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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Mar 22. 2020

미스 아메리카나

팝스타가 전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

  매스컴을 통해 얼굴을 알리는 스타들의 대외적인 수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떤 모습과 태도를 취해야 시장에서 더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얼마 없는 지식으로 유추한 답은 이렇다.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흐름의 파도에 발 빠르게 합류하되, 다만 그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아야 할 것.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변수와 이슈가 넘실대는, 취향의 파랑 속에서 스타들은 끊임없이 헤엄쳐야 한다. 금방이라도 생존의 발길질을 멈추는 순간에는 이미 가라앉고 있을 테니 말이다.

모든 것들을 제쳐놓고 단순히 장기적인 연명을 위한 명목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 답은 더없이 간단할 것이다. 모두가 환영할 만한 사람이 되면 끝나는 일이다. 절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그들이 원하는 스타일을 그들의 입맛에 맞게 선보이면 된다. 본인이 갈구하는 예술적 성취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볼 일이다(오래도록 연명하기 위한 길을 택했으면 당연히 그 정도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지!). 반항적이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는 편보다는, 대중과 관계자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으며 얌전히 앉아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가늘고 긴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틀린 생각일까? 인식의 차이일 테니 그릇된 생각이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절대 해답이 될 수 없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크는 것이 스타의 숙명임을 우리는 알지만, 대중의 사랑이 언제나 스타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우린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지와 사랑은 때로는 무척 폭력적인 얼굴을 띠기도 해서, 그들이 선망하는 아이돌의 건강한(sound) 모습마저 잃게 하기도 한다. 대중이 원하는 방향의 행보를 보이지 않을 때, 그 열렬한 마음들은 순간 모나게 표출된다.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다수가 던지는 거듭된 힐난은 아티스트에게 조금씩 하지만 깊은 생채기를 낼 것이다. 그러면 비극은 어느새 우리 눈앞에 도착해있겠지.

특히 "여성 연예인"이라는 직업군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런 고민에 있어 더욱 취약한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질투에서 출발한 편견이 만든 잣대는 그들에게 더욱 잔혹히 적용된다. 그 출처 없는 모함으로 우리는 얼마 전 두 명의 여성 연예인을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그렇지 못한다면 끝없는 악플과 질타만이 그들을 잠식할 것이다. 이런 비극은 겪을 때마다 점점 더 크고 아프게 다가와서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Miss Americana)의 공개는 꽤나 반가운 등장이었다. 이 시대의 컨트리 싱어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가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며 겪었던 어떤 성장통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동안의 모습과는 다른 악녀의 이미지에 기대어 냈던 전작과는 달리, 사랑과 연대에 대해 다룬 그녀의 7집 정규앨범 <Lover>를 준비하고 어두운 에너지에서 벗어나는 모습들을 볼수록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이 짙어져 갔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들을 나는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녀가 여성 뮤지션으로서 그간 요구되어온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온당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깨닫는 모습들을 포착한다. '소녀라면 응당 웃으며 언제나 감사를 표해야 하고,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말이다. “컨트리 음악을 하는 아메리카의 어린 가수”라는 이미지로 마케팅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온 그녀로서는 쉽게 타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진정 본인이 원했던 시간들을 가지면서 변화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눈이 부시다.

또 남들이 바라는 이미지를 충족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일인지를 마침내 깨달을 때. 아픈 것보다는 뚱뚱한 게 낫다고 얘기하며, 44 사이즈보다는 66 사이즈를 입는 것을 택할 때. 그 또렷한 주장을 전하는 음성은 그녀가 쉬이 함락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표출하는 그녀가 주도하는 여성의 연대는 어떤 희망의 시작처럼 비친다. 미디어가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난 그녀가 마침내 자신을 옥죄고 있던 것들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을 때, 창문에 걸터앉아 깜깜했던 그 시간들을 찬찬히 얘기하는 그녀는 다시금 빛을 내기 시작한다. 사랑으로 일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다.

그런 사회적인 이슈를 차치하더라도, 정말 오랜만에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팝스타에 대해 열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팬심이 살아나는 기분이 드는데, 그 쾌감은 생각보다 컸다. 돌고 돌아 다시 그녀의 음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중학생일 적에 질리도록 들었던 그녀의 3집과 4집을 슬쩍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궁금증이 전부 해소되어 마냥 시원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아쉬움이 컸던 지점은, 그녀가 겪어온 “미디어가 여성 스타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고발하는 점에 치중한 탓인지 그녀 스스로가 본인의 커리어에 찍은 어떤 오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피해 가고 싶은 과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핌에 있어, 칸예 웨스트-킴 카다시안 부부와의 악연은 무척이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물론 케이티 페리와의 불화도 한몫했겠지만...). 킴 카다시안의 녹취를 통해 테일러가 결정적으로 뱀(snake)의 이미지로 낙인찍히고 난 후, 테일러는 자신의 약점을 활용하여 6집 <reputation>에서 “예전의 테일러(Old Taylor)는 더 이상 없다”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6집의 음악적인 시도들에 있어 리스너들에게 충분히 새롭게 다가간 지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은 건 오히려 큰 아쉬움을 남긴다. 몇몇의 사실들과 주장, 그리고 그녀만의 호소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편집하고, 아티스트가 일으킨 논란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전개의 다큐멘터리가 과연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분명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지점들을 간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 아메리카나>라는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들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최근에는 영향력 있는 여성 아티스트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여성의 인권을 대변하는 스타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 기류 속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컨트리 싱어송라이터인 테일러 스위프트 역시 지지를 보낸다는 점에 있어 팝 스타가 전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젠더적인 문제에서 더 나아가, 그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모습들, 그녀를 여전히 미숙한 소녀로 대하는 많은 이들에 대한 일갈은 그녀가 강단 있는 마음으로 개진하는 의견과 생각들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된다. 앞으로도 그녀가 부르고 말하는 순간들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모두를 감싸는 그녀의 목소리와 노랫말이 또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지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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