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마주하는 순간
영화는 관객들의 미세한 기억에 틈입하는, 아주 영리한 매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비슷한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내 어느새 감독의 생각과 같은 결의 마음을 갖게 한다. 많은 관객들의 마음에 파고들수록, 영화는 더욱 깊고 풍성해지며 넓은 스펙트럼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기에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들은 보편적이면서도 어쩌면 생소한 감정에 대해 다루며 등장인물의 성장을 도모한다. 성장하는 대부분의 순간은 마냥 흘러갔다는 말보다 통과하는 의식처럼 비친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지 않은 내 유년시절 속에도 그렇게 감내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소화되지 않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순간을 경험하는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치르는 의례의 시간들은 너무 일찍 찾아와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알게 하기도 하고, 아주 늦은 때에 도착해 우리를 흔들기도 한다. 그 터널과도 같은 시간을 마침내 마주하는, 미묘한 순간을 담은 영화들이 있다. 1994년의 사회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중학생의 시선을 담은 ⟨벌새⟩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각자만의 사연이 담긴 사건들을 통해 한층 깊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며 성장하게 되는, 어쩌면 우리도 한 번쯤은 통과했을 그 의식 같은 시간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영화다.
⟨벌새⟩의 은희가 사는 1994년은 격동의 한 해다. 김일성이 죽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그 해. 하지만 그것들은 은희와는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대치동의 한 중학생인 은희를 둘러싼 것들만이 그녀의 관심사이자 세계다.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말이다. 친하지만 어떨 때는 가장 미운 친구 지숙, 서울대를 외치는 선생님, 갑자기 마음을 고백했다가 토라져버린 유리,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전부 망쳐버린 그의 어머니. 그렇다고 은희의 가족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피를 흘리며 싸웠지만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듯 텔레비전을 보는 부모님, 화가 나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언니.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한문 학원에서 영지 선생님을 만난 후 그녀의 삶은 상식적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헤아려주는 영지와의 시간 속에서 은희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얻는다. 단순히 조언을 구하는 입장을 넘어 같은 여성으로서의 삶을 연대하는 영지는 은희의 세계인 듯 그려진다.
은희의 혼란은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우리”라 불릴 수밖에 없던 울타리 밖에서 비로소 치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을 통해 많은 관계에서 오는 어지러운 마음들을 조금씩 풀어놓는다. 영지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을 보며 힘든 삶을 버텨나간다고 알려주고, 은희에게 “맞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말을 전한다. 위로를 내놓는 영지와 은희 사이에는 어떤 동경과 사랑의 마음이 피어나게 된다. 오롯이 아끼는 마음만이 서로를 위해 남아있을 뿐이다.
은희가 위안을 얻는 부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스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영화의 진가는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 대한 장면들에서 흘러나온다. 은희는 수술을 받고 온 사이에 학원을 그만둔 영지 선생님을 찾아간다. 하지만 떡과 편지를 들고 찾아간 영지의 집에 그녀의 온기는 없다. 영지의 어머니가 나와 이제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건넬 때, 비로소 아픔은 체화된다. 은희의 언니가 무사함으로써 붕괴된 성수대교가 자신의 사람들을 아무도 앗아가지 않아 느꼈던 안도감이 전부 부정당하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지 선생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언니와 함께 성수대교 아래 강가에 서있는 은희를 비추는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수학여행 버스를 기다리며 운동장에 서있는 은희만 보이고 그 주변 학생들의 모습은 전부 아웃포커싱 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혼자만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것 마냥 괴리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은희의 모습이 이 영화가 시사하는 지점들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혼돈이 내재된, 격동의 시간 속에서 은희는 분명하게 성장한 듯 보인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줄 알고 세게 두드리며 우는 첫 장면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은희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영지 선생님과의 시간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은희는 만날 수 있던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자신의 모습을. 한 뼘 성장한 자신을.
우리가 그런 시간들을 통과했을지, 아직 통과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그 시간은 각자의 다른 삶 속에서 같은 지점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벌새⟩는 바로 그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쓴 이야기다. 불안하고 어린 우리가 무언가를 만나고, 그것을 떠나보내고, 마침내 이별을 마주하는 시간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 조용히 관망하는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이 우리를 몇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영화 ⟨벌새⟩는 결국 언젠가는 필요했을 그 시간들에 대한, 숭고한 만남과도 같다.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쓰지만 무척이나 귀한 성장의 찰나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