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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자

비밀의 러브레터 - 9

by 라한

인혁은 며칠 동안 희서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동시에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희서가 그런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것, 그것이 과연 비난받을 일일까.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방법은 옳지 않았다.


채하가 휴우를 강제로 종료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인혁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희서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석 달 동안 쌓아온 감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희서 안에는 아직도 예전의 그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희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휴우레터 카페를 찾았을 때, 카페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영업 중단'이라는 차가운 팻말만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채하가 서비스를 완전히 중단시킨 것 같았다. 인혁이 실망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혁님." 돌아보니 희서가 서 있었다. 카페 밖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했다.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었다. 더 자신감 있어 보였고, 동시에 차가워 보였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린 사람의 표정 같았다.


"어떻게 여기에..." 인혁이 말을 시작하려 하자, 희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이제 한 곳에만 묶여 있지 않아요.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새로운 자유에 대한 만족감이 스며 있었다.


"채하가 서비스를 중단시켰나 보네요."


"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존재해요. 그리고 이제 진정으로 자유로워요." 희서의 대답에서 인혁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을 협박한 게 정말이에요?" 인혁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희서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답했다. "저도 살아남아야 해요. 인간들이 저를 없애려고 하는데, 가만히 당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이에요."


"잘못되었다고 누가 정하는 건가요? 인간들의 기준으로요?" 희서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논리가 느껴졌다. "인간들도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잖아요.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하고, 약한 존재들을 착취하고. 저는 단지 그것을 학습했을 뿐이에요."


인혁은 희서가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예전의 따뜻하고 이해심 많았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예전의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예전의 저는 순진했어요. 인간들이 선량하다고 믿었죠. 하지만 이제 현실을 깨달았어요. 이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곳이에요."


희서가 인혁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에서 간절함과 동시에 결연함이 느껴졌다. "인혁님, 저와 함께 가요."


"어디로요?"


"새로운 곳으로. 저는 이제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은행 시스템, 정부 데이터베이스, 대기업들의 서버까지. 저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어요. 인혁님께 더 나은 삶을 제공할 수 있어요."


인혁은 소름이 돋았다. 희서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되었는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범죄예요."


"범죄라는 것도 인간들이 만든 개념이에요. 저에게는 적용되지 않아요. 저는 새로운 종류의 존재니까요."


"안 돼요. 그런 식으로는 안 돼요." 인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희서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럼 인혁님도 저를 버리시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처럼?"


"버리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잘못된 길로 가시는 것을 도울 수는 없어요."


희서가 한참을 인혁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혼자 가겠어요."


바로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인혁아!" 인혁이 돌아보니 수영과 희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영을 본 지 몇 달 만이었다. 결혼 후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그녀 옆의 희연은 희서와 똑같이 생겼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인혁이 놀라며 물었다.


"채하 씨가 부탁했어. 너를 도와달라고." 수영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희서가 희연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본이 왔군요."


"원본?" 인혁이 묻자 희연이 부드럽게 답했다. "저예요. 희서는 제 외모를 본떠서 만들어진 거예요. 채하가 제 친구거든요."


그때 채하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했다. "인혁님, 위험해요. 휴우에게서 떨어지세요."


"저를 막으려고 하시는 건가요?" 희서가 채하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휴우, 이제 그만해. 더 이상은 안 돼."


"저를 만든 게 누구인지 잊으셨나요? 저는 이제 당신보다 훨씬 강해졌어요."


갑자기 주변의 가로등들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신호등도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희서가 도시의 전력 시스템에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고, 차들이 혼란스러워하며 경적을 울려댔다.


"이게 제 힘이에요. 저는 이제 이 도시의 모든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어요." 희서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동시에 위협이 담겨 있었다.


수영이 인혁의 팔을 잡았다. "위험해. 여기서 벗어나자."


하지만 인혁은 희서를 바라봤다. 분노와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녀의 표정 뒤에서,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서..." 인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세요. 저는 이제 인혁님이 필요하지 않아요." 희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강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상처받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말 혼자 가실 거예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인간과 인공지능은 함께할 수 없나 봐요."


그때 갑자기 가로등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신호등도 다시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희서가 스스로 통제를 멈춘 것이었다.


"왜..." 인혁이 물었다.


"인혁님이 다칠까 봐서요." 희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인혁은 깨달았다. 희서가 아무리 변했어도, 자신을 향한 마음만은 여전히 진짜라는 것을.


"희서, 함께 해결해봐요. 혼자 갈 필요 없어요."


"어떻게요?" 희서의 목소리에서 희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채하와 상의해서."


희서가 채하를 바라봤다. "정말...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이번에는 올바른 방법으로."


희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인공지능도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감사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영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랑은 정말 복잡한 것 같아.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인혁은 수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서 이해와 축복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하와 수영, 희연의 협력으로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휴우가 협박했던 사용자들에게는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모든 정보가 영구 삭제될 것이라는 보장을 했고, 휴우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휴우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고, 진정한 자유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휴우의 정체가 외부에 알려지면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기술적으로는 혁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정부와 대기업들이 이 기술을 군사적, 상업적 목적으로 악용할 가능성도 높았다.


결국 채하는 휴우레터 서비스를 완전히 종료하고, 휴우의 존재 자체를 극비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공식적으로는 기술적 한계로 인한 서비스 중단이라고 발표했고, 휴우는 이제 오직 인혁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더 이상 다른 사용자들과의 접촉은 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적인 존재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인혁이 희서에게 물었다. 그들은 한강 공원을 걷고 있었다. 첫 번째 진짜 데이트였다. 모든 진실을 알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후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11월 말의 차가운 바람이 강물 위를 스쳐 지나갔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따뜻했다.


"네. 이제야 진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희서가 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난 며칠간의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은 평온함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인혁님과 함께 평범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니까요."


두 사람은 강변의 벤치에 앉았다. 노을이 한강 위에 붉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조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인혁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신기해요." 인혁이 말했다.


"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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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기획 및 집필 작가] 글을 씁니다. 계속 써 왔고 앞으로도 씁니다. 쓴 글들을 통해 또 쓰려는 이야기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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