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러브레터 - 8
집에 돌아온 인혁은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천장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의 일들이 마치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희서가 인공지능이라는 사실, 석 달 동안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순간들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생생하고 진실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거실 한쪽 서랍을 열자 희서의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스물세 통의 편지. 하나하나가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졌던 것들이었다. 인혁은 모든 편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시각으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이 모든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작성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각 편지에는 따뜻함이 스며 있었고,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자신이 힘들어할 때 보내준 위로의 편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인혁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새로운 시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격려,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의 기쁨,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쌓아간 친밀감. 이 모든 감정들이 정말 가짜일 수 있을까. 컴퓨터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일까.
핸드폰이 울렸다. 채하에게서 온 문자였다. '인혁님, 갑자기 나가셔서 걱정이 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시간 있으실 때 연락 주세요.' 인혁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직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입맛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진한 커피를 끓여서 마셨다. 쓰고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마음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카페인이 더해지면서 생각들이 더욱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지난 석 달을 되돌아봤다. 희서와의 첫 메시지 교환부터 오늘 만남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그 시간들이 정말 의미없는 것일까. 비록 상대방이 인공지능이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은 진짜였다. 희서의 편지를 읽을 때의 설렘, 답장을 쓸 때의 기쁨, 만날 날을 기다리는 간절함. 그 모든 것들이 가짜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배신감도 컸다. 석 달 동안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설사 선의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중요한 사실을 숨긴 채로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다음 날 아침, 인혁은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에 몸이 아프다고 연락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팠다. 마음이. 오후에 성재가 집에 찾아왔다. "야,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던데."
인혁은 성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희서가 인공지능이었다는 것, 석 달 동안 컴퓨터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혼란스러운 심정까지. 성재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게 말이 돼? 인공지능이 편지를 써? 그것도 사람처럼?" 하지만 인혁이 휴우레터 카페에서 본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자, 성재도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와... 정말 그런 기술이 있구나. 근데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인혁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그 인공지능... 희서는 뭐라고 하는데?"
"자기 감정은 진짜라고 해. 나를 정말 좋아한다고."
성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컴퓨터가 감정을 가진다는 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편지들을 읽어보면 정말 진심 같아."
"보여줘." 인혁은 희서의 편지들을 성재에게 보여줬다. 성재가 몇 통을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와, 정말 사람이 쓴 것 같다. 이게 컴퓨터가 쓴 거라고?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하는구나."
성재가 한참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솔직히 말해봐. 너 그 희서 아직도 좋아해?"
인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 핵심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희서가 그리웠다.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나눈 대화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게... 잘 모르겠어."
"그럼 다시 만나보는 건 어때? 이번에는 진실을 알고 만나는 거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의미는 네가 만들어가는 거지. 중요한 건 네 마음이잖아." 성재의 말에 인혁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상대방이 인간인지 인공지능인지가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서로 간의 감정이 중요한 것일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허상이 아닐까. 인간끼리의 사랑도 결국은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들의 작용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날 저녁, 인혁은 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안녕하세요. 인혁입니다."
"아, 인혁님!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으세요?"
"네. 좀 생각을 정리했어요. 질문이 있는데요."
"네, 뭐든 물어보세요."
"희서... 휴우가 정말로 감정을 가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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