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존재의 거울]
나는 어디로 사라졌나?

부제 : 나에게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

by BNIBNI


나는 어디로 사라졌나?

[오늘은 존재의 거울]


무지개 숲의 다정한 유령

무지개 숲에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카멜레온, '레온'이 살았어요. 숲속 친구들 사이에서 '마음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레온이었답니다.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친구 옆에선 어느새 포근한 보랏빛이 되어주었고, 화가 나서 붉게 달궈진 친구 앞에서는 누구보다 뜨거운 붉은빛으로 변해 그 마음을 받아주었지요. 행복을 노래하는 친구를 만나면 달콤한 솜사탕처럼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하루 끝자락에 지쳐 한숨을 내뱉는 친구 곁에서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되어 그 고단함을 달래주었답니다.

"레온아, 넌 정말 다정해. 네가 옆에 있으면 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친구들의 칭찬에 말없이 웃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밤, 레온은 거울 앞에 서서 당황하고 말았어요. 거울 속에는 희미해져 가는 나의 모습이 보였거든요. 나뭇잎 색도, 꽃잎 색도 아닌, 그저 뒤편의 벽지가 훤히 비쳐 보이는 투명한 공기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사라지는 몸

레온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어떤 색을 가졌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답니다. 그렇게 너무 자주 색을 바꾼 탓이었을까요? 이제 누군가 곁에 없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해졌습니다.

사실 레온은 모두가 좋아하는 카멜레온이 되기 위해 기꺼이 양보했고, 배려했지요. 그렇게 타인이 원하는 역할로만 살다 보니, 정작 레온이라는 존재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일까요?

불안했던 레온은 숲에서 가장 지혜로운 나무 '마루'를 찾아갔어요. 마루는 깊은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의 색을 바꾼 적이 없는 든든한 나무였지요.

"마루님, 저를 보세요. 몸이 점점 투명해져서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레온은 파르르 떨렸습니다. 마루는 인자한 눈으로 보이지 않는 레온의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레온아,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무엇이 되고 싶니?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레온이었어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거든요. "그게... 저는... 그저 친구들이 좋아하는..." 당황한 레온은 말을 잇지 못했어요.

"레온아, 그건 친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색일 뿐, 네가 진짜 품고 싶은 색은 아니잖니." 마루의 나직한 목소리가 레온의 텅 빈 가슴을 깊게 울렸습니다. 불편한 말을 억지로 삼키고 싫은 것도 괜찮은 척 웃어넘겼던 수많은 밤들... 그 조각들이 쌓여 결국 스스로를 버리고 있었다는 진실 앞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진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니? 그렇다면 먼저 너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단다. 네 마음의 영토에 분명한 선을 긋고, 너만의 단단한 기준을 세우렴. 네가 네 삶을 먼저 지켜 내지 못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너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없단다."


무채색의 동굴

마루는 레온에게 숲 끝에 있는 '무채색의 동굴'로 가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곳은 어떤 빛도, 어떤 타인의 색도 닿지 않는 완벽한 어둠의 공간이었지요. "그곳에서 아무것도 비추지 말고, 오직 네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어보렴."

어둠 속에 홀로 서니 비로소 보였습니다. 친구들의 표정을 살피느라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마음의 구석진 방들이요. 그곳에는 삼켜버린 말들이 차가운 돌멩이가 되어 굴러다니고 있었고, 억지로 꺾어두었던 나의 기준들은 상처 입은 채 시들어 있었습니다. 레온은 그 상처들을 하나씩 품에 안으며 속삭였습니다. "미안해, 그동안 나에게 너무 나쁜 아이었지? 흑흑" 꽉 막혔던 가슴속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사실 찬 바람보다 따뜻한 햇살을 더 좋아했었지.' '나는 보라색보다는 은은한 옥빛을 품고 싶었어.''나는 모두를 만족시키기보다, 나를 먼저 웃게 하고 싶었어.'

자신에게 솔직해질수록, 투명했던 몸속에서 아주 작고 은은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색도 아닌, 오직 레온만이 가진 순수한 '나만의 빛깔'이었어요.


다시 찾은 색깔

동굴 밖으로 나온 레온의 발밑에는 이제 선명하고 단단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어요. 비록 예전처럼 화려하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레온만의 은은한 옥빛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지요.

친구들이 다시 몰려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려 할 때, 레온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미안해. 여기까지는 내가 지켜야 할 나의 마음이야.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기로 했거든."

레온은 이제 자신을 버려가며 다정한 척하지 않았어요. 나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진실한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작가노트> 모두에게 친절하려다 투명해진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카멜레온이라는 메타포로 풀어냈습니다. (이 동화와 연결되는 다음작품 '나는 사라진다' 는 시로 표현되었으며, 이어서 읽어보세요.)



항상 괜찮은 사람으로 살다 보면, 나는 사라지고, 남이 원하는 역할만 남는다.








<에필로그>


'착한 사람'이라는 가면은 때로 우리 자신을 가장 아프게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정작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진심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타인에게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맞추려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랑받고 보호받아야할 주인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선을 긋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타인과 건강하게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베풀어야 할 가장 정직한 다정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