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44
김문수를 떠올리며 상상하여 만들어 보는 캐릭터
김문수를 떠올리며 상상하여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문수권
제목: 노동국회
“수권아. 너 정말 할꺼야?”
“몇번을 물어봐. 한다면 하는 거 알잖아?”
“그래도. 그러다 의원님이 너무 화나서.”
“화? 그게 두려웠다면 시작도 안했어. 국회의원은 시민의 대리일 뿐이야. 사람을 개처럼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고!”
수권은 국회 보좌관들의 ‘통’으로 통하는 존재였다.
“잘 하겠습니다!”
처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들어올 때만해도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었던 수권이었지만, 현실을 알고 이를 깨우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옳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국회로 들어왔는데, 정작 국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일하는 개미들, 보좌관들의 처우가 너무 고난했다. 파리 목숨과 같은 처지에 의원실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정말로 불쌍했다.
“이게 현실이야?”
수권은 혼자서는 안될 거라고 생각해, 처음엔 문화로, 영화를 같이 보는 보좌관 모임, 토론회, 그리고 의원실 마다 협력하는 문화, 정당 보좌관들을 모아서 점차 자신의 사람들을 모았다.
“너도 똑같을 꺼야.”
수권이 이런 일을 하는 걸 보고 이전에 수권과 같은 생각을 했지만 점차 변해갔던 선배 보좌관들과, 그리고 수권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었다.
“아니, 나는 안 변해.”
처음엔 다 그렇게 말한다고 하지만, 수권은 정말로 변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어떻게 서든 국회 안에서도 보좌관들이 사람 답게 일 할 수 있는 노동의 권리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아니 되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낼거라고생각했다. 이곳은 처음부터 노동의 권리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새롭게 지어질 세종의 국회의사당은 조금 더 보좌관 친화적으로 만들기 위해 일을 쉬는 날에도 거리로 나가 서명운동을 받았다.
“대단하네.”
그런 수권에게 사람들이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행동은 곧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주 단단한 벽이 있어서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수권의 의원인 강열은 처음엔 이런 수권의 행동을 시덥잖게 생각했다. 그냥하다가 말겠지 했는데 점차 강도가 깊어지고 다른 의원들의 강압도 들어오기 시작하자 수권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말렸다.
그럼에도 수권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문수권 보좌관 나 좀 봅시다.”
“…!”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수권이 이런 일을 나선 일이. 강열은 평소엔 보좌관들에게 반말을 했다. 그러나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 때는 존댓말로 변했다. 사람은 원래 처음과 마지막만 기억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좋은 이별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그렇게 수권은 국회의원 회관의 의원실에 마련된 방으로 강열을 따라 들어갔다.
"문 보좌관. 고생이 많지?"
강열의 낮은 목소리가 사무실 안에 들렸다. 보통 때 같으면 마치 하급직원을 대하듯 툭툭 반말을 던지던 의원이, 오늘은 이례적으로 존댓말을 쓴다. 수권은 이런 변화를 낌새로 알아차렸다. 좋은 말로 회유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결별을 위한 수순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다.
수권은 강열 의원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으로 의도를 가늠하려 애를 썼다. 강열은 투박한 손으로 서류 몇 장을 책상 끝에 치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 보좌관, 내가 요즘 당신 하는 일을 알긴 알아. 보좌관들 처우 개선한다고 기자회견도 하고, 국회 앞에서 서명운동도 하고, 이거 저거 바쁘던데."
수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크게 변명하거나 장황하게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국회 내부에서 보좌관 처우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얼마나 민감한지, 이미 그는 충분히 체감하고 있었다.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강열 의원이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는 걸 수권도 알고 있었다. 보좌관들은 국회의원에게 절대적 ‘을’의 위치이며, 별정직 공무원이지만 고용 안정성이랄 것도 없고, 의원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구조다. 이런 제도 자체를 바꿔보겠다고 수권은 외쳤다. 그게 여기 온 이유였다. 그런데 그의 직접 상관인 강열이 그걸 선뜻 반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좋게 생각? 하아… 사실 난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니야. 이 국회 구조가 정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근데 자네가 하는 방식이 너무 세. 다른 의원들도 뒤숭숭해하는 걸 봐. 그래서 다들 내게 한마디씩 하더군. ‘수권이 좀 말려라.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고."
"그게 예의가 아닌가요? 사람이 사람답게 일하려는 요구가 예의에 어긋나는 겁니까?"
수권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다. 강열은 그 톤에 잠시 말을 멈췄다.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댔지만,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국회의원은 선출직이잖아. 국민이 뽑아준 자리이고, 보좌관은 임용공무원이지. 근데 자네가 뭘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는지… 정작 자기 커리어를 망치고 싶진 않을 텐데, 걱정이 돼서 그래."
"매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포기하기 싫어요. 의원님도 아시잖습니까, 처음 제가 들어올 때 뭐라고 했는지. 저는 국회를 통해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다른 누군가의 노동권을 부정하면서까지 일해야 하는 국회라면, 이건 헌신이고 뭐고 다 헛일이잖아요."
수권은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강열은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이미 속으로는 결정이 선 듯했다. 오랫동안 정치판에 몸담은 강열의 눈빛은 사람을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 알겠네. 내 입장에서 자네를 막 비난하진 않을게. 자네가 국회 보좌진 권익을 위해 힘쓰는 거, 좋게만 보면 멋있긴 하지. 그렇지만 그것도 어느 선까지야. 지금 너무 앞서가면, 이게 결국 나한테도 타격이 될 수밖에 없고, 나뿐 아니라 많은 의원들이 불편을 느끼면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수권은 확신했다. 아, 드디어 왔구나. 의원님이 말하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는 곧 해고 통보를 돌려 말한 것이다. 그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을 중단하진 않을 겁니다. 의원님께서 당장 그만두라고 하셔도, 저는 제 원칙대로 할 겁니다."
이쯤에서 강열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웃음 비슷한 걸 흘리며, 회의용 테이블에 앉아서 물 잔을 굴렸다. 둘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지만, 수권은 여유로운 척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자네 같은 스타일이 무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 나도 옛날엔 그렇게 불의에 맞서고, ‘정의’ 같은 걸 외쳤다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대가가 따른단 말이야."
"그 대가가 그토록 큰 거라면, 이 국회가 애초부터 한참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런 의문마저도 낼 수 없으면, 의원님이 말씀하시는 민주주의가 도대체 뭔지 잘 모르겠네요."
수권이 아프게 비수처럼 찔렀다. 강열은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이미 둘의 관계는 사실상 파탄이 난 듯했다. 수권이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강열은 손을 들어 말렸다.
"조금만, 더 있어봐. 할 말이 하나 더 있으니까."
그 말에 수권은 앉은 채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의원실 어딘가에서 다른 보좌관들이 기척을 듣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정적 속에 강열이 입을 열었다.
"문수권, 자네가 이 사무실에 계속 남고 싶다면, 그 서명운동인지 뭔지 당장 중단하라고. 기자회견이든 뭐든 다 접어. 아니면…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딱 예상했던 말이었다. 수권은 대답 대신 짧은 미소를 보였다.
"의원님,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제가 그만두더라도, 이 운동은 이어질 겁니다. 저 아니어도, 이미 많은 보좌관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강열은 책상 위 서류를 꾹 누르듯이 손바닥으로 찍었다. 그러고는 냉정하게 일어섰다.
"그럼, 무슨 결과가 오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뜻이군. 내일까지 생각할 시간을 줄 테니, 현명하게 판단하게."
수권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를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이미 몇몇 동료 보좌관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수권이 함께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후배 비서관도 있었다. 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 형, 괜찮아?"
수권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사무실이 밀집된 복도를 지나 휴게실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술렁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국회의원과 보좌관의 체급 차이를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제 수권은 끝이겠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수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휴게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문수권 보좌관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권이 고개를 돌리니, 젊은 8급 비서 하나가 서 있었다. 평소 수권이 이끄는 ‘보좌관 협의회’ 모임에 몇 번 참석했던 녀석이었다. 긴장한 얼굴을 하고는, 지금 당장 뭘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고맙다. 우선은 다른 의원실 애들도 동요할 테니까, 모임 공지를 한번 돌려봐. 내가 오늘 저녁에 긴급 회의를 소집하려고 해. 혹시 내가 의원실에서 잘려나가더라도, 나 없이도 진행될 수 있게 조금 더 조직적으로 준비해보자."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넓게 연락해볼게요."
비서는 급히 뛰어갔다. 수권은 피식 웃었다. 그래, 아직 젊고 패기 있는 보좌관들이 남아있잖아. 혼자가 아니니까 얼마나 든든한가.
그날 오후, 수권은 부리나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우선 국회 정문 앞에 모일 예정인 보좌관 팀에게 간단히 상황을 공유하고, 저녁에 회의를 위한 장소를 잡아뒀는지 확인했다. 몇몇 국회의원들이 “이거 다선 의원들 기분나쁘게 만들면 보좌관 인생 끝장난다”고 겁을 줬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짧은 텀 사이에 의원회관 근처 카페를 빌렸다. 모임 참석자들은 한 15명 정도 될 것 같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다들 현재 보좌관 혹은 비서관, 인턴 등으로 일하며 국회 생태계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녁 7시 무렵, 카페에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사람, 의욕에 불타는 사람, 눈치를 보는 사람 등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우선 상황부터 공유하겠습니다. 전 아마도 의원실에서 잘릴 것 같습니다. 내일까지 고민하라고 하는데, 사실 이미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수권이 담담하게 말을 꺼내자, 몇몇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역시 예상대로”라는 듯 끄덕였다.
"어떻게든 의원님을 설득할 방법은 없나요?"
한 선배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권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해볼 만큼 해봤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보좌관, 비서, 인턴 등 모든 국회 직원들이 최소한의 노동권을 보장받는 거잖습니까? 면직 예고제나 계약 안정성, 기본적인 초과근무수당 같은 것들. 그리고 무제한 야근을 당연시하는 관행도 없애고, 친인척 채용 같은 문제도 개선하자는 거고."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맞아요. 그런데 의원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다들 이 구조를 유지해야 본인들 권력을 더 누릴 수 있는데."
후배 비서관이 고개를 떨구었다.
"쉽지 않겠죠. 그래도 우리 의지까지 꺾일 필요는 없습니다. 의원들에게도 우리 목소리를 직접 전하고, 만약 그게 안 통하면 언론이든 시민단체든 연대할 수 있는 곳과 최대한 협력해볼 생각이니까요."
"그럼… 문 보좌관님이 의원실에서 잘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참 후배인 9급 비서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이 일을 그만두면 생계가 막막해질 판이었다. 수권은 그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나야 뭐, 택시라도 몰면 살겠지. 나도 과거에 몇 달 택시운전 한 적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게끔 만들고 싶어서. 누가 낙선해도, 누가 의원직을 유지해도, 보좌관은 계속 전문직으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구조를 제도화하자고 모인거잖아요. 우리. 비록 내가 내일 없어져도.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현실의 벽을 절감했다. 수권은 이런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자, 길게 고민할 필요 없어.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의원들은 분명히 우리를 지지해줄 수도 있고. 아직까진 소수겠지만. 그리고 언론 쪽에도 연락해두었으니, 내일 모레쯤 간단한 기자 간담회를 열어봅시다. 다 같이 목소리를 내면,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겁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민주주의 했습니까? 쟁취했던 거 잖아요!"
사람들은 차분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취재 요청 대처 방법, 구호 문구, 보좌관들의 증언 정리, 그리고 의원들의 반응까지. 누군가는 서둘러 노트북으로 메모하고, 누군가는 전화기를 붙들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날 모임이 끝나갈 무렵, 수권은 사람들 앞에서 각오를 밝혔다.
"혹시 내일 제가 의원실에서 해고 통보를 받게 되면, 그건 오히려 우리에게 큰 상징이 될 겁니다.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가능하다면 저도 여기 남아서 더 움직이고 싶긴 하지만. 어쨌든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계속 함께 힘내봅시다!"
한참 동안 작은 카페 안에 결연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흩어졌다. 늦은 밤, 수권은 다시 국회 건물 쪽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에 깔끔하게 의원실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으니, 개인 물건을 미리 챙겨놓으려는 생각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의원실 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다. 낡은 형광등 몇 개만 어렴풋이 빛나고, 청소 담당직원이 한쪽 구석에서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수권은 조용히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펜 몇 자루와 스케줄러, 그리고 책들. 노트북은 국회 소유였으니 건드릴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구두 굽 소리가 딸깍거리며 복도에 울렸다. 순간 수권은 혹시 전강열 의원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었다. 똑같은 4급 보좌관, 선배인 안경원이었다. 그는 수권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 이젠 의원님도 많이 불편해하시고… 솔직히 좀 나도 신경쓰이네. 마무리 잘하길 바래. 진심이야. 괜히 다음 직장 갈 때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안 보좌관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 구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그런데 왜 계속 외면하세요?"
"나도 옛날엔 자네처럼 의욕이 넘쳤지. 근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고. 이 건물 안에서 의원이 곧 권력이거든. 우린 늘 을이야. 그러니 좋은 구호 내세워봐야 결국 부서지고 마는 거야."
수권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경원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곤 복도를 지나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보였다.
자정 무렵, 수권은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국회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서울의 밤, 도시는 잠들지 않았지만 국회만은 묘하게 고요해 보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하나가 왔다. ‘수권이 형, 힘내. 우리가 뒤에 있어.’ 서명운동에 함께한 동료들의 단체 카톡방이었다. 수권은 그걸 보며 문득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 이거 어디까지 해볼 수 있는지 가보자. 이미 한 발 내디뎠으니 물러설 수도 없다.'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아침, 무엇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두렵지는 않았다. 혼자가 아니므로. 국회 복도를 누비며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있으므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권은 자기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새벽 공기가 식어갈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구체적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곧 국회 보좌관 노조 조직 준비를 공식 선언하고, 불합리한 면직 관행과 과도한 야근, 친인척 채용 비리 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예정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도가 아니라, 보좌관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오랜 습관처럼, 수권은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과연 내일 강열 의원과의 마지막 대면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 어떤 폭풍이 불어닥칠지 모르겠지만, 결국 오늘보다 나은 국회를 만들기 위해 작은 돌멩이라도 던지는 수밖에 없다고.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평온해졌다. 며칠 전까진 의원에게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했다.
그날 밤, 수권은 누구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내일의 결투를 기다렸다. 고장 난 국회, 그 내부에서 진짜 ‘노동국회’를 꿈꾸는 그의 다짐이 눈부신 야경보다도 선명하게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