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手製)비

by 이병관

수제(手製)비



미루는 없는 것으로 지금,

여기 존재한다 그것은 부재의 形神으로 현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나의 사건이고 시간이고 공간일지도 모른다 텅 빈 공간을 쥐고 있는 빈손일지도 모른다 미루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미루는 이름으로만 남은 새일지도 모르고 구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울에 비치는,

창에 비치는―

나무가 흘리는 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애증 같은 것, 그것은 거울 속의 사랑 거울 속의 기쁨 아득히 다가오는, 아직 무르익기 전의 前奏― 같은 것 혹은 아직 호명되지 않는 기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밤은 미루어지고 괄호 속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미루에 대해서 그것은 마치 작은 조각구름 같아서,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 하나

지금 여기, 새 한 마리 난다

도망가는 생명과 사라지는 생명과 살아남으려는 생명들의 쇠잔한 궤적, 그것의 깨짐이 내는 요란, 그런 찰나의 붐빔, 그것으로 매몰되는 수원지와 같은

그곳으로, 덩그러니 빈손으로, 혼자서 물의 外觀을 떠돌다 고스란히 찾아드는 슬픔은, 거울을 빌미로 나를 비추고 거울은 슬픔을 빌미로 나를 비춘다 미루는 재만 남은 전소된 광기이며 말소된 슬픔일지도 모른다. 어둑한 침묵 하나가 백지 위를 지나간다 캄캄한 소란이 내려앉은 백지, 먼지처럼 내려앉는 이야기 하나

저기 幕 하나가 어둠을 망친다

표정이 사라진 거리

이름 없이 거리를 감도는


벼랑의 거적

축축한 소리

떠오르고 있다

떨어지고 있다

신발 끈을 묶었다

여기 幕 하나가 지고 있다


이것은 끝없이 미루어지는 定刻처럼―

막과 막 사이를 막막히 떠가는 구름처럼 다시금 사라지는 미루의 이야기

지금은 조금씩 마음이 기우는 별밤

아주 조금 남은 창백처럼 까만 그때

저기 새 하나 진다 누군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다 누군가

누구에게도 설명하기조차 구차한, 막연히 핑 돌게 되는 그런 순간처럼

생겨먹은

그런 소리,

그것을 듣는 사이 새 하나 인다 모두의 밤―

모두의 창을 따라오는

훼손된 밤을 두른 손끝이 아프다 창밖 나무에서 조용한 냄새가 난다 누군가 홀로 잠든 방에는 상자 하나 놓여 있다 상자는 새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영원을 염원하는 빈 것으로 가득한)

상자는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새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아닌 누군가 상자 하나 열게 된다.

그곳은 모든 곁의 안쪽, 모든 겉의 바깥.

첨탑같이 부풀고

골목같이 번지고

잠결 따라 떠가는

푸르게 붉게 희게 서린,

앙상하게 텅 빈

미루의 창

빈 밤,

창을 열 때마다

새는 빈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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