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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Jan 02. 2020

2019 이소라 콘서트

곤두선 감각들

1.

좋아하는 말들이 몇 가지 있다. 하루를 지내며 새로운 감각의 단어들을 알게 될 때면 그것들은 종종 바뀌곤 한다. 그중에는 유독 그 범주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곤두서다”라는 단어가 바로 그렇다. 몇몇 단어에 대한 이유 없는 애착이 생길 때면, 나는 그 단어를 쓸 수 있는 상황들을 생각하며 말을 끼워 맞추어 보기도 한다. 누군가의 신경이 조심할 필요가 있을 만큼 날카로울 때, 무척 급박한 상황에서 모든 감각들이 예민해져 살아 숨 쉴 때. 나는 그 날의 경험을 통해,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을 더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가수 이소라의 공연이었다.


2.

날이 어두워져서 하늘이 제 색을 잃기 시작할 즈음 나는 공연장에 도착했다. 오래도록 그녀의 음악과 어떤 태도들을 흠모했음에도 이제서야 그녀의 공연을 찾았다 생각하니 조금 웃기면서도 어색한 기분이 되었다.

공연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문득 생경해지기도 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공연이 시작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출했다. 오히려 어느 회사의 종무식이나 졸업을 맞이하는 이들의 형식적인 행사가 훨씬 거창하게 꾸며져 있으리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에는 그녀의 팬들이 마련한, 조그마한 포토월만이 자리를 지켰고, 그녀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만이 벽을 채우고 있었다. 부가적으로, 관객들이 자유롭게 들고 갈 수 있도록, 테이블 한편에 쌓인 엽서 무더기뿐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가수의 콘서트라고는 믿기지 않는 간결함이었다.


새소리와 물이 흐르는 소리가 공연장을 채우던 여섯 시, 그녀의 공연은 정확하게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안내 내지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그녀는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정확하게 어떤 순서로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서너 곡을 부른 그녀는 잠잠한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어수룩한 말들을 건넨 것만은 또렷하다. 도착이 늦은 관객들의 입장을 기다리며 간단한 농담 몇 마디가 이어지고 다시 노래는 시작되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노래들이 홀 안을 채우며 객석의 모두는 그녀가 던지는 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3.

(처음 그녀의 공연에 가본 사람으로서) 그녀의 공연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아까 언급했던, 마치 축제와도 같이 널린 수많은 화환과 축하의 메시지들도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소음이었다. 관객들은 마치 그 어떤 소음도 내지 않으려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그녀가 내는 모든 소리들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거기서 현장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곤두세운 감각들을 위해 관객들이 숨죽여 그를 위해주고 기다리는 듯 보였다. 경건한 수준에 이르던 그 고요가 내심 싫지 않아서, 나도 자연스레 그 고요에 합류하였다.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관객들뿐만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 세션들 역시도 그녀의 불안한 듯 보이는, 날 선 호흡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듯 보였다. 앞서 그녀는 자신의 밴드 세션들을 “자신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지켜주는 전사들”이라고 칭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밴드 세션들 모두 가수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노래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물론 훌륭했다. 이승환의 피아노, 이상민의 드럼, 그리고 임헌일의 기타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졌고 관객들은 그렇게 귀한 시간을 선물 받게 되었다.


4.

노래를 부를수록 가수는 더욱 자유로워졌다. 초반에 갑갑한 듯 들렸던 목소리는 목이 풀릴수록 점점 만족스러운 상태로 접어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노래를 하면서 보여주는 어떤 습관들에 마음을 뺏기곤 한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숨을 그대로 끌고 가면서 보여주는, 메마르고도 울림이 큰 목소리를 좋아한다. 흡사 포효나 울부짖음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가창은 잔잔한 노래들에서 오는 것들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기대에 한껏 부응하는 목소리를 공연 후반부쯤에는 마음껏 들을 수 있었고, 그렇게 구성된 셋 리스트에 무한한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엔 노래에 에너지를 쏟느라 가사를 잊어 노래 한 곡을 처음부터 하기도 했는데, 완성도 있는 노래를 들려주기 위한 모습에서 경외와 같은 마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공연의 마지막 곡은 그녀의 4집 앨범에 수록되어있는 "아멘"이었다.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대학교의 합격을 기다리는 동안 떨리는 마음에 틀어놓은 노래였고, 이제는 가수가 된, 먼 친구가 입시곡으로 선택하기도 했던 노래였다. 그때의 우리는 각자만의 사정들을 뒤로한 채, 먼발치에서 메마른 응원만을 보낼 뿐이었다. 그것들은 합격 혹은 불합격이라는 결과와 그를 뒤따르는 숙연함들로 인해 마침내 사라지곤 했다. 그때부터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절실하면서도 허무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전부 오랜 이야기가 됐지만, 어떤 간절함은 여전히 어른거리는 듯했다. 가사를 곱씹으면서 허우룩해지기도 했다.


5.

그리고 그녀의 공연에는 앵콜이 없었다. 아마 앵콜이 없는 단독 공연은 내가 다녀갔던 공연들 중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앵콜을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무대 앞은 방금 전까지 진행되던 공연의 생생한 여운을 남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더러는 그녀가 앉아 노래하던 자리를 찍었고, 더러는 커튼으로 드리워진 무대를 눈에 담기도 했다. 울림이 컸지만 앵콜이 없어 괜히 아쉬웠던 나도 그녀의 자리를 사진으로 남기고 쫓기듯이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앵콜이 없는 그녀의 공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22일 이후로도 연말까지 공연이 잡혀있었으니, 가뜩이나 컨디션의 변화가 심한 그녀가 앵콜을 하지 않는 건 오래도록 노래를 불러온 사람으로서의 노하우라 이해해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여러 가지 불편들을 관객이 감수할 수밖에 없던 공연이어서 순식간에 끝이 나버린 공연에 괜히 미련이 남았다.



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부르기 위해서 건강을 더욱 챙겼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소라라는 가수가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점점 메말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미디어 속에 비쳤던 것과는 달리 쇠약해진 모습에 걱정이 덜컥 생기기도 했다. 여러 가수들이 더 좋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꾸준히 스스로를 관리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어서 더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녀가 무대를 선보이기 전에 보이는 날 선 모습을 유독 좋아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의 결과물을 보여주려 하는 듯한 모습이 무척이나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러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외람된 생각이겠지만, 그녀가 건강함 속에서 음악을 향해 곤두세운 감각들로 노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면, 그녀가 오래도록 준비해오던 "그녀풍의 9집"을 자연스레 세상에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디에도 손상되지 않은 그녀의 새로운 음악을 꼭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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