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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Dec 10. 2020

위플래쉬

사랑의 매에 사랑은 없다.

  어느 3월의 인천, 홀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며 정규교육으로의 첫걸음을 뗀 아이가 있다. 유치원을 갓 졸업한 여덟 살의 섬부다. 입학하기 얼마 전 이사를 마친 터라 동네에 적응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다. 그가 학교에서 이름을 아는 이는 동상으로 서있는 이순신 장군밖에 없었지만, 일단 빠른 속도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섬부였다. 그렇게 학교와 연을 맺은 삶이 십여년이라는 시간동안 끈질기게 이어질 줄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이제 그 기억은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며 옅어졌지만 어떤 장면은 유독 선연히 남는다. 담임을 맡았던 서 선생님이 나무 막대기를 항상 품에 끼우고 다니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구두주걱보단 굵고 죽비보단 가늘었으며, 효자손보다는 짧은 길이의 막대기였다. 넓적한 막대기에 궁서체로 “사랑의 매”라는 글씨가 아주 근엄한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스물일곱 명이 한데 모인 첫 날, 서 선생님은 그 검은 획들이 잘 보이도록 높이 들며, 혹시나 잘못을 하게 된다면 그 막대기로 벌을 내릴 것을 약속하셨다.

서 선생님은 사려깊은 편이셔서 그 매를 자주 이용하진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위협을 줄 때 매를 손에 쥐셨고 가끔은 그걸로 따끔히 때리곤 하셨다. 매번 움츠러드는 아이들의 손바닥에 매를 슬슬 문대면서, 쫙 펴지 않으면 다칠 것이라 얘기하고 그 틈에 짝! 그 무렵의 아이들은 매를 맞는 경험이 거의 없던 터라 대부분 눈물을 찔끔 흘리고 종종 큰소리로 울곤 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맞는 노하우를 터득하게 된 아이들은 이젠 처음 맞았던 사랑의 매의 따끔함에 대해선 귀여웠다는 듯이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아이들이 맞고 울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초등학교 1학년의 섬부는 사랑의 매가 가진 모호함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이른다. 회초리로 다스리는 가풍 안에서 자라진 않았기에 유독 사랑과 폭력이 동일시되는 기묘함에 자주 의문을 갖던 여덟 살이었다. 그러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많은 단어들을 등식처럼 대입시켜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사랑은 여전히 어렵지만 말이다. 그렇게 폭력이 사랑의 이름으로 용인되던 시대는 흘러갔다. 학대와 관련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인권에 대한 담론이 점점 커가면서 사랑의 매는 구시대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랑의 매에 사랑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시대에서 <위플래쉬>를 관람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무척 가혹한 경험일 것이다. 완벽함을 위해 끝없이 캐릭터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밴드마스터인 플레처의 재즈 밴드에서 드럼을 치기 위해 앤드류는 동료 드러머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 플레처가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는 온몸을 바쳐 노력한다. 이러한 성취 그 자체만 본다면 극복과 성장의 서사로 충분히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영화의 윤리적인 지점들과도 연결될 수 있다.


  앤드류는 무결한 연주를 해내기 위해 자신의 사랑과 일상, 나아가 자신의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드럼을 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플레처 앞에선 언제나 물거품이 된다.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밴드 안에서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앤드류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털어놓았던 콤플렉스를 비난당하면서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이른다. 몸과 마음을 해쳐가며 노력으로 일궈낸 결과에 플레처가 만족할 리는 전혀 없다. 그렇게 시스템에서 퇴출되는 건, 쉽게 예상하듯이, 앤드류다.

더 놀라운 건, 둘이 무대에서 다시 만났을 때다. 플레처는 앤드류의 증언으로 자신이 학교에서 퇴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복수로 그에게 없는 악보의 곡을 연주하게 한다. 당연히 그 결과는 처참하다. 플레처는 앤드류가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통보하지만, 앤드류는 무대 위로 다시 올라와 자신이 피흘려가며 연습했던 곡들을 연주하며 플레처에게 앙갚음한다. 분노와 광기로 채워진 그의 연주는 끝내 완벽한 템포로 맞아들어가고, 영화는 만족한 플레처와 앤드류의 모습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음악인 “위플래쉬”가 등장하면서 스물넷의 섬부는 그 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마지막 공연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좇던 완벽함에 다다랐기 때문에, 둘은 오래도록 사랑과 평화 안에서 행복했을까? 앤드류는 자신에게 꽂혔던 모든 혹독한 말과 행위들에 대한 분노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긴 힘들다. 둘은 다시 또다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아주 폭력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세력다툼을 하며 서로를 착취해나갈 것이다. 향상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증오와 파멸이라는 길을 걷게 될 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심벌즈와 스네어 드럼에 튀어버린 피와 땀은 차게 식어가겠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다. 정해진 음악을 완벽한 템포에 맞춰 연주하는 일이 그들에겐 어떤 상실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장과 한계의 극복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학대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일은 아무래도 구시대적인 가치관일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행해지고 있을 가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성취의 척도가 수치화를 통해 객관적으로 구분될 수 없는 예술계에서는 누군가를 끝없이 쥐어짜내는 일이 아직도 만연할 것이다. 최상의 결과물을 위해 착취와 폭력이 합리화되어 행해지는 사실을 우리는 수많은 비극적인 뉴스들을 통해 이따금 깨닫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은 어쩌면 “사랑의 매”로부터 비롯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게 아닐까. 사랑의 매에 사랑은 없고, 오직 매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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