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핍이 꽃이 될 때
[오늘은 결핍의 거울]
햇살 한 줌 닿지 않는 숲의 가장 낮은 곳, 그곳이 이슬의 세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 서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난 이슬은 늘 진흙탕을 구르며 산짐승들의 발굽에 짓이겨지기 일쑤였다. 비가 쏟아져 차가운 진흙이 숨구멍을 막아올 때면, 이슬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저 높은 곳에는 비바람에도 꼿꼿한 나무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태양을 가장 먼저 마중 나가고, 별빛을 가장 가까이서 품었다.
"불공평해."
이슬은 흐물거리는 자신의 줄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바로 곁에 오래된 돌담이 무너져 있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온기 없는 차가운 돌덩이에 기대느니 차라리 진흙탕이 나았다.
"왜 나는 스스로 설 수 없을까. 나를 지탱해 줄 단단하고 강한 누군가가 필요해."
이슬에게 사랑은 동경이자, 생존을 위한 절박한 비명이었다.
어느 날, 이슬은 숲의 언덕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마루를 만났다. 마루는 깊은 뿌리와 단단한 기둥을 가졌고, 그의 잎사귀는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땅을 기는 이슬을 본 마루가 다정하게 가지를 내어주었다.
"이리 와, 이슬아. 내 몸을 잡고 올라와. 너에게도 저 높은 곳의 풍경을 보여줄게."
이슬은 떨리는 잎사귀로 마루의 기둥을 조심스럽게 감았다. 마루는 몸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난생처음 흙바닥을 벗어나 마주한 세상은 눈물겹게 눈부셨다. 코끝을 맴돌던 비릿한 흙내음 대신 싱그러운 바람 냄새가 났고,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이슬의 차가운 몸을 부드럽게 데워주었다.
이슬은 마루의 기둥에 얼굴을 묻으며 맹세했다.
"널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사랑해, 마루야."
그것은 사랑 고백이었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한 집착이란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마루를 감고 오르는 삶은 달콤했으나, 그 안락함 뒤엔 늘 서늘한 불안이 도사렸다. 태풍 속에서도 의연한 마루와 달리 잎사귀 하나조차 가누지 못해 흔들리던 밤, 이슬은 마루의 단단함에 안도하면서도 그 완벽함이 사무치게 미워졌다.
"넌 좋겠다. 나 없이도 여전히 멋진 나무라서."
이슬의 열등감은 뾰족한 가시가 되었다. 마루가 찬란하게 빛날수록 이슬의 마음속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완벽한 존재 곁에 선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비참함이었다. 이슬은 마루를 스치는 바람에게조차 질투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떨쳐내려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은 이슬의 줄기를 수축시켰고, 그것은 포옹이 아닌 끔찍한 결박이 되어, 단단한 마루의 껍질이 비명을 지르듯 ‘으드득’ 소리를 내며 갈라질 때까지 숨통을 서서히 죄어갔다.
"이슬아... 조금만 느슨하게 안아줘. 숨을 쉴 수가 없어." 마루의 잎이 누렇게 시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슬은 오히려 화를 냈다.
"사랑한다면 이 정도 아픔은 참아줘야지! 나를 너 없이 못 살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무겁다고 하면 난 어떡해?" 사랑이라는 이름의 덩굴은 이제 마루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다.
'우지끈-!'
단순한 파열음이 아니었다. 한계에 다다른 관계가 비명을 지르며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슬이 매달려 있던 마루의 굵은 가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슬의 집착과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이슬은 다시 차가운 진흙탕 속에 처박혔다.
추락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건, 전신을 감싸던 마루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공허함이었다. 이슬은 떨리는 눈으로 마루를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지켜준다며. 결국 나를 버린 거야.'
그때, 부러진 마루의 상처에서 수액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차가운 수액 방울은 멍든 이슬의 이마를 적셨지만, 그 감촉은 마치 괜찮다고 다독이는 손길처럼 뜨겁고 다정했다. 그제야 이슬은 보았다. '사랑해서'라는 변명 뒤에 숨겨왔던, 자신이 파고든 흉측한 상처들과 엉망이 된 껍질과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을…
'아... 나를 지탱하느라 마루가 병들고 있었구나.' 이슬은 깨달았다. '내 사랑은 그를 안아주는 게 아니라, 갉아먹고 있었구나.'
이슬은 다시 마루에게 기어 올라가려던 줄기는 멈추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차갑고 거친 '오래된 돌담'을 더듬거렸다. 예전엔 차갑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돌담이었다. 돌담의 까슬한 이끼와 모난 모서리가 이슬의 연한 살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하지만 그 쓰라림 덕분에 이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슬은 돌담을 꽉 움켜쥐고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마루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에필로그]
이슬과 마루의 숲을 여행하며, 당신은 어떤 마음을 떠올리셨나요? 책장을 덮기 전, 당신의 마음속에 세 가지 질문을 남겨두고 싶습니다.
첫 번째, 당신은 누군가 없으면 무너질 것 같은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곁을 내어주고 있나요? 누군가가 꼭 있어야만 내가 완성된다고 믿는 '필요'의 관계는, 그 상대가 흔들릴 때 나의 세계도 함께 무너뜨리고 맙니다.
두 번째, "나는 당신 없어도 괜찮지만, 당신이 있어 더 행복하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나요? 이 말은 차가운 거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 있을 때, 비로소 상대의 존재 그 자체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이미 가득 차 있기에(충만), 당신이 내 곁에 머무는 것이 의무가 아닌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관계는 영원을 향하고 있나요?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는 그 목적이 사라지면 흩어지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맺어진 관계는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이슬과 마루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두 나무처럼 살아가기로 한 이유를, 이제는 당신도 알 것 같나요?
닿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것들을 위해, 그리고 홀로 서 있어도 충분히 빛나는 당신을 위해, 이 이야기를 마칩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사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사랑은 '필요'인가요,'충만'인가요?
#감성 #위로 #관계 #충만 #어른들의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