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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y 29. 2020

사랑에 빠진 여자의 수플레는?

나는 수플레라는 매혹적인 단어에 꽂혔다. 한동안 라메킨(ramekin)* 속에 부풀어 오르는 구름빵을 상상하며 소문난 집을 찾았다. 내가 원하는 앙증맞은 라메킨은 주로 홈베이킹할 때 사용하는 것 같고 소문난 집들은 주로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디저트를 찾아 백제로를 걸었다. 오래된 주택가 담장 너머 옥매화가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온화溫花’는 따뜻한 꽃인가? 벚꽃인 듯 배꽃인 듯 꽃문양이 그려진 조금 이색진 이름이다. 간판이 눈에 잘 띄지 않아 가까이 두고 한참 돌아다녔다.

수플레(soufflé)의 어원은 “부풀다(puffup)”의 뜻에서 비롯된 말로 공기를 불어넣어 만든 빵이다. 달콤한 맛과 향기로 채워진 가볍고 보드라운 느낌이 이 빵의 매력이다. 누구라도 구름과도 같이 폭신한 맛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부드러움을 만들려면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조리 중 잘 부풀지 않고 푹 꺼져 버리기 때문이다.

수플레는 소설이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사브리나’가 유명하다. 영화 속에서 수플레를 만드는 어려움이 잘 표현되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라러비 가문의 운전기사의 딸 사브리나는 바람둥이 둘째아들 데이비드를 짝사랑하지만 눈길을 끌지 못하고 애만 태운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로 요리공부를 하러 떠난다. 요리학교에서 ‘수플레’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가 수강생들을 향해  ‘수플레는 여름에 부는 산들바람의 왈츠에 춤추는 두 마리 나비처럼 되어야한다.’고 한 말은 제법 시적으로 들렸지만 이미지만 무성할 뿐 막연했다. 학생들의 작품을 품평하는 자리에서 긴장된 모습과 칼로 자르듯 명쾌한 대사는 무척 유머러스하다. “너무 퍼졌어, 너무 질어, 너무 희멀겋다, 두꺼워, 과하게 부풀었어,….”그의 지적은 수플레를 만들 때 주의할 점들이 아닌가. 까다롭기가 그지없어 보인다.

 유일하게 합격품을 만든 사람은 연륜이 묻어나는 바론씨다. 그가 사브리나의 푹 주저앉은 수플레를 보고 “사랑에 빠져 행복한 여자는 수플레를 태우지만, 사랑 때문에 불행한 여자는 오븐에 불 켜는 것을 잊어버리지.” 충고가 뭉클하다. 음식도 사랑도 잘 부풀어야 하고 쉽게 꺼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플레는 밀가루, 달걀, 버터 등을 섞어 만든 반죽을 라메킨에 담아 오븐에서 부풀려 구워 낸 프랑스의 대표 요리다. 수플레가 대중적인 요리로 자리 잡았지만 요리사들 사이에서는 만들기 까다로운 요리로 인식되었다. “계란찜은 서비스고 수플레는 만 원이냐?”라는 요리사들의 푸념을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에서 읽었다. 수플레라 부르는 음식을 최근에 알게 된 나로서는 같은 소재를 써도 아주 다른 작품이 되는 글쟁이와 비슷한 맥락을 읽었다. 서양 음식의 세계에서 수플레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에 가장 기본적인 조미 방식만으로 승부를 낸다. 최상의 상태로 내놓은 수플레를 일상생활 중에 먹는 문화권의 대중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우리에게 계란찜도 그런 음식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만만한 계란찜은 손님에게 베푸는 서비스, 곧 공짜 선물일 뿐이다. 얄궂게도 수플레 한 숟가락쯤에 만 원을 붙여도 불평 없는 한국인 손님이 계란찜을 서비스로 바란다는 아이러니에 뒤가 켕겼다. 

디저트카페 온화는 실내가 환하게 트였다. 코로나19로 손님들이 붐비지 않아 여유 있게 앉아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수플레 전문카페답게 플레인, 딸기, 고구마, 벌집, 발로나 초코가 있었다. 벌집수플레가 끌렸지만 단맛이 덜한 고구마 수플레를 주문하고 차는 아인슈페너와 핸드 드립커피를 주문했다. 20분 뒤에 등장한 수플레는 환상적이었다. 눈처럼 흘러내리는 하얀 생크림 위에 자색고구마 칩은 눈 속에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보랏빛 가루를 뿌려 장식한 수플레는 먹기가 아까울 정도이다. 거기다 하얀 거품 위에 아몬드가루를 뿌린 아인슈페너를 곁들이니 나는 봄날 겨울왕국으로 들어선 느낌이다. 동생은 산미가 도는 커피를 마셨다. 

한참 눈요기 마치고 포크로 조금 건드려 보니 케이크는 곧 쏟아질 듯 찰랑거리며 맛있게 부풀었다. 처음 맛보는 고구마 수플레는 조금씩 무너지며 친근하게 혀끝에 감겼다. 오늘 하루를 선물 받은 듯 우리들의 대화는 달달하게 이어졌다. 건너편에 연인과 마주 앉은 여자의 수플레가 궁금한 가운데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도 함께 피워 올렸다.

*라메킨: 세라믹이나 유리로 만든 작은 그릇으로 오븐 요리 등에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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