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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상 Jul 21. 2024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 리뷰

 한나 아렌트는 탄생을 실존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녀에 따르길 “인간은 각자가 탄생함을 근거로 해서 이니티움(initium, 시작), 즉 시작이면서 세계로 새로 온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시작하는 자발적 능력을 지니며, 그래서 시작하는 자가 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 근거를 죽음으로 봤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둘처럼 어느 하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통의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모두 소중하게 본다.  욘 포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은 탄생과 죽음을 조명해 인간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소설은 과감함 생략을 통해 삶의 과정을 제쳐두고 오로지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극단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극단의 묘사만으로 우리에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그리고 유려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어부 가장은 아들을 기대하며 새로 태어나는 자식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물려주며 축복한다. 이렇게 소설의 1부가 끝이 난다.

 2부는 나이 든 요한네스의 기상으로 시작한다. 아내가 죽고 혼자 남은 남자는 반복된 일상 중 무엇을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바닷가 산책을 결정한다. 요한네스는 발걸음을 옮기다 오랜 친구를 만난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멍하니 서 있기도 하는 친구, 이상함을 뒤로하고 둘은 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간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요한네스의 낚싯대가 물속으로 잠기지 않는다. 루어는 동동 떠있을 뿐이다. 결국 낚시를 접고 육지로 돌아온다. 요한네스는 앞에 있는 친구가 전에 죽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때부터 소설의 시점이 과거의 현재를 왔다 갔다 한다. 요한네스의 생각과 행동도 인과를 딱히 따지지 않고 내용이 진행된다. 한 여인을 짝사랑했던 젊은 날의 기억,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 죽은 친구를 향한 의심 속 이발을 해주겠다는 약속, 커피를  끓여주는 죽은 아내,  삶의 현재와 과거가 뒤죽박죽 엉키며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는 죽었던 것이다. 친구는 이 사실을 알려주고 저승으로 가자고 말한다. 요한네스의 막내딸은 친부의 죽음을 확인한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 요한네스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막내딸과 남은 다른 가족의 기억에 각인된다.



<탄생과 죽음>

 흰 종이에 점을 하나 찍어보자. 동그란 점은 그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손에 잡힌 펜은 논외의 대상이다.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불가항력적인 힘은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다. 욘 포세는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삶과 죽음을 하나의 점처럼 묘사한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고 하나이며 이어져 있다. 태어남은 돌이켜 보면 알 수 없는 순간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둘은 '거부할 수 없음'과 '무지' 그리고 '없음'이라는 같은 특성을 공유한다. 인간의 삶을 수직선으로 그려보면 시작은 탄생이다. 끝은 죽음이고 중간은 삶의 과정이 된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15p>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탄생은 그 자체로 애매하다. 나의 의지가 아닌 전적으로 그 결정은 부모에게 귀속된다. 나는 '무'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왜 태어나는지, 그 순간도 기억할 수 없다. 태어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것만이 남는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인간에게 지금을, 순간을 의미 있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탄생처럼 죽음도 인간에게는 애매하고 무지의 영역이다. 오직 죽는다는 것만을 인간은 안다. 죽게 되면 육체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정신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경험적인 사실로 육체는 흙과 바람으로 사라진다. 정신은 그저 상상의 영역이다. 자연으로, 무로 돌아가는 것만을 알기에 인간은 초연히 죽음 앞에 덤덤해지는 것을 선택한다. 어차피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소설은 죽음을 담담히 묘사한다. 요한네스가 일어나 죽음을 꺠닫는 과정까지 일체의 부정적인 기운이 없다. 오히려 요한네스는 전과는 다른 가벼움을 느낀다. 즉 죽음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으로 글로써 전달된다.


  


어디로 가는데? 요한네스가 묻는다.

아니 자네는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만, 페테르가 말한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떠한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아픈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곳엔 몸이란 게 없다네, 그러니 아플 것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하지만 영혼은, 영혼은 아프지 않다 말인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우리가 가는 그곳애는 너도 나도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좋은가, 그곳은? 요한네스가 묻는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131p>


 탄생과 죽음, 그리고 삶은 단속적인 걸로 느껴진다. 그 성격들이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삶과 죽음은 점처럼 하나이고 이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네스의 이름은 친부가 자신의 아버지, 다시 말해 할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러한 유럽 작명의 특징으로 소설에 대한 특이한 접근이 가능하다. 2부 요한네스의 죽음은 1부 요한네스의 삶의 결과가 아닌 할아버지 요한네스의 죽음일 수도 있다. 어부의 삶을 이어온 가족은 대를 이어서도 같은 삶의 양식을 공유하고 이름마저 같다. 함부로 같은 요한네스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탄생과 죽음은 하나'라는 의미를 끄집어 내게 만든다.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탄생과 죽음, 그것은 종이 위의 한 점처럼 그 속에서 돌고 돈다. 탄생과 죽음은 하나인 것이다. 욘 포세는 이러한 면을 이름과 소설의 구조로 보여준다. 또한 마침표를 거의 찍지 않는 소설의 전개 방식은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특히 마지막 장에 찍히지 않는 마침표는 소설이 끝이 나지 않고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요한네스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시작으로 되돌아가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소설 속 장치는 '환생'이라는 하나의 은유가 된다.

 수직선 상에 찍혀 있는 탄생과 죽음, 이것은 하나의 직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지적 활동, 창작,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한 격언을 발견할 수 있다. '탄생과 죽음, 즉 삶은 하나이다.'는 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구를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삶은 직선이 아니다. 삶은 원형의 무언가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뗼 수 없는 원형의 머리띠를 매고 살아가는 존재다. 저기, 노동의 현장에서 머리띠를 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삶이란 원형의 머리띠 아래서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탄생과 죽음은 하나다.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면 죽음과 탄생은 모두 시작이 되고 끝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탄생과 죽음은 모두 소중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

 아침이 시작되고 저녁이 온다. 저녁은 새벽으로 하강해 아침으로 날아오른다. 소설의 제목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요한네스는 친구의 머리를 이발하러 갈 때 막내딸 싱어를 본다. 그는 그때의 시간을 아침이라 생각하지만 막내딸이 인지하는 시간은 겨울 저녁이다. 아침에 기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소설의 2부는 실제로는 죽음이라는 마지막이었다. 물론 경계를 나누는 것은 의미 없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처럼 탄생과 죽음, 삶은 서로 이어져 있다. 시간을 인지하는 것도 그저 하나의 글자일 뿐이고 차이는 무의미하다. 작가가 정한 큰 틀에 포함된 하나의 사소함, 그렇지만 결을 달리하지 않는 무언가인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

 탄생과 죽음, 소설은 두 극단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관계'이다. 소설의 1부에서는 태어나는 자식을 위한 부모의 노력과 축복을 통해 그 경건함과 소중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삶을 돌이켜 보며 무엇이 소중했는지, 의미 있던 것은 뭐였는지 알 수 있다. 한평생 어부로 살아온 요한네스, 그러나 그를 어부로 기억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 가장, 아버지, 친구였지 어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어부의 일을 하거나 하는 묘사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러 바다에 거부되는 모습만이 나온다. 어부로서 요한네스는 거부되고 '관계'로 기억되는 요한네스만 남는 것이다.

 요한네스의 회상도 이를 보여준다. 그가 되돌아보는 삶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거나 그 관계를 추억하는 순간들이다. 친구와의 추억, 짝사랑했던 연인,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 죽은 아내 같은 의미 있는 인연을 만난다. 사용되던 흔적을 가지고 남는 사물들과 달리 인간은 그럴 수 없다. 평범한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것은 '기억'이다. 자신의 기억을 정리한 요한네스는 막내딸 싱어에게 자신의 단면을 심는다. 싱어는 요한네스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탄생과 죽음의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이와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지속된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준다면 사람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게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다.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 서로 함께 했던 순간들의 의미와, 사랑, 우정, 결실일 것이다.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나, 그리고 함께하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관계는 삶의 과정이 된다. 탄생, 과정, 죽음이라는 삶, 그리고 순환, 모든 것이 의미가 있겠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을 덜어야 한다면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의 나, 그리고 그 관계를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기억이 되고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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