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37
에이나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하츠투하츠 에이나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윤세희
제목: 찌개를 보글
“보글보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 엄마의 솜씨는 웬만한 맛집 주방장의 뺨을 쳤다. 아마 유명한 호텔의 주방장에게도 감히 명함을 던질만했다.
실제로 그러한 게 아빠는 주방장을 꿈꾸던 엄마를 낚아채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 당시 여주방장이 더 귀하던 시절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면 되기도 어려워서 엄마는 멋진 남자인 아빠와 일찍 결혼했다고 했다.
그래서 두 분은 지금 유명한 맛 평가단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너튜브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래서 맛도 훌륭했다. 자신들이 먹은 맛있는 음식을 네 남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서 맛난 음식은 싸왔다.
“아, 나 지각인데.”
이제 고3에 진학한 둘째 오빠는 뜨겁게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김치찌개를 보며 아쉬워했다. 지금은 맛보단 빨리 먹을 수 있는 게 중요했다.
“벌써? 이제 7시 30분이야.”
세희는 자신도 언젠가 맞이할 고3의 미래가 참담했다. 큰 언니가 그 길을 걸어 갈 때는 유난이 적어서 잘 몰랐다.
“너넨 0교시 안하냐?
오빠와 세희는 앞에 붙는 이름자체가 다른 학교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는 아직 중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였다. 그저 군대처럼 입대 직전 남성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그런 존재가 고등학교일 뿐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안 갈래. 그냥 엄마가 못 다 이룬 꿈을 내가 이루면 안돼?”
평생 엄마 표 찌개만 먹고 살고 싶다고 투정 부리다가 이제는 엄마 표 찌개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네가?”
오빠는 김치찌개를 훅훅 불어대면서 밥을 먹었다. 아무리 바빠도 너무나 맛있어서 안 먹을 순 없는 그럼 맛이었다.
“그럼, 솔직히 엄마표 찌개의 반만 흉내내도 성공아니냐?”
“그래, 그건 인정!”
노가리를 깔 시간이 없다며 얼른 밥을 먹고 일어서는 오빠였고, 그때 이제는 대학생이 된 첫째 언니는 아직 자고 있었고 막내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오빠 벌 써 가?”
“우리 막내 일어났어? 오빠 간다. 빨리 너도, 학교 가.”
막내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아도 되지만 가족 자체가 다들 부지런하다보니까 이렇게 일찍 일어났다.
“하아~ 오늘은 뭐하고 놀지?”
세희는 문득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노는 걸 고민하는 막내를 보자 역시 어린 게 좋은 건가 싶었다. 자신도 저때가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는 매일 힘들었던 거 같은데, 일단 지금 눈 앞에 있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다 먹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오늘 학교에서는 장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세희는 거의 고민도 하지 않고 적어야지 했는데 막상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몰랐다.
“찌개 요리사? 그냥 요리사라고 적어야 하나?”
엄마와 아빠를 따라 맛집 투어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맛집 말고 찌개 맛집으로만 따라가고 싶었다.
세희는 쉬는 시간에 설문지와 씨름하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 있는 친구들은 “나는 의사!”, “나는 프로게이머!”, “나는 연예인!” 같은 목표를 장난스레 얘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중 한 명이 세희에게 물었다.
"야, 세희야. 너는 뭐 적을 거야? 지난번에는 엄마 따라 요리사 하고 싶다던데?"
세희는 설문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요리사’라고 적을까 하다가... 사실 찌개 전문 요리사가 되고 싶거든."
"찌개 전문? 김치찌개, 된장찌개 이런 거 말하는 거야?"
"응.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세상 제일 맛있잖아. 나도 그런 찌개 만들어보고 싶어."
친구는 피식 웃으며 설문지에 적힌 항목들을 내려다봤다.
"그럼 그냥 ‘요리사(한식 전문)’ 이렇게 써놓으면 되지 않을까? 굳이 찌개 전문이라고 적으면 담임쌤이 뭔지 몰라서 물어볼지도 몰라."
"그러게. 그래도 ‘찌개 요리사’라는 말이 왠지 멋지지 않아? 나만의 색깔이 딱 보여서 좋을 것 같단 말이야."
"멋지긴 하지. 나중에 네가 찌개집 차리면 내가 공짜로 먹으러 갈게."
"공짜는 좀... 오빠도 아니고 왜 네가 공짜야."
세희는 웃으며 친구를 쿡 찔렀다. 마침 종이 울리고, 담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 다들 장래 희망 설문지 다 썼지? 아직 다 못 쓴 사람 있으면 쉬는 시간에 마무리하고, 이따 4교시에 걷을 테니까 준비해."
학생들은 각자 가방에서 설문지를 꺼내며 서로의 내용을 기웃거렸다. 세희는 한 번 더 설문지를 들여다봤다. ‘장래 희망’ 칸에 ‘찌개 요리사’라고 쓸까, 아니면 ‘요리사’라고 무난하게 쓸까 계속 고민이 됐다. 결국 그녀는 펜을 들고 조그맣게 글씨를 적었다.
‘찌개 요리사’
적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사실 평범한 ‘요리사’라는 단어도 나쁘지 않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만드는 찌개로 유명해지면 그 이름 그대로 불리고 싶었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세희는 도시락 대신 급식을 받으러 줄을 섰다. 메뉴판을 보니 빨간 국물의 육개장이 있었다. 곁눈질로 보니 국물 빛깔이 그리 진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급식 육개장은 좀 맹맹한 것 같지 않아?"
뒤에서 줄 서 있던 친구가 말했다. 세희도 슬쩍 코를 대보니 고춧가루 냄새만 좀 날 뿐, 뭔가 깊은 향은 부족해 보였다.
"글쎄. 그래도 따뜻하게 먹으면 배는 부르니까."
두 사람은 식판에 육개장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한 입 떠먹은 세희는 약간 실망했다. 매콤함은 있는데, 국물 안에 감칠맛이 적었다. 엄마의 김치찌개나, 집에서 먹는 된장찌개 같은 구수하고 깊은 맛이 그리웠다.
"내가 차라리 좀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세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친구가 히죽 웃었다.
"역시 찌개 요리사 될 애라 그런가. 괜히 음식에 엄격하네."
"이게 엄격한 거야? 그냥 맛에 대한 느낌이랄까... 엄마가 해주는 찌개는 훨씬 감칠맛도 좋고,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
세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두 분은 지금쯤 어디쯤일까. 분명 또 지방 어딘가로 맛집 투어를 떠났겠지. 아침에 먹은 김치찌개도 사실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 끓여둔 거였다. 진한 국물에 큼지막한 돼지고기, 푹 익은 김치가 어우러진 그 맛은 이딴 급식 육개장과 비교할 수 없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세희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 세희 왔구나? 오늘 학교 어땠어?"
거실에 아빠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엄마가 카메라 삼각대와 조명을 정리 중이었고, 식탁 위에는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두 분은 너튜브에 업로드할 영상을 편집하다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어, 엄마랑 아빠 오늘도 안 나가고 집에 있었어?"
"일정이 내일로 미뤄져서 오늘은 집에서 편집하고 있어. 너는 배 안 고파? 간식 좀 챙겨줄까?"
"간식도 좋지만, 난 찌개가 더 땡기는데..."
세희는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속마음은 진심이었다. 급식 육개장이 영 맛이 없어서 오후 내내 뭔가 허전했다.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밥은 저녁에 같이 먹자. 오늘은 너희 고3 오빠가 늦는다길래 저녁도 좀 늦게 하려고 했거든. 그래도 혹시 너무 배고프면 어제 고등어찌개 남은 거 있는데 데워줄까?"
"좋아! 고등어찌개 완전 좋아하는데."
세희는 가방을 벗어놓고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엄마는 어제 끓인 고등어찌개를 뚝배기에 옮겨 담고 버너 위에 올렸다. 이미 한 번 익어서 새빨갛게 물든 무와 고등어가 살짝 뭉근하게 남아 있었다. 약한 불로 데우기 시작하자, 조림처럼 걸쭉한 양념이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올라왔다.
"엄마, 이거 처음 끓였을 때도 맛있었는데, 하루 지나면 더 맛있어지는 거 알지?"
"알지. 푹 숙성된 양념이 고등어에 제대로 배니까. 바로 먹을 때보다 오히려 오늘이 맛이 더 좋을 거야."
엄마는 뚝배기에 대파를 송송 썰어 올리고, 살짝 말린 청양고추도 추가했다. 양념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자 세희는 구수하고 칼칼한 향에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음, 향만 맡아도 배불러진다."
세희는 부엌 한편에 놓인 작은 식탁에 앉아 엄마가 내주는 뚝배기를 기다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고등어찌개가 눈앞에 놓이자, 세희는 흰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뜬 뒤 국물에 푹 찍어 먹었다.
"와, 진짜 맛있다. 이런 찌개라면 매일 먹어도 안 질려."
"그렇다면 엄마의 꿈을 이을 기세네."
아빠가 거실에서 너털웃음을 지으며 건너왔다.
"세희야, 너는 나중에 어떤 요리사가 되고 싶어? 대충 듣기엔 찌개 전문이라고 했다던데?"
"맞아. 오늘 학교에서 설문조사 하는데, 내가 '찌개 요리사'라고 썼어. 근데 선생님이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나 싶기도 하고..."
"이상할 거 뭐 있니. 찌개야말로 한국인 밥상의 대표주자잖아. 요즘은 외국인들도 순두부찌개나 김치찌개 좋아해서 해외에서 한식당 차리면 대박 난다더라."
엄마가 거들었다.
"그러게. 아빠 말이 맞아. 실제로 우리 촬영 가면 외국인 관광객들도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먹으러 많이 오더라. 특히 맵고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 찌개에 홀딱 반하더라고. 너도 나중에 공부 열심히 해서, 세계 곳곳에 네 찌개 맛을 알릴 수도 있잖아."
"우와, 생각만 해도 좋다. 엄마, 내가 혹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나도 찌개 레시피 같은 거 직접 연구해보고 싶어."
세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등어살을 쓱 발라 세희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럼 언제 한 번 엄마랑 같이 레시피 노트부터 만들어볼까? 내가 요즘 식당들 돌아다니면서 배운 팁도 많거든. 특히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는 육수를 어떻게 내느냐가 핵심이더라."
"좋아! 육수, 나도 배울래."
세희는 밥을 우걱우걱 먹어 치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살짝 의자에 앉아 음식 냄새를 맡으며, 이 모든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어도 좋겠단 생각이 드는지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었다.
"우리 딸, 이렇게 열정적인데 찍어둬야지. 나중에 진짜 찌개 요리사가 됐을 때, ‘나 어릴 때부터 이렇게 했다’고 증거로 보여주면 되잖아."
"아, 아빠! 갑자기 카메라 들이대면 어떡해. 나 아직 교복 입고 있는데…"
"아무렴 어때. 자연스러운 게 더 좋지."
아빠가 능숙하게 화면을 돌리며 부엌과 식탁을 담아갔다. 엄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세희는 괜히 쑥스러워 얼굴을 살짝 가렸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 아빠가 이야기해준 전주 시장의 청국장찌개집이 떠올랐다. 그곳 주인 할머니는 40년째 청국장만 끓였다고 했는데, 하루하루 냄비를 닦고 콩을 고르고 발효시키는 과정이 전부 정성이라고 했다. 그녀는 손님이 없을 때조차 늘 청국장 냄새가 배어 있는 주방에서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 나중에 우리 다시 전주도 갈까? 그 청국장찌개집 할머니 뵈러 가고 싶어. 나도 발효 과정 같은 거 직접 보고 배우고 싶거든."
"좋지. 너도 벌써부터 공부하려고? 대단하네."
"대단하긴.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나중에 엄마, 아빠가 찌개 맛집 너튜브 찍는다면, 나도 그 현장에서 손발 한 번 맞춰보고 싶어."
"아이고, 든든해라. 요즘 아빠랑 둘이 다니느라 꽤 바쁜데, 너까지 합류하면 시끌벅적하고 좋을 것 같아."
아빠가 흐뭇해하면서 편집하다 만 노트북 화면을 툭툭 눌렀다.
"이번 주는 원래 대전 쪽에 김치찌개 잘하는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일정이 조금 미뤄졌거든. 혹시 네가 가고 싶으면 주말에 같이 가볼래?"
"정말? 나 가고 싶어! 이번엔 김치찌개집이야? 어떤 식당인데?"
"이름이 ‘진미집’인가 그렇다더라. 예전에 한 신문사에서 대한민국 김치찌개 베스트 5로 꼽았다나 봐. 신김치랑 돼지 삼겹살만 사용하는 게 특징이고, 하루에 김치통을 세 개씩 비울 정도로 인기라 하더라고."
세희는 벌써부터 설렘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하는 것, 알고 싶은 것을 직접 보고 맛보고 느끼는 건 교과서로 배우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진짜 기대된다. 혹시 촬영 때 내가 옆에서 엄마나 아빠 옆에 딱 서 있어도 돼?"
"당연하지. 대신 시식할 때 예쁘게 먹어야 해. 그리고 맛 설명도 잘해야 해. 그래야 우리 시청자분들이 ‘아, 저 집 가면 저런 맛이겠구나’ 하고 느끼실 거 아니니."
"좋아, 한 번 해볼게. 근데 나 말주변 없는 거 알잖아."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아. 그냥 네가 느낀 걸 그대로 말하면 돼."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며 고등어찌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세희는 땀을 훔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막내 동생이 집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왔어! 오늘 반에서 내가 달리기 1등 했어!"
"우리 집 막내, 대단하네. 축하해!"
세희가 뛰어가 막내를 안아주자, 막내는 싱글벙글 웃었다.
"나도 배고파. 밥 있어?"
"어, 조금 남았어. 엄마가 데워줄 거야."
그렇게 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아빠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장면을 영상으로 담았다. 이후 막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이에 첫째 언니마저 귀가했다. 언니는 대학 수업을 마치고 바로 온 터라 좀 피곤해 보였다.
"어, 왔어? 배고프지 않니?"
엄마가 다정하게 묻자 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좀 속이 허하네. 아침에 못 일어나서 밥도 대충 먹고 나갔거든. 오늘 뭐 먹을 수 있어?"
"고등어찌개 조금 남았는데, 맛만 볼래?"
"좋지. 이 집은 며칠 묵은 찌개라도 맛있잖아."
언니가 뚝배기를 들여다보고 웃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찌개 하나로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세희는 다시금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정말 난 찌개를 좋아하는구나. 이런 음식이 내 인생이 돼버리면 얼마나 즐거울까.’
한참을 떠들던 중, 오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고 엄마 핸드폰이 울렸다. 오빠는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아빠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럼 우린 저녁을 좀 더 미뤄야겠다고 했다.
"그러면 아까 저녁 늦게 먹는다고 했잖아. 그 사이에 아빠랑 엄마는 편집 마저 해. 나도 방에서 숙제 좀 해놓고 저녁에 새로 찌개 끓일 거 있으면 불러줘!"
"그래, 오늘은 부대찌개 어때? 아까 네가 김치찌개 얘기해서 부대찌개도 땡긴다고 했잖아. 사실 재료도 미리 사다 놨어."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장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햄, 소시지, 라면 사리, 치즈까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세희는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우와, 완전 좋아! 나 그거 만들 때 도울래. 야채랑 김치 먼저 볶아서 맛내는 거, 내가 한번 해볼게."
"역시 우리 막내딸, 열정이 대단하네. 그럼 일단 좀 쉬다가 저녁 직전에 같이 해보자."
그렇게 세희는 방으로 들어갔다. 교복을 갈아입으며, 오늘 제출한 ‘찌개 요리사’라는 장래희망 칸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도 됐지만, 이미 적어낸 걸 후회하진 않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 좋아하는 걸 평생 하면서 살면 분명 행복할 거야.’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교과서를 펼쳤지만, 자꾸 부대찌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김치, 햄, 고추장 양념, 사골육수나 멸치육수, 그리고 마지막에 치즈를 넣으면 얼마나 진한 국물이 우러날까 상상만으로도 침이 꿀꺽 삼켜졌다. 조금 있다가 부엌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세희야, 오빠가 곧 도착한대. 혹시 도우려면 이제 나와!"
"네, 엄마!"
세희는 책을 덮고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엄마 곁에 서서 양파, 파, 마늘을 척척 썰기 시작했다. 엄마는 불 앞에 서서 냄비를 예열했고, 그 사이에 아빠가 카메라를 가지고 다가왔다.
"오늘은 세희가 부대찌개 만드는 거 조금 도와준다면서요? 내가 또 멋진 장면 남겨둬야지."
"잠깐, 아빠. 준비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러워."
"갑작스러운 게 매력이야. 요리는 실전이니까."
엄마는 기름을 두른 냄비에 마늘과 파를 넣고, 세희는 그 옆에서 김치를 꺼냈다. 아침에 남은 김치찌개 재료 말고, 새로운 묵은지를 손질했다. 바싹 익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이게 바로 부대찌개의 포인트라고 엄마가 알려주었다.
"김치를 볶을 때 약간 설탕 한 꼬집 넣으면 신맛이 잡힌다고 했잖아. 그거 기억하지?"
"응, 응. 아, 고춧가루도 좀 뿌려야지. 볶을 때부터 넣으면 색깔도 더 진해진대."
세희는 배운 대로 차근차근 해나갔다. 엄마도 옆에서 중간중간 조언을 건넸다. 아빠는 연신 좋아, 좋아. 이런 장면 좋다라고 중얼거리며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볶아진 김치에 햄과 소시지를 듬뿍 넣고, 다시 한 번 센 불에 휘리릭 볶아줬다. 그 모습이 근사해 보였는지, 엄마도 오늘 좀 하는데? 하며 웃었다.
"이렇게 볶은 재료에다 육수 부으면 되지? 엄마, 육수 어디 있어?"
"냉장고 아래칸에 멸치다시 육수 담아둔 거 있잖아. 그거 쓰면 돼."
세희는 얼른 냉장고에서 육수를 꺼냈다. 냄비 속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어느새 집 안에 진한 부대찌개 향이 퍼졌다. 막내는 엄청 맛있겠다! 하고 소리를 질렀고, 곧이어 현관이 열리고 고3 오빠가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집 앞까지 진동하던데. 오늘은 부대찌개야?"
"우리 지금 막 끓이는 중이야. 얼른 손 씻고 와."
세희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모이는 식탁을 상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찌개 하나로 이렇게 모두가 즐겁고 분주해지는 순간이 바로 세희가 꿈꾸는 미래 같았다.
부대찌개가 어느 정도 끓어오르자 엄마가 치즈 한 장과 라면 사리를 넣었다. 노란 치즈가 국물에 녹아들며 느끼함이 살짝 감돌지만, 이게 또 부대찌개의 매력이라는 걸 세희는 알고 있었다.
마침내 식탁에 커다란 냄비를 옮겨놓고, 가족들은 둘러앉아 각자 밥그릇을 들었다. 아빠는 한 숟가락 떠먹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오늘 부대찌개는 세희가 거의 다 했다고 봐야겠는데? 맛이 깊다. 김치를 잘 볶아서 그런가, 국물이 진짜 좋네."
엄마도 거들었다.
"솔직히 내가 조금 손 봐줬지만, 그래도 오늘 세희가 주도적으로 끓였으니 이 정도면 합격점이야."
세희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웃었다. 오빠와 언니, 막내까지 연신 수저를 들이댔다. 칼칼하면서도 짭짤한 국물, 햄과 소시지에서 우러난 특유의 감칠맛이 공존하는 이 부대찌개가 정말 집밥의 최고봉처럼 느껴졌다.
"음, 이렇게 맛있으면 나중에 진짜 가게 열어도 대박날 것 같아."
언니는 입맛을 다시며 농담처럼 말했다. 세희는 밥을 한 숟갈 크게 입에 넣고, 반쯤 씹은 상태로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엄마, 아빠처럼 전국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찌개 레시피 배우고, 내 걸로 만들고, 언젠가는 직접 찌개집 열고 싶어. 마음 맞는 사람들 모아서."
그 말을 들은 엄마 아빠는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빠는 모처럼 일찍 끝난 학원 숙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부대찌개 맛에 푹 빠져들었다. 막내는 "오빠, 이 햄 먹을래?" 하며 한 조각 건네주고, 언니는 고기 건더기가 더 있나 뒤적거렸다.
그렇게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로 바쁘고 지쳐 있었지만, 찌개 한 냄비 앞에서 한 마음이 되는 것이 바로 이 가족의 특별한 풍경이었다. 세희는 온 식구가 함께 수저를 부딪치며 맛을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래, 나의 꿈은 찌개 요리사. 그거면 충분해.’
오늘 학교에서 아무리 누군가 그게 뭐야? 하고 웃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꿈이 어색할 리 없다고, 세희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밥 한 공기를 거의 다 비운 뒤, 세희는 바닥까지 보글거리며 끓는 부대찌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 따뜻하고 풍성한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고 다음날, 뜻하지 않은 인사가 세희를 찾아왔다.
"너 이름이 세희라고?"
같은 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애였다.
"어. 근데 왜?"
"내가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찌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어? 그게 왜?"
남자애는 자기 두 눈을 검지와 약지로 집더니 한 곳으로 모아 세희에게 향했다. 마치 자신이 찍었다는 느낌이었다.
"뭐야?"
"내 미래의 라이벌. 내 눈으로 확인하려고 왔지."
두 사람은 경쟁만 하는 게 아니라 의존도 할 것 같았지만, 우선은 경쟁자로 서로를 인식한 첫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