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의 글빵연구소 제11강 상실과 회복 숙제 + 졸업 작품
“아니오. 잘 몰라요.”
그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살다 보면, 문득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불쑥 떠오르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그것이 내 경험인지, 아니면 내가 본 장면인지 알 수 없는 파편들을 따라 기억 여행을 떠나곤 한다.
신기한 건, 그 순간 나는 마치 전지적 시점에 서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겪은 일인데도, 내 눈을 통해 내 모습까지 본다.
그날의 일도, 나는 어린 나를 등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기억하고 있다.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말조차도 삼켜, 어느 누구도 내 불편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는 박봉의 군인 월급으로 줄줄이 사탕 같은 세 딸을 키우느라 자신의 건강조차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외동아이 하나를 키우는 지금의 나처럼, 아이 하나하나의 감정을 읽어줄 여력이 없으셨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고, 말 잘 듣는 딸로 그렇게 자라려고 애썼다.
엄마 손을 잡고 갔던 2층 미술학원도 그랬다.
내가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도, 그림을 잘 그려서도 아니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두 시간만이라도 엄마에게 그런 자유가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간 미술학원은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짚으신 원장선생님이 운영하시던 곳이었다. 아이들 전용이 아니어서, 아크릴 기름 냄새와 물감냄새가 진동하던 곳이었다.
나무 책상, 나무 이젤, 언니 오빠들이 그리다 만 그림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석고상들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두려움과 어색함을 이겨내려 미술학원 창문 밖을 자주 바라보곤 했다.
사실 나는 말수가 적었지만, 대신 눈과 귀가 열려 있고, 머릿속이 복잡한 아이였다. 내가 견뎌야 할 공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어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에 담았다. 그리고 주변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엄마 손을 잡고 미술학원에 가던 길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술학원에서의 시간은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게 각별히 친절했던 초등학생 오빠도 기억이 난다.
그날, 오빠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마치고, 나랑 우리 집 가서 놀래?”
누군가에게 초대받은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미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주변에서 “놀다 가라”며 부추기는 통에, 얼떨결에 오빠를 따라나섰다.
오빠 집은 어린 내게 생각보다 멀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으며, 나는 두리번두리번 주변 풍경을 익혔다. 오빠는 구름다리 위로 나를 이끌었고, 구름다리에서 처음 본 마을의 모습은 꿈속에서나 보일법한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이끄는 듯했다. 마침 머리 위로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과 골목마다 피어있는 꽃들에 한눈이 팔려, 그만 내가 오가는 길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말았다.
오빠네 집에서 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두 시간 정도가 흐른 후, 저녁 먹을 시간이라며 어린 내게 집에 가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눈치가 빤했던 나는, 가야 할 것 같아 주섬주섬 일어섰다.
“너네 집, 어딘지 알지? 혼자 갈 수 있지?”
오빠네 엄마가 내 눈을 보며 물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소리를 냈어야 했다.
“아니요, 잘 몰라요.”
하지만 그 말은 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게, 나는 낯선 동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길을 잃은 나. 집이 어딘지 모르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으로 가보다가, 오른쪽으로 가보다가. 눈앞이 자꾸 뿌옇게 흐려졌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대신 긴장한 팔다리를 요리조리 흔들며, 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왔던 길을 되짚었다.
‘구름다리만 찾으면 돼.’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나는 구름다리 위에 서 있었고, 안도감에 팔다리의 힘이 빠졌다. 더 이상 걸어갈 자신이 없어, 그곳 난간을 꼭 붙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구름다리 위에서 본 세상은 붉은빛을 띠다 금세 검은 물이 들었다. 꿈속 세계처럼 여겨졌던 그 오빠네 동네도 어둠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 동안 구름다리 난간을 잡고 서 있다, 기억을 더듬으며 학원 가는 길을 다시 찾아 나섰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꼬마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며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겨우 도착한 학원 앞에, 엄마가 서 계셨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셨고, 나도 아무 말 없이 안겼다. 노란빛 가로등 아래서 포근한 엄마 냄새가 났다.
그날 이후 내가 학원을 계속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가, 불현듯 고개를 든다. 구름다리 위에서 세상의 빛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던, 어린 내 뒷모습과 함께.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말수는 적지만, ‘아니요’라고 거절할 결심을 품게 되었다. 다시는 저녁노을이 저물어 가는 뒷모습을 홀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은 "미야의 글빵 연구소" 제11강 숙제인 <상실과 회복의 이야기> 입니다.
또한 졸업 작품으로도 대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