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편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자, 1학기와는 전혀 다른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반고의 1학년 과정을 한 학기 만에 끝내버린 과학고에서는 2학기부터 물리학 II, 화학 II, 고급 지구과학, 고급 생명과학 등 일반고의 고2, 고3 수준을 넘나드는 수업이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교육 없이 자기주도학습으로 공부하던 아이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주어졌습니다. 더 이상 시중에서 과학고 1학년 2학기 수업에 도움이 될만한 기출문제집이나 EBS 교육방송 자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결국 학교 수업과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수업에 의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불안할 것 같다는 제 걱정과 달리, 아이는 그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태도로, 혼자서 공부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지와 행동 사이에 조금씩 괴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사실 알 길이 없으니, 제가 볼 수 있는 것은 주말에 집에 돌아온 아이의 모습뿐이었는데, 그 모습은 분명 1학기 때와 달랐습니다.
왠지 집중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중간고사 때까지는 거의 관심이 없던 '휴대폰'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의지는 불타오르는데 실행이 따라오지 않는 것 같은 모습.
공부와는 별개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모습.
갑자기 사춘기라도 시작된 것처럼, 인생에 대해 지나치게 깊이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
저는 주말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알아서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할 거예요."
솔직히 그 반응이 많이 섭섭했습니다. 잔소리를 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저 대화를 해보려 했을 뿐인데, 아예 대화의 창구를 닫아버리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변 선배 엄마들로부터 "고등학교 때 오는 사춘기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왔던 터라, '이 중요한 시기에 설마 사춘기가 시작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여기에 아이가 흔들릴만한 한 가지 요인이 더 있었습니다. 아이가 과학고에 입학하고 난 뒤 가장 기대하고 있던 큰 이벤트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고에서는 '이공계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열흘 안팎의 일정으로 해외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미래 진로 캠프, 세계 우수 이공계 대학 탐방, 해외 이공계체험 등 학교마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이후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학생들 가운데는 이 세계 탐방 프로그램 때문에 과학고에 입학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제 아이가 아이스크림 자판기 때문에 과학고 입학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던 것(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 3편 09화 참조)처럼 말입니다.
탐방 일정이 가까워질수록 아이 역시 그 프로그램에 점점 더 마음을 빼앗기는 듯했습니다.
1학년 2학기 수업은 난도는 더 높아지고 진도는 더 빨라졌지만, 공부할 수 있는 자료와 환경은 오히려 더 제한적이어서 1학기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어느새 익숙해진 학교생활 속에서 공부보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황은 중간고사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러면 안 될 텐데...'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주말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속만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 아빠가 아이의 상태가 어딘가 어수선해 보였는지 날을 잡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아이 아빠는 저와 달리 잔소리와 조언을 엄격히 구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편이라, 정말 아이가 필요로 할 때가 아니면 쉽게 말을 꺼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아마도 아이의 모습에서 그 기준을 무너뜨릴 만큼의 이상 기류를 느낀 것 같았습니다.
슬그머니 아이의 공부방에 들어가는 아이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혹시 한창 예민해져 있는 아이를 혼내는 것은 아닐까 싶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아이 아빠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OO이의 목표가 조졸(조기졸업)이었나, 조입(상급학교 조기입학)이었나?"
아이 아빠는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아이의 목표지향적인 성향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말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1학년 1학기 성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잘 나오자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힘든 과학고를 빨리 벗어나는 길은 조졸이나, 조입뿐!"
그때 아이 아빠는 그저 대견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볼 뿐, 더 자세히 묻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그 순간, 아이가 했던 말을 다시 꺼내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래서 지금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 지를 조용히 상기시키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평소에 잔소리를 하지 않던 아빠의 말이라서 그런지, 그날만큼은 아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곧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했습니다.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행동은 쉽게 따라오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바로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는 과학고 입학 이후 가장 좋지 않은 준비 상태로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1학기 성적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과학고에 입학해 처음 중간고사를 치렀을 때는 성적이 너무 낮게 나와 좌절할까 봐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적이 예상보다 잘 나오자,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스스로의 공부법에 자신이 생겼고, "이 정도 하면 이 정도 성적은 나오겠지"라는 나름의 기준도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자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평소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 나온다고 생각했던 국어 성적이 크게 떨어진 것을 보고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이 학교에서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좋은 점수와 등수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완전히 만회할 수 없는 수준의 성적은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수행평가와 기말고사에서 최대한 성적을 끌어올린다면, 1학기만큼은 아니더라도 턱걸이로 조입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 성적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등수 판도가 다시 한번 크게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적이 크게 오른 몇몇 친구들 뒤에 '전 과목 과외 중'이라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을 보며 사교육이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꽤 의기소침한 상태로 성적을 받아들였습니다.
저희는 그 결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험 전에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조언은 이미 건넸고, 공부는 결국 아이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제는 바닥까지 떨어진 멘탈을 아이 스스로 주워 담을 때까지 그저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아이는 며칠 동안 생각에 잠긴 듯 지내더니, 이내 조금씩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는 학교에서 마련한 ‘세계 우수 이공계 탐방학습’을 떠났습니다.
[예순 번째 고슴도치 시선] 1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국어 성적이 조금 미끄러지긴 했지만, 아이의 학창 시절을 통틀어 국어는 비교적 수월한 과목이었습니다. 물론 문학 작품의 해석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방식에는 종종 반발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사교육 없이도 쓰고 말하는 능력은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런 능력은 어릴 때부터 이어진 독서 습관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글을 읽지 못하던 시절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 주었고,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한 뒤에는 다독보다는 정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했습니다. 논술학원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읽는 학습만화를 함께 읽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아이 아빠는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발표하듯 정리해 보도록 하며 자연스럽게 말하기 습관을 길러 주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대학 입시 과정에서도 의외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카이스트와 같은 이공계 특성화 대학에서는 수학과 과학뿐 아니라 국어와 영어 과목도 일정 부분 비중 있게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이의 국어 실력도 나름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또한 과학고 생활이 바쁜 와중에도 아이는 꾸준히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 입시에 필요한 독서도 했지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책을 읽기도 했고, 뇌과학, 뇌공학, 인공지능처럼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책들도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말센스(2019)', '논리로 속이는 법 속지 않는 법(2007)',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2017)'처럼 '말'과 관련된 책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 책은 공부를 위한 도구라기보다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과학고 밖의 세상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