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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50

by 라한


가을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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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주가현

제목: 칙칙폭폭 네트워크


“칙칙폭폭”


가현은 어릴 때부터 기차에 진심이었다. 유독 기차만이 그렇게 좋아서 기차를 소재로 한 만화애니메이션은 전부 봤다. 덕분에 괜히 테토녀로 오해받아 메카물도 좋아하는 소녀가 됐었다.


변신로봇이 인기가 많았던 건 끊임이 없었는데 그래서 장난감으로 기차변신로봇도 많았고 가현은 늘 인기가 또래에 특히 남자애들에게 많았다.


“가현아, 너 이것도 있어? 이것도? 우와. 이것도? 우와아아!”


유치원 때 까진 거의 남자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자 아이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좋지?”

“웅!”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와이와 또 가현과 친해지기 위해서 기차 장난감을 구비한 여자 아이들과도 잘 놀았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기차 장난감으로 보내고, 교복을 입기 시작한 때 부터는 장난감이긴 하지만, 조금은 더 수준 높은 격으로 진화를 하게 됐다.


철도 길을 연결하고, 기차를 보내는 미니어쳐에 가까운, 실제 기차와도 비슷한 미니 모형들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직접 기차에 관한 연구까지 했다. 그렇게 전국의 기차역이란 역은 다 가보게 됐다.


“그러니까 여기는. 김유정역.”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그리고 연인과 함께 전국의 기차역을 다녔던 가현은 이제 한 나를 넘어 여러 나라의 기차역까지 가게 됐다.


김유정역 승강장으로 첫 기적이 울린 건 새벽 다섯 시도 되기 전이었다. 아직 안개가 빠져나가지 못한 강촌 골짜기에서 초록색 전동열차 헤드라이트가 희미한 원을 그리며 다가왔다. 1939년 신남역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2004년에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얻은 이 작은 시골역은, 지금도 플랫폼 끝마다 1930년대 목재 기둥이 남아 있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


가현은 카메라 셔터보다 먼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열기가 조금씩 번져 오는 플랫폼 위에서 노트 한 장을 찢어 현수막처럼 흔들었다.


“이곳이 시작점, 레일의 첫 글자”


낡은 사인펜으로 적힌 문장은 열두 살의 자신에게 보내는 답장 같았다. 어린 시절 교실 뒤 구석에서 기차 변신 로봇을 조립하던 그 손이 이제 진짜 레일 위를 더듬고 있는 것과 같았다.


민재가 손등으로 입김을 씻어 내며 말했다.


“김유정 선생님 단편에 나오는 철길 배경이 바로 여기랬지”


선로 건너편엔 김유정문학촌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었다. 가현은 목에 둘러맨 미니 플래카드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역을 스캔하듯 둘러본 뒤, 그는 노트 맨 앞장을 넘겼다. 첫 페이지엔 세로로 큼지막하게 대한민국, 가로로 자잘하게 670개의 역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꺼운 마커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곳은 겨우 열두 곳.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가현은 브이로그 오프닝을 녹화했다.


“칙칙폭폭 네트워크 시즌 투, 김유정역 편을 시작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송곳처럼 선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말끝에서 뿜어나온 흰 김이 차가운 레일 위로 얹혔다.


“청량리에서 갈아탈 때만 해도 눈이 내렸지”


민재의 목소리가 하늘로 흩어졌다. 청량리역은 1911년 경원선 출발점으로, 서울 동북부 시장을 키워 낸 역세권의 모태였다. 1974년 전철 1호선이 청량리와 서울역을 잇던 날부터 이 동네는 밤새도록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가현은 스마트폰 지도 위에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이어진 경춘선 전철 노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폐선 구간을 레일바이크로 개조해 관광지를 만든 것도, 김유정역 바로 옆이었다.


“어릴 때부터 난 기차가 아니라 레일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아”


가현이 말했다.


“기차를 보는 건 풍경을 통째로 옮겨 다니는 느낌이잖아”


민재는 셔터를 눌러 가현의 옆모습을 담았다. 계속 회전하던 렌즈 안으로 느린 곡선의 레일이 잡혔다. 동그란 강설 위에 금속이 박히는 듯한 그 선은, 마치 도시와 도시 사이에 그려 놓은 얇은 연필 자국 같았다.


가현은 노트 다음 장을 펼쳤다. 오늘 스토리보드라 적힌 칸에는 서울역 구 역사와 문화역서울284 전경이 첫 컷으로 들어 있었다. 1925년 르네상스 양식 청동 돔이 빛나는 그 건물은 2011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매일같이 전시와 공연이 열렸다.


다음 컷은 청량리역 환승센터. 버스, 지하철, 수인분당선이 레이어처럼 겹쳐 살아 있는 교통의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컷은 김유정역. 지금 눈앞에서 아침 열차가 서서히 정차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가현은 페이지 한가운데 ‘꿈’이라는 단어를 동그라미로 감싸며 촘촘히 화살표를 뻗었다.


“미니어처로 모든 역을 한판에 이어 보기”


레일바이크 선로처럼 버려진 구간도, 분단으로 끊긴 경원선 북쪽도, 아이들이 손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축소판에 올려놓는 상상을 했다.


그 모형 위로 초소형 KTX가 달릴 때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였다. 현실 철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꺼야.”


가현의 작은 꿈은 오래전부터 달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접고 역 밖으로 나오자, 눈송이가 굵어졌다. 김유정역 광장 앞엔 1930년대 신남역 간판을 본뜬 포토존이 세워져 있었다. 가현은 잠깐 주머니 속 장난감 기차를 만지작거렸다. 친구들이 놀리던 테토녀라는 별명이 문득 떠올랐다.


“좋아, 이제 우리나라 동쪽 끝으로 가 볼까”


민재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동쪽보다 남쪽이야, 부산 초량역. 영도다리를 바라보는 낮빛이 멋있다더라”


그 말에 가현은 노트 여백에 작은 삼각형을 그리고 글씨를 써 넣었다.


“부산 초량역, 근대 개항기 풍경, 미니어처 난간 파란색”


민재가 잠깐 휘파람을 불었다.


“근데 일본 시모나다역은 언제 가?”


가현은 움찔했다. 세토 내해를 향해 열려 있는 조그만 간이역, 플랫폼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 일몰에 맞춰 붉은 레일이 물드는 순간을 촬영하고 싶었다. 시모나다역은 마스터플랜에서 한국 노선 다음으로 배치된 동아시아 첫 포인트였다.


“바다 냄새가 섞인 기찻길도 좋지만 나는 먼저 우리 철로부터 정리해야 해”


가현은 말했다.


“김유정에서 부산까지 내리고, 다시 윗북강릉으로 올라가고, 그담에 일본이지”


욕심이 과해도 되지 않나 하는 듯 민재가 웃었다.


“왜, 중국 펑타이역까지 욕심내도 괜찮은데?”


가현의 눈이 반짝였다. 1895년에 처음 지은 뒤 2022년 40만 제곱미터 규모의 고속, 일반 복합 허브로 재개장한 베이징 펑타이역. 그는 노트 한 귀퉁이에 붉은 별표를 그렸다.


“꿈은 언젠가 북경으로, 그리고 더 멀어지는 레일”


아직도 눈이 그치지 않은 김유정역 광장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장비를 챙겨 나섰다. 가현은 플랫폼 끝에서 다시 돌아서서 역 간판을 바라보았다. 의자 위 광고판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철길 위를 달리는 책”


김유정 선생의 소설집 광고였다. 가현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얼굴을 들었다.


“나도 내 레일 위를 달리겠어, 미니어처로 시작해 현실까지, 그렇게 할꺼야!”


민재가 캐리어 바퀴를 굴리며 물었다.


“다음 촬영 계획, 말해 봐”


“서울역 구 역사 야간 촬영, 다음 주. 그리고 청량리 환승센터 새벽 타임랩스. 그게 끝나면 경전선으로 넘어가서 순천역, 다음엔 진주”


가현의 목소리는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추워도 가자, 레일은 얼지 않으니까”


두 사람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맞은편 선로에 눈으로 덮인 구식 디젤 기관차가 천천히 들어왔다. 관광용 임시 열차였다. 커다란 헤드라이트가 김유정역 간판 위를 밝히며, 칠흑 같은 새벽을 가르듯 짧게 기적을 울렸다.


“칙칙폭폭”


김유정역 아침 공기에 울려 퍼진 기적 소리는 오래전 장난감 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정확히 겹쳤다. 가현은 카메라를 꺼내 들지 않았다. 대신 귀에 익은 리듬을 마음속에 새겼다. 언젠가 목재로 깎아 만든 미니어처 선로 위에서도, 이 소리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다.


길은 막힌 적이 없었다. 끊긴 건 레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상력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현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첫 장면이 완성되었다.


열차가 떠난 뒤 플랫폼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레일 위엔 아직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는 듯했다. 가현은 어깨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털며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이십 분, 첫차가 지나간 지 채 십 분이 되지 않았다. 역무원이 손난로를 흔들며 다가와 물었다.


“춘천까지 가시나 봐요”

“아니요, 되돌아가요. 역을 담으러 왔거든요”


그 말에 역무원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역 뒤편 급수탑 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정보는 보너스였다. 가현은 기념으로 역무원과 사진을 찍으며 약속했다.


“박물관이 생기면 꼭 초대할게요.”


역무원은 소녀가 남긴 말의 의미를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강물이 바다에 도착하면 초대하겠단 말과 같았으니까.


돌아오는 전동차 창가 너머로 북한강 물안개가 깔리고, 옛 선로 위 레일바이크가 미끄러졌다. 그 한 장면은 또 다른 꿈으로 변주되었다. 야외 선로를 깔아 손바닥 크기 기관차가 달리는 강촌 미니어처 파크. 장비팀, 워크숍, 레일로 배우는 기계공학. 목록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청량리역에 도착하자 군고구마 냄새와 함께 복잡한 동선이 눈을 사로잡았다. 경원선·중앙선·경춘선이 교차하는 거미줄, 그리고 새하얀 KTX-이음의 진입. 가현은 그 곡선과 직선을 미니어처 안에 어떻게 접어넣을지 계산했다.


새벽 작업실에서 3D 프린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동안 꿈은 더 구체화됐다. 부산 초량역 목조 난간, 순천역 모던 아치, 묵호역 토르소 지붕. 파편처럼 찍힌 시간들이 천천히 한판 퍼즐을 이루었다.


새벽 작업을 마치고 잠시 눈을 붙인 뒤, 가현은 낮 열두 시 서울역 구 역사 중앙홀에 서 있었다. 청동 돔 아래로 내려앉은 빛무리는 노을빛조차 품고 있었다. 문화역서울284 라운지에서는 오늘도 독립영화 상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100년 넘는 시간이 만든 아치형 창에는 증기기관차 시절부터 이어지는 그을음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 자국을 따라 그리며 속삭였다.


“언젠가 이 돔을 투명 아크릴로 축소해 옛 필름을 틀어 주면 어떨까. 아이들은 빛이 흐르는 돔 지붕 아래 서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거야”


바닥에 새겨진 네 개의 이름, 남대문정차장·경성역·서울역·문화역서울284는 기차역이 환생을 거듭해 온 시간을 말해 주었다. 가현은 그 아래 한 줄을 적었다.


“네 개 이름, 한 개 레일, 시간을 잇는 박물관”


스피커에선 아직 개통도 안 된 KTX속초행 사전예약 뉴스가 흘렀다. 새로운 곡선이 그의 지도에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속초행 고속철도, 내 미니어처 지도에 또 다른 반원을 그려 주겠지”


돔 시계가 낮 열두 시를 알렸다. 종소리 위로 다시 떠오르는 기적의 메아리, 칙칙폭폭. 가현은 확신했다. 이 첫 장면만으로도, 누군가는 이미 레일 위 꿈을 꾸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기차를 말릴 수 있는 건 없어.”


그리고 자신이 마치 달리는 기차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동의하는 한 명 민재가 있었고, 그리고 가족들이 있었다.


모든 기차의 미니형태의 박물관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국내의 모든 철도 노선을 연결하는 꿈을 가졌다.


또 언젠간 세계를 기차길로 연결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게 가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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