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편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에도 1학년들의 분위기는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잡초가 무성하던 운동장은 점심과 저녁 시간이 되면 다시 아이들로 가득 찼고, 시험 결과가 나온 뒤에도 웃음과 수다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예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선생님들은 신기해했지만, 그 변함없는 활기는 예민해진 2, 3학년 선배들을 자극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엄마들 사이에서는 1학년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아이들이 어느새 세 부류로 나뉘는 듯했습니다. 조기졸업(이하 조졸)과 상급학교 조기진학(이하 조입)이 가능해 보이는 아이, 조입과 3학년 진학 사이의 경계에 선 아이, 그리고 3학년 진학이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여겨지는 아이. 이제 중간고사 성적 하나가 나왔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학원가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문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는 그런 기류와 별개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 각종 행사들이 이어져 분주하게 돌아갔습니다.
학년 구분 없이 반 별로 한 팀을 이루는 체육대회가 열렸고, 다음 기수를 위한 입학설명회도 진행되었습니다. 1학년 학생들이 강사로 참여해 인근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창의적 과학 체험교실'이 주말에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은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수행평가와 기말고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중간고사 성적이 조입과 3학년 진학의 경계에 놓인 아이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이 역시 성적을 조금 더 끌어올려 조졸이든 조입이든 안정권에 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름의 속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듯했습니다.
아이 아빠는 아이의 중간고사 결과를 대견해하면서도 몇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후 아이가 과학고 생활을 버텨내는 데 분명한 기준이 되어 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비단 과학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입을 준비하는 모든 고등학생에게 필요한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과학고에서 살아남는 조건'이라 적지만, 사실은 어느 학교에서든 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는 체력관리였습니다.
제 아이는 중학교 3학년 때 HLH(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를 진단받았고, 이후 꾸준히 추적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아이의 건강'은 늘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과학고 입학 후 학기 초반, 낯선 환경과 과중한 학업 부담 때문이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로 응급실을 찾는 일이 몇 차례 있었고, 몸살과 인후염, 감기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아이 아빠는 무엇보다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잠을 줄여 공부하는 방식은 오래 버틸 수 없으니, 틈틈이 운동을 하며 기본 체력을 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한번 잃어 본 경험이 있었던 아이 역시 그 말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점심이나 저녁 시간마다 운동장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흥미롭게도, 일반고였다면 평범했을 운동 실력이 과학고에서는 제법 잘하는 축에 속했던 모양입니다. 아이는 친구들과 축구와 농구, 배드민턴을 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운동은 체력뿐 아니라 교우관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이었는지, 우려했던 재발은 없었고, 건강 상태도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고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국 성적이 아니라 몸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시간관리였습니다.
중간고사 이전까지 아이의 하루는 비교적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을 '해내고'(과학고에서는 이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잠시 운동을 한 뒤 저녁을 먹고 자율학습을 했습니다. 1차 자율학습 때는 과제를, 2차 때는 그날 배운 내용, 특히 수학을 중심으로 복습을 했습니다. 물론, 과제가 몰리는 날에는 계획이 흐트러지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으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중간고사 준비기간부터였습니다. 시험 범위와 상관없이 진도는 계속 나갔고, 수행평가까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해야 할 일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대로인데, 감당해야 할 분량은 쌓여만 같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같은 시간 안에서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아빠는 방대한 학습량을 소화하려면 지금의 방식을 조금은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만 해내는 양은 다를 거야. 그 차이는 결국 시간 관리에서 생기는데, 너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잠을 줄이려고 하지는 말고, 깨어 있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게 좋겠다. 지금 방법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지만, 다른 친구들의 방식을 살펴보면서 너만의 방식으로 바꿔보는 것도 필요해 보이네."
그날 이후, 아이는 친구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관찰하고, 공부법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자신의 방식을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멀어졌던 기록 습관을 다시 꺼내 든 일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라 금세 제자리를 찾았고,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나누어 적으며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어떤 날은 하루 일정이 두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반성과 다짐, 스스로를 격려하는 문장까지 덧붙이며 계획을 끝까지 밀고 가려는 흔적이 또렷했습니다.
공부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문제집을 어디까지 풀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후에는 한 단원을 마칠 때마다 A4 한 장에 핵심 개념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른바 '마인드맵'을 활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과연 도움이 될지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개념을 구조화해 보면서 자신이 정확히 이해한 부분과 막히는 부분을 훨씬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부하고 이해한 내용을,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며 집에 설치해 두었던 칠판 앞에 서서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듯 말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이해의 깊이가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공부량이 크게 늘거나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집중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과학고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시간관리는, 더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르게 쓰는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멘탈 관리였습니다.
"혹시, 학원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니?"
학기 초, 친구들이 주말마다 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 수업이 이해되지 않으면 학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수업은 이해가 되니까,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것보다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걸 제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좀 느리더라도 혼자 공부하는 게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의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이 아빠는 공부 방식과는 별개로, 멘탈을 따로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습니다.
"이번 중간고사 결과가 기대이상이라 기쁘지만, 더 중요한 건 평정심을 잃지 않는 거다. 분명 성적 때문에 흔들리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네 성적이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네 계획과 목표에 맞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아이 아빠가 아이에게 당부한 '멘탈 관리'는 단지 흔들리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혹여 무너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 중심을 잡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힘, 곧 회복탄력성까지 포함한 말이었습니다.
2년간 아이의 과학고 생활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과학고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체력과 시간, 그리고 멘탈을 스스로 관리하지 못하면 오래 버티기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쉰여덟 번째 고슴도치 시선] 학기 초,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를 과학고에 보낸 건지, 체육고에 보낸 건지 모르겠다"는 농담이 오갔습니다. 저 역시 아이의 학교생활이 생각보다 운동으로 많이 채워져 있어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혹시 운동에 힘을 너무 쓰는 건 아닐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반 모임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OO이가 그렇게 운동을 잘한다면서요?"
"OO이가요?"
"축구도 농구도 잘하지만, 배드민턴은 적수가 없다던데요?"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수업으로 배드민턴을 오래 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본기가 탄탄한 편이었고, 그 덕분에 1학년으로는 처음 학교 대표로 선발되어 지역 고교 배드민턴 대회에 선배들과 함께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축구와 농구까지 잘한다는 이야기는 저도 그날 처음 들었습니다. 아마도 과학고 안에서는 운동을 잘하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잘하는 축에 든다고 하니 괜히 어깨가 조금 으쓱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학고에서의 운동은 단순한 취미라기보다 치열한 공부 속에서 숨을 고르게 해주는 시간, 다시 책상으로 돌아갈 힘을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제 아이는 공부만이 아니라 운동으로도 자기 몫을 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학원 공포마케팅의 진실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