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면, 만들지 뭐.

고등 편

by My Way

아이의 학교 생활은 3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기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그 안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방대하고 속도감 있는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아이는 나름 치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헤매기도 했고, 무엇이 효율적인지 몰라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며, 시간 관리에 서툴러 허둥대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과학고에 대한 외부의 인식과 달리 당시 학교 수업이 생각만큼 위압적이거나 선행을 전제로 한 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셨고, "이 정도는 학원에서 배웠겠지?"라는 분위기도 없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아이도 수업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고, 부족했던 부분은 학교에서 조금씩 보완해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이 이미 여러 번 접해 본 공식과 용어를 혼자만 낯설게 느낄 때도 있었고, 자신은 시간을 들여 푸는 문제를 친구들은 경험 덕분에 빠르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부족함을 체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결정적인 격차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수업 전에 교과서를 잠깐이라도 미리 훑어보면 따라갈 수 있는 차이라고 여겼고, 선생님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 읽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선택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하루치의 수업이 끝나면 복습해야 할 분량이 상당했습니다. 가끔은 수업시간에는 분명 이해했던 내용인데, 막상 혼자 정리하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막히는 부분이 생겼던 것도 같습니다. 그럴 때는 표시해 두었다가 다음 날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했고, 선생님들께서는 언제나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과정 덕분에 아이는 학교 공부에 대한 신뢰를 쌓아 갔습니다.


수업이 이해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해서 평가까지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난도는 분명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프로젝트 수업, 토론식 수업, 발표 수업 등 다양한 방식의 수업에 적응해 가며 아이는 비교적 즐겁게 학교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채워 나갔습니다. 그 방법이 늘 정답이었을 리는 없지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견뎌 낸 아이가, 저는 꽤 대견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공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학교 생활은 제법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학생 엄마들 사이에서는 "과학고에 보낸 건지, 체육고에 보낸 건지 모르겠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운동량이 많았습니다. 제 아이 역시 공부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었는지, 체력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틈틈이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고, 배드민턴을 쳤습니다.


교우 관계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반에 20명 정도가 배정되다 보니 반 친구들과 두루 어울릴 수 있었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많다 보니 대화의 깊이도 자연스러웠고, 일정 수준 이상의 아이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팀프로젝트나 토론식 수업에서도 큰 갈등이 없었습니다. 정규 수업 외 자율학습 시간에는 학년 전체가 한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했고, 기숙사 룸메이트도 분기마다 바뀌어 1학년 80명 전체가 자연스럽게 서로 알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 밖에 동아리 활동, 학교 뒷산 소풍, 선후배를 이어주는 행사, 체육 대회와 축제 등은 힘든 학교생활 속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동아리 활동은 아이에게 조금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뇌과학과 뇌공학에 관심을 두던 아이는 고등학교에 올라와 AI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학기 초 동아리 모집이 시작되자마자 코딩(프로그래밍) 동아리에 지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혼자 공부하던 완전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에 동아리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물어보니, 동아리 지원을 스스로 취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 동아리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선발 기준이 춤이라고 해서 포기했어요."

"코딩 동아리에서 웬 춤?"

"그러니까요. 코딩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지만, 실력이 아닌 춤으로 뽑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동아리 선발 기준이 '춤'이었던 건, 아마도 아이들 간의 호흡을 보려는 취지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력이 부족해 탈락을 걱정하던 아이가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라고 판단하자 미련 없이 돌아선 것은 의외였습니다. 그만큼 동아리 활동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일이 아이에게는 작은 좌절로 남았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동아리 활동에 대한 마음도 접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훌쩍 지난 뒤, 아이가 스스로 코딩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AI 학습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1학년 1학기부터 관련 과목이 편성되어 있고, 시수도 적지 않게 배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2학년 1학기에 '정보' 과목이 처음 편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2학년 진입 전 겨울방학 동안 정보 과목 '선행'을 했습니다.

저 역시 학부모 모임을 통해 '정보'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어떻게 아이를 도와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 엄마들이 "OO이도 같이 들을래요?"라며 코딩 그룹 수업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저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 아이에게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이가 자율동아리를 만들어 1년간 운영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아이의 실력이 이미 정보 수업을 충분히 따라갈 만큼 성장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코딩 초보였으면서 어떻게 동아리를 만들었어?"


아이는 코딩 동아리를 스스로 포기한 후, '안 되면, 만들지 뭐.'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코딩을 정말 잘하는 친구를 찾아가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그 친구를 중심으로 스터디 형태의 동아리를 구성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특정 친구에게 부담이 쏠리지 않도록 자신도 꾸준히 공부하며 동아리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고, 무엇보다 동아리 부원 모두가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도록 운영 방향을 고민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1년간의 자율 동아리 활동은 아이에게 코딩 실력 이상의 것을 남겨 주었습니다. 리더로서의 책임감과 협업의 경험, 그리고 스스로 배움을 확장해 가는 힘이었습니다.

덕분에 2학년 1학기의 정보 수업은 아이에게 부담이 아니라 여유가 되었습니다. 성적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시험과 과제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어 다른 과목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자율 동아리 개설이 처음부터 정보 수업을 염두에 둔 계획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좋아하는 분야를 더 깊이 배우고 싶었고, 뛰어난 친구들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해 간 결과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이런 형태의 자율동아리는 과학고가 아니더라도 학교에 따라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다만, 아이가 속한 과학고라는 환경각자의 역량을 갖춘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과정이 조금 더 탄탄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환경 속으로 먼저 걸어 들어간 것은 분명 제 아이였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쉰다섯 번째 고슴도치 시선] 과학고에는 조기졸업제도가 있습니다. 조기졸업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이지만, 예외적으로 지능지수(IQ)와 관련된 규정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6개월 이상의 간격을 두고, 공인된 상담(검사) 자격을 가진 전문가가 실시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표준화된 지능검사에서 IQ 145 이상을 받으면 조기졸업 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단체 지능검사를 한차례 실시합니다. 이 검사에서 145 이상이 나오면, 6개월 뒤 개별검사를 한 번 더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1학년 아이들이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받아 들던 날은 마침 금요일이었습니다.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기다리던 엄마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IQ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저 역시 아이의 점수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145를 넘긴 아이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제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는 검사지를 받아 들고는 문제 풀이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아이의 점수보다 제게 더 오래 남은 것은 "왜 이걸 해야 하지?", "왜 문제를 그런 식으로 내는 걸까?"라는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과학고에서 중요한 것은 IQ 점수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과학고 첫 중간고사가 남긴 것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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