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편
중간고사가 끝난 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던 1학년의 분위기가 내부에서부터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멘탈이 무너진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전학을 결정했다는 아이, 전학을 고민하고 있다는 아이들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아이가 다닌 학교에서는 중도 포기하는 학생 수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보통은 중간고사 이후 전학을 택하는 아이가 한두 명 정도에 그친다고 들었는데, 저희 기수에서는 네다섯 명이 중도 포기를 선언했고 그 여파는 웬만해서는 변화가 없던 2학년에까지 퍼지며 작은 균열을 남겼습니다.
학교 입장에서도 중도 포기자가 많다는 것은 난처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남는 상처였습니다.
과학고에서의 중도 포기는 아이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부모의 현실적인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즉, "과학고에서 계속 공부하면 내신으로 좋은 대학을 가기 어렵다."라는 판단 끝에 내려지는 선택인데, 그런 경우 아이들은 자신이 '실패했다'라고 느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과학고에서 전학을 고려하는 학생에게는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혜택을 제안하며 편입을 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고에서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우수 인재반이나 서울대반, 의대반 같은 특별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과학고에 합격했던 학생'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학업 역량을 인정받으며 학교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학고 첫 중간고사로 크게 흔들렸던 멘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실제로 전학을 간 아이들이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인서울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도 적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성향과 멘탈을 충분히 고려해 전학을 선택하는 것 또한 반드시 나쁜 결정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결정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아이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아이의 과학고 중도 포기를 결심하지 못하고 결국 3학년까지 보내게 된 부모들 중에는, 3년 내내 "아이를 중도 포기 시켰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한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간혹, "일반고에 갔더라면 더 잘했을 텐데, 과학고에 와서 꼴찌를 한다."며 후회하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물론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우리 OO이는 공부 빼고 학교가 너무 좋다네요. 그래서 '중도 포기'하자는 말을 못 했어요."
"이왕 하위권으로 자리 잡은 거 나중에 장사나 시키지 뭐. 그러려면 똑똑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것도 큰 자산이니 학교 생활을 즐기라고 했어요."
이처럼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중도 포기'를 고민하는 경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과학고 진학이 아이의 성향을 충분히 고려한 선택이기보다는, 중학교 시절 우수한 성적 때문에 선생님의 권유로 지원했고 결국 합격하게 된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분위기가 변한 것은 학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과학고반을 운영하는 학원들 역시 적지 않은 수강생 변화를 겪는 듯했습니다. 아이가 학원을 다니지 않다 보니 그런 변화를 직접 겪지는 못했고, 학부모 모임을 통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제 눈에는 그 광경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과학고 첫 중간고사에서 1등과 2등을 한 아이가 하필 같은 학원 출신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 소문이 돌자마자 아이들은 기존에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1등과 2등이 다니던 학원으로 옮겨 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수학, 물리, 화학, 국어 등 과목별로 학원을 다르게 선택해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중간고사 결과에 따라 학원을 바꾸는 일 자체가 특별한 변화는 아닌 듯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인기를 끌었던 학원이 과학고 입학과 내신을 위한 명문 학원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아이들의 성적을 가르는 것은 학원 수업이 아니라 결국 자기주도학습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는 그렇게 바뀐 학원 지형도의 영향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학원에서 가장 많이 하는 공포마케팅 단골 문구, "중간고사 성적이 과학고 3년을 좌우한다.",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라는 말이 과연 사실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말고사 성적은 따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중간고사와 수행평가, 그리고 기말고사 성적이 합쳐진 1학년 1학기 전체 성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최상위권의 성적에는 큰 변동이 없었지만, 상급학교 조기입학(이하 조입)과 3학년 진급 사이의 경계에 있던 학생들의 약진으로 최종 등수에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원의 공포 마케팅 단골 레퍼토리였던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과학고를 포함해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첫 중간고사 성적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3년의 성적을 좌우한다거나, 한번 정해진 등수는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 말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한번 고착된 성적을 바꾸는 것은 어디에서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등수를 끌어올리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제 아이 역시 과학고 전체 성적을 놓고 보면 완만한 우상향을 보였습니다. 결국 중간고사 성적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준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3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부하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등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험에도 나름의 균형이 있었습니다. 중간고사에서 유난히 어려웠던 과목은 기말고사에서 다소 쉽게 출제되는 등 전체적인 난이도를 맞추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수 변화가 가장 크게 나타난 구간은 조입과 3학년 진급 사이의 경계에 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제 아이 역시 그 경계선 근처에서 안정권에 들어가기 위해 물밑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1학년 1학기 전체 성적이 꽤 많이 올라, 아이가 원하던 조입 안정권에 들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과별로 상위 5% 학생에게만 주어진다는 교과 우수상도 한 과목 받아오면서 2학기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붙은 듯했습니다.
이제는 반드시 2학년 졸업을 해 보겠다며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아이를 보면서, 저희는 아이가 과학고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어쩌면 아이의 말처럼 2년 만에 과학고를 졸업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품게 되었습니다.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2주간의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아이에게는 쉰다기보다 재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과학고만의 특색 있는 수업인 '심화' 수업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아이에게 작은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학년 1학기 성적이 기대 이상으로 나온 것은 분명 아이가 한 학기 동안 힘들게 공부한 노력의 대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해볼 만 한데?'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안일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노력으로 얻어낸 1학년 1학기 성적은 어느 순간 독이 든 성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쉰아홉 번째 고슴도치 시선] 시험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수학 선생님께서 아이와 친구 한 명을 교무실로 부르셨습니다. 아이도 마침 배점이 꽤 높은 서술형 문제의 풀이 과정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 여쭤보려던 참이어서 교무실로 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문제, 왜 이렇게 푼 거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1학년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답을 적어냈는데, 딱 두 명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문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풀이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해서 아이들을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적어낸 풀이 과정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셨고,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라고 판단해 정답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다만 제 아이는 전제와 조건까지 모두 정리한 풀이 과정을 적어 점수를 모두 받았고, 친구는 일부 설명이 빠져 약간의 감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과학고 선생님들의 수업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풀이 방법만을 정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풀이도 충분히 검토하고 인정해 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아이는 모범답안에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성향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성향을 선생님들께서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기에 아이도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아이의 성향이 정해진 방식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는 쪽이라면, 과학고라는 환경이 아이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학교생활이겠지만, 그런 시도를 존중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이야기] 독이 든 성배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