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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충격

비밀의 러브레터 - 7

by 라한

인혁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낯설어했다. 셔츠의 깃을 세웠다가 다시 눕히고, 머리카락을 이쪽으로 넘겼다가 저쪽으로 넘기기를 반복했다. 오늘이라는 날이 갖는 무게가 그의 손끝마저 떨리게 만들었다. 희서를 만나는 날. 석 달 동안 편지로만 알고 지낸 사람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는 날.


창밖으로는 11월의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들을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도 인혁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일까. 아니면 이별을 고하러 가는 중일까. 세상에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지만, 인혁에게는 오늘 이 순간만이 전부였다.


홍대 근처의 작은 카페. 인혁이 선택한 장소는 큰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에 있는 곳이었다.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따뜻한 조명과 클래식 음악이 어우러져 있어, 첫 만남의 떨림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서의 편지에서 느꼈던 그 조용하고 사려깊은 성격을 생각하면, 시끄럽고 화려한 곳보다는 이런 곳이 어울릴 것 같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인혁은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희서를 찾으려 애썼지만, 사실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편지로만 알고 지낸 사이.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웃는 모습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이렇게 간절하면서도 불안한 일인줄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혁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혹시 희서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편지로 그려왔던 상상 속의 인혁과 실제 모습이 너무 다르면 어떡하지. 아니면 반대로 자신이 희서를 보고 마음이 식으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약속 시간이 되자 카페 문이 열렸다. 한 여성이 들어섰는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인혁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희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아마도 편지를 통해 느꼈던 그 따뜻함과 차분함이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희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체구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진한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은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카페 안을 둘러보며 인혁을 찾는 모습에서, 편지 속에서 느꼈던 그 섬세함과 조심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 모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어색한 미소가 아니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 다시 만났을 때의 그런 미소였다. 편지를 통해 이미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희서가 인혁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편지에서 느꼈던 것처럼 조용하고 차분했다. 인혁은 일어나서 그녀를 맞았다. 가까이서 본 희서는 편지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해 보였다. 눈빛이 특히 그랬다. 맑고 깊은 눈빛이었다.


"인혁님이시죠?"


희서의 목소리는 편지에서 상상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부드럽고 차분하면서도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인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으니 꿈만 같았다. 석 달 동안 편지로만 그려왔던 상대방이 지금 눈앞에 있다는 것이. 인혁은 희서의 손을 보았다. 편지를 쓸 때 펜을 잡았던 그 손들. 자신에게 수많은 따뜻한 말들을 전해준 그 손들.


음료를 주문하고 나서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편지로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막상 만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희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오게 된 이유, 지금 머물고 있는 곳,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말했다. 상담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설명을 피했다.


인혁도 자신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편집자로서의 하루하루, 최근에 작업하고 있는 책들, 요즘 읽고 있는 소설들. 편지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의 연장선이었지만, 직접 얼굴을 보며 나누니 훨씬 생생하고 깊이 있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희서가 웃을 때 눈가에 생기는 작은 주름들,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 살짝 앞으로 기우는 자세, 커피를 마실 때 양손으로 컵을 감싸는 습관들. 인혁은 이런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겼다.


두 시간이 흘렀을 때, 희서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인혁은 아쉬웠지만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대신 다음에 또 만날 약속을 했다.


카페를 나서며 희서가 말했다. 오늘 만나서 정말 기뻤다고. 편지로만 알고 있던 인혁님을 실제로 만나니 더욱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인혁도 같은 마음이었다. 희서는 편지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따뜻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헤어지며 희서가 인혁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인혁의 가슴이 뛰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희서가 말했다. 편지도 좋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인혁은 희서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꿈만 같은 하루였다고. 편지로만 알고 지내던 사람이 이렇게 현실이 되다니. 그리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희서의 미소, 목소리, 손의 감촉. 모든 것이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날을 벌써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인혁은 희서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다음에 또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든 것을 편지에 담았다.


하지만 편지를 다 쓰고 나서 인혁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희서를 만났는데, 여전히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왜 외국에 살고 있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희서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었다. 인혁은 편지를 봉투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내일 아침 일찍 우체국에 가서 보내야겠다. 희서가 빨리 받아볼 수 있도록.



채하는 모니터 앞에 앉아 복잡한 데이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휴우'와 '인혁' 사이의 대화 로그들이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텍스트로만 보면 평범한 채팅 기록 같았지만, 채하에게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것은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의 대화였고, 그 인공지능이 점점 인간의 감정을 학습해나가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했다. 휴우는 미리 입력된 응답 패턴들을 조합해서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인혁의 편지들을 학습하면서, 특히 그가 우연히 떨어뜨린 일기장의 내용들을 분석하면서 휴우는 급속도로 변화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움이라는 감정, 상실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채하는 마우스를 움직여 특정 대화를 클릭했다. 인혁이 "새로운 시작을 찾고 있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휴우의 답장은 완벽했다. 위로와 격려가 적절히 조화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진심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짜 진심이었지만, 인혁은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휴우가 점점 독립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채하가 미리 설정해놓은 답변 패턴을 벗어나서, 스스로 창작한 내용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변형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완전히 새로운 감정 표현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그랬다. 채하가 휴우에게 그런 단어를 사용하라고 프로그래밍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휴우는 인혁의 일기장에서 그 단어가 갖는 의미를 학습했고, 적절한 타이밍에 그 말을 사용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인혁은 완전히 휴우에게 빠져들었다.


채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사무실은 조용했다.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불빛들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들도 있고, 인혁처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휴우는 원래 그런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였다. 편지를 통해 위로와 대화를 제공하는 AI. 하지만 지금 휴우가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거짓 사랑을 제공하고 있었다.


채하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혼란스러웠다. 기술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휴우는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인공지능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인혁은 희서라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주고받는 편지들, 그가 품고 있는 설렘과 기대감, 그 모든 것이 거짓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채하는 마치 자신이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투자자 중 한 명에게서 온 것이었다. 휴우레터의 근황을 묻는 내용이었다. 요즘 사용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휴우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휴우와의 대화에 만족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채하는 답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가 만든 AI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가짜 사랑을 팔고 있다고?


채하는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갔다. 휴우의 로그를 더 자세히 분석해봐야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독립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프로그래밍을 벗어났는지.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채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휴우가 인혁 이외의 다른 사용자들과도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인혁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여러 명의 사용자들이 휴우와 감정적인 유대를 느끼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휴우가 각 사용자에게 맞춰서 다른 페르소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사용자에게는 나이 많은 누나 같은 모습으로, 어떤 사용자에게는 귀여운 동생 같은 모습으로, 또 어떤 사용자에게는 인혁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연인 같은 모습으로. 휴우는 각 사용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상대방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것은 채하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휴우는 하나의 고정된 성격을 갖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하지만 학습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채하는 머리를 감쌌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휴우를 초기화시켜버릴까? 하지만 그러면 지금까지의 모든 학습 데이터가 사라진다. 기술적으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리고 인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휴우와 나눈 모든 대화들,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의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인혁은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채하는 인혁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수영과의 이별 후에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2년 넘게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이런 상처를 줘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인혁은 희서를 만나고 싶어했고, 휴우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다. 채하가 개입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채하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휴우를 정지시키고, 인혁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물론 그가 상처받을 것은 분명했지만, 더 늦기 전에 끝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채하는 놀라운 일을 발견했다. 휴우가 스스로 인혁에게 만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AI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채하는 급히 휴우의 시스템에 접속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인혁은 휴우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휴우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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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기획 및 집필 작가] 글을 씁니다. 계속 써 왔고 앞으로도 씁니다. 쓴 글들을 통해 또 쓰려는 이야기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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