희라는 도리어 이해가 갔다. 어디를 가든 한국의 학생이라면 결국 비슷한 현실과 부딪히게 되니까. 그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나현이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한쪽 눈을 잃은 아이가 느끼는 세상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과도한 경쟁과 입시 스트레스가 한 사람이 지닌 상처와 어떤 식으로 맞물릴지 궁금해졌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신나게 교실 밖으로 나섰다. 점심시간에 곧바로 도서관에 가는 애들도 있고, 매점으로 달려가는 애들도 있었다. 희라는 일단 학교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가방을 들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혼자 밥 먹으러 가려고? 나랑 같이 갈래?”
낯익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뒤돌아보니 아까 창가에 앉아 있던 그 남학생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얼른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평소에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거는 편은 아닌 듯했다. 희라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쑥스러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아… 그래, 같이 가자.”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가다가 식당 앞에서 카드를 찍고 줄을 섰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다들 서로 아는 사이인지라, ‘쟤가 드디어 새로운 애랑 어울리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강욱이라고 해.”
식판을 들고 밥을 푸면서 강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같은 반 남학생 중에서도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축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푸드코트 같은 식당 내부에서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이가 흘리듯 말해주었다. 강욱은 아무런 반응 없이 오히려 더 불편해하는 기색이었지만, 희라는 그 얘기를 듣고 약간 놀랐다. 공부를 잘하는 데다 말수도 적고, 창가에 혼자 앉아 있던 모습을 보면 왕따인지, 아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반가워. 나는 연희라야. 전학 온 지는 오늘이 처음.”
희라는 강욱을 따라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식판에는 평범한 급식 메뉴가 담겨 있었지만, 뭔가 모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전학 온 이유가 있어?”
강욱이 조심스레 물었다. 희라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가 직장을 옮기셔서. 이 근처로 이사하게 됐거든.”
강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큰 말이 오가지 않고 서로 급식을 먹기에 바빴다. 그러나 희라는 이 짧은 식사 시간만으로도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 학교 생활은 결국 친구들과 부딪히며 익숙해지는 과정이니, 이렇게 조금씩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 느껴졌다.
다만, 옆 테이블에서는 몇몇이 수학 문제집을 펼쳐놓은 채 밥을 먹으며 문제를 푸는 모습도 보였다. 어떤 아이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틀어놓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희라는 숨이 턱 막혔다. 여기도 만만치 않게 치열하구나 싶었다. 벌써부터 학원은 어디를 다녀야 좋을지 고민해야 하려나, 서울에서 이사 와서 밀린 진도가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근데, 우리 반에는 늘 보이는 광경이야.”
강욱이 희라가 쳐다보던 수학 문제집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오늘 처음인 희라가 신기해할 거라 생각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다들 학원도 많이 다니고, 시험 기간에는 아침 일찍 와서 교실 앞 복도에서 교과서 보고 있어.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공부에 얼마나 매달리는지 서로 말은 안 해도 대충 분위기는 느껴지거든.”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보다 교실이나 복도 곳곳이 ‘경쟁’이라는 기류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라는 느꼈다. 이전 학교에서도 간혹 등수를 두고 친구끼리 예민해지곤 했는데, 여기서는 또 어떤 풍경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강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웃었다. 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원래 혼자 먹는데… 너도 신경 안 쓴다면 앞으로 가끔 같이 먹을래?”
그 한마디에 희라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전학 첫날부터 이렇게 편하게 말 걸어주는 친구가 있다니,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응, 좋아. 나도 같이 먹는 거 괜찮아.”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에서 마주친 나현이는 급식 대신 매점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모습이 보였다. 학교 수업용 태블릿 대신 개인 노트북을 사용해 필기를 정리한다고 했다. 희라는 그 모습을 보며 놀라워했다. 허락받지 않고서야 쉽지 않을 텐데, 아마도 나현이는 성적이 우수해 선생님들의 신뢰가 두터운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을 그렇게 보낸 뒤, 오후 수업이 이어졌다. 문득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지만, 교실 안 공기는 묘하게 어딘지 모르게 무거웠다. 수업 중간중간 선생님이 너희 혹시 졸지 말고, 집중해주겠니? 할 때마다 아이들은 아예 엎드려 자거나, 반쯤 감긴 눈으로 칠판을 바라봤다. 어제 밤 늦게까지 학원 숙제를 하느라 잠을 못 잔 친구들이 많다는 건 다른 애들의 대화 속에서도 자주 들렸다.
희라는 교과서 위에 손을 얹어 문장을 훑으며 듣고 있었지만, 슬쩍 마음 한편에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자신도 곧 저렇게 파김치가 되어 가는 걸까. 서울에서 이사 오기 전에는 한때 성적 압박에 시달려 거의 우울증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다. 다행히 집안 분위기가 밝고, 두 언니들이 웃으면서 응원해줘 큰 탈 없이 버텼지만, 매일같이 공부해라, 또 공부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직장을 옮기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더 바빠졌고, 희라에게는 너도 좋은 대학 가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엄마가 더 지원해줄 수 있어 같은 말을 종종 하곤 했다. 물론 강요처럼 들리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인 건 분명했다.
수업이 끝난 후 종례 때,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 수업을 안내했고, 자율학습 여부를 묻는 종이를 돌렸다. 모두가 사인하듯 자신이 신청할 프로그램에 표시를 했다. 강욱은 수학 심화반, 나현이는 영어 토론반, 그리고 다른 몇몇은 제2외국어 스페인어 회화반을 선택했다. 그걸 지켜보던 희라는 과연 자신도 뭔가를 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연희라, 너는 뭘 들을 거야?”
뒤돌아본 나현이가 물었다. 한쪽 눈이 가려진 안경 뒤로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희라는 약간 멈칫했다. 방과 후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할지, 아니면 일단 학교 생활에 익숙해진 뒤에 결정할지 고민이 됐다.
“음… 아직 잘 모르겠어. 워낙 전학을 자주 다녀서, 사실 내가 어느 과목을 특별히 잘하는지도 잘 모르겠거든.”
나현이는 희라의 망설임에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뜸 추천을 해주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아서 해. 그래도 열심히 하긴 해야지 정도의 짧은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곧이어 종례가 끝나자, 반 아이들 중 몇몇은 바로 학원으로 가겠다며 가방을 둘러멨다. 야자를 안 하고 나가는 아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강욱은 남아서 자율학습을 할 계획인 듯했다. 나현이는 영어 토론반 자료를 챙겨들고 4층 어학실로 올라갔다. 그때 강욱이 갑자기 희라에게 다가왔다.
“너도 갈 곳 없으면 도서관 같이 갈래? 아직 정식으로 동아리도 못 들었을 테니까.”
희라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별 생각 없이 집에 가서 쉴까 했지만, 이대로 혼자 집에 가면 또 적막감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도서관에서 교과서를 한 번 훑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이 학교 수업 진도에 적응하기가 수월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같이 가자.”
그 두 마디로, 희라는 전학 첫날 오후를 어떻게 보내게 될지 결정했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환경,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렇게 하나씩 발을 내디디는 순간들을 쌓아가다 보면 조금씩 여기에 익숙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복도 창문 밖으로는 벌써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교정 울타리를 물들이고, 바람이 잔잔히 흩날리는 장면은 아름다웠지만, 이 도시의 수많은 학생들은 그저 오늘도 버티자라는 마음으로 각자의 학원과 공부자리로 이동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희라는 그 풍경을 보며 새삼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편으론 우리 아빠도 늘, 이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을 지켜주려 애썼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현이가 그때 아빠가 구해주었던, 바로 그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아빠가 건져낸 생명, 그리고 한쪽 눈을 실명한 아이. 너무나 우연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라는 다시금 나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작은 가능성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학교에 온 것, 그리고 나현이를 만난 것. 그 모든 게 우연일까? 아니면 아빠가 세상 어딘가에서 자기를 인도해준 걸까.
“가자.”
강욱의 부름에 희라는 생각을 접고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용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듯 밀려들었다. 책상마다 앉아서 교재를 펼친 학생들, 속삭이듯 소곤거리며 그룹 과제를 하는 무리들, 그리고 사서 선생님을 찾는 아이들의 모습이 분주하게 보이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희라는 자리 하나를 잡고 앉았다. 곁에 앉은 강욱은 이미 수학 문제집을 꺼냈고, 빼곡히 필기한 노트를 펼쳐보였다. 희라도 국어 교과서를 펴고 수업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책장을 넘기다 보니, 스스로에게 “정말 내가 이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희라는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작은 불안을 꾹 누르며 나직이 다짐했다. 분명히 지치고 힘든 순간이 있겠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있고, 가족이 있고, 아빠의 기억이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로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전학 첫날의 오후가 도서관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희라는 펜을 들고 본문에 줄을 그으며, 문학 작품의 배경 설명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가끔씩 들리는 페이지 넘기는 소리, 그리고 창문 밖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머리를 맑게 해주는 듯했다.
아직은 모든 게 낯설었지만, 새로운 공간에서의 시작치고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그런 뭐지 이 마음은."
희라는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찼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모든 물음표에도 지치지 않던 아빠의 얼굴이 햇빛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문득 아빠가 구해 준 그 아이는 잘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전학생, 적응이 빠르네?"
그때 나현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