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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Feb 19. 2021

시간의 문을 지나 낯선 세계와
만난 듯

-커피 한약방과 혜민당

디저트가 있는 시간


(디저트가 있는 시간 겨울호)



송복련

<네버웨어>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런던에 살던 리처드 메이휴가 어느 날 낯선 세계와 만나듯 시간의 문을 지난 것 같다. 빌딩들이 하늘로 쑥쑥 솟아 오른 을지로 3가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을 장소를 좁은 골목 안에서 만날 줄이야. 전깃줄이 얼기설기한 골목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했다. 해민당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불빛 속에 머물던 기억들이 불려나올 듯하다.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피던 혜민서가 있던 자리라고 써 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커피 한약방에 들어섰다. 한약을 다리듯 정성을 다해 커피를 만들었다는 뜻이니 커피맛을 제대로 보겠다는 기대를 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손때 묻은 물건들이 많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필터커피를 주문하고 급경사의 좁은 계단을 위태롭게 올랐다. 어릴 적 다락방에 올라간 듯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커피 맛을 음미하며 이 카페의 주인이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강윤석 대표는 옛날 아버지가 자주 데리고 다니던 이곳 을지로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건축가였던 어머니 밑에서 일을 배우며 터득한 그는 개화기 무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를 만들어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래된 가구와 탁자가 그렇고 벽에 걸린 그림이며 바닥과 천장은 물론 조명까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풍겼다. 

유난히 눈에 띄는 자개 장식품은 지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지만 삼고초려 끝에 문을 구해 올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물건에 찾아다녔다. 벽지를 걷어내다가 나타난 타일을 재활용하기도 했지만 오래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상해의 철거지구나 북경까지 가서 구해올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고풍스럽게 공간을 부활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예스런 분위기에 젖어 차를 마시니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오래된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품은 이야기들을 들려줄 것만 같다.

디저트를 맛볼 요량으로 왔지만 장소가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껏 행복감에 젖었다. 두 걸음 정도의 골목 맞은 편에 있는 혜민당으로 향했다. 입구의 장식장에 커다란 케익이 진열 된 문을 지나니 역시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먹음직스런 디저트들을 살피며 무얼 주문할지 망설였다 빨간 오미자 무스 케이크를 주문해서 낡은 계단을 올랐다. 조명등이 비치는 탁자 위에 디저트를 놓으니 또 하나의 소품인양 아름답다. 오미자의 투명하고 붉은 빛깔이 미각을 자극한다. 이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처럼 이곳 가구들이 품었을 다양한 기억들 또한 시고 달고 쓰든지 맵고 짰을 것이다. 이제 먼 이야기처럼 풍화되어버렸을 것이다. 무스를 걷어내니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혀를 감쌌다. 디저트와 공간의 조화는 사람들이 품고 사는 향수가 있기 때문이리라. 문살이며 타일바닥이 있는 실내는 드라마 속으로 데리고 간다. 낡은 약장 근처 어딘가에 허준 선생이 계실 듯하다. 

세심한 배려는 화장실 문만 봐도 안다. 여자 화장실 문에 빛바랜 사진 속에는 카페 주인의 어머니가 계신다. 건너편은 아버지 사진이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턱하니 가슴에 와 닿는다. 새롭게 펼쳐지는 방들의 분위기에 끌린 나는 집구경을 온 것인지 디저트를 위해 온 것을 잊어버렸다. 나무의 결마다 손때 묻은 오래된 것들의 감촉이 좋다. 쉽게 버려지는 것들 속에서 건져올린 보물들, 보이는 것들만 보는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는 안목이 이곳에 있었다. 일상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았던 공간들이 어느 순간 되살아났다. 현재 속에 과거가 숨쉬는 새로운 세상이 탄생되었다. 서로 다른 시대가 콜라보레이션 된 곳에서 한참 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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