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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꿍 Aug 09. 2022

무제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일을 하면서 술 마실 일이 잦은데, 그 핑계로 만취해버렸고 전철에서 자는 새 누군가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위치추적 결과 그렇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해 백업도 휴대폰 보험도 들지 않았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 그간에 저장했었던 연락처도 사라졌지만 정작 안타까운 건 열심히 찍었던 사진을 날려먹었던 것이다.


급한대로 이전에 사용하던 휴대폰을 꺼냈다.

탄자니아에서 휴대폰을 도둑맞아 대용으로 샀던 갤럭시 보급형 휴대폰이다. 당시에는 생활비로 커다란 지출이었고, 최신폰이다 보니 누군가 훔쳐갈까 싶어 외부에서는 잘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나는 한국에 와서 훨씬 비싼 휴대폰을 마음 놓고 쓰다가 또 잃어버렸다.


어쨌거나 당분간 써야 할 휴대폰는 추억이 많이도 잠겨있었다. 밖에 나가서 얘기할 때면 그토록 소중한 추억인데 정작 나는 백업도 안 해둔 채로 서랍 속 휴대폰 안에 구겨두고 있었다. 꺼낼 핑계가 없는 채로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힘들었던 날들이 정말 많았다. 덥고 습한 그곳에서 땀에 절은 채로 수업하고 돌아왔을 때 물도 전기도 끊겨 있던 날들이 있었다. 말라리아로 한 차례 사경을 헤매고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방 안의 모기를 잡지 못하고 억지로 잠을 청할 때가 있었다.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 전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하지 못 한 채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휴대폰으로 하나하나 기록했던 날에는 무척이나 행복한 기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탄자니아에서 가르쳤던 학생인 Herman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적잖이 화가 났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30대 초반에 사인불명으로 죽는 일이 흔치 않았고, 같은 시간에 살면서도 다른 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멍해졌다.


다른 세상에서의 나는 지금과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미래를 그리며 살고 있었다. 돌아와 직장을 구해 차를 샀고, 대출을 끼고 집을 구했지만 그만큼의 것들을 잊고 살고 잊고 지낸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틈틈이 그 세상을 기억하고 그리며 지낸다.


학생이자 친구였던 Dar의 경찰 Herman을 진심으로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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