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자도감

가을아침, 秋朝

by 보네





조금 늦게 뜨는 해와 선명한 하늘

전과는 다르게 서늘한 바람과

초록도 갈빛도 아닌 이파리에 맺힌 빛 방울


이슬에 젖은 땅과 산뜻한 풀 향

저 멀리 서서히 번져오는 가을의 빛


천천히 스며들듯 찾아온 어느 날의 가을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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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秋, 朝

더운 여름이 한창이었다. 물기 가득한 공기와

강렬한 햇빛, 몇 걸음 걷다 보면 볼이 발갛게

익어버리는 초록의 계절.


다음 계절 그릇을 슬슬 준비해야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보통하고 있는 계절그릇의 중간쯤부터

테스트를 시작해 이-삼주 정도는 일정이 겹친다.

지금하고 있는 것들과 새롭게 테스트 하는 것들을

동시에 작업하다가 그 이후는 계절그릇을

마무리한 후에 1주 길면 2주 정도 품을 들여

과자를 완성한다.


이런 루틴으로 과자를 작업했는데

이번여름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해보지만 반짝 하는것이 없어

여름 내내 이리저리 갈피를 잃고 헤매다

떠오른 과일 포도.


보라빛포도와 초록빛이 담긴 과자를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에 드디어 무언가 떠올랐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때까지는 금방 할 수 있겠다는 아주

긍정적인 마음이었다.


긴긴 테스트 여행

처음엔 포도와 호지차로 시작했다가

초록빛을 넣고 싶어 녹차로 옮겨 테스트를 했다.

녹차와 포도 바닐라 코코넛 약간의 무화과


퐁신한 다쿠아즈에 쌉쌀한 녹차무스

상큼한 포도젤리 부드러운 바닐라의 조합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나쁘지 않지만 (맛이 없지는 않지만)

이 맛이 내가 생각한 맛이 맞나? 하는 마음에

좋았던 것은 두고 애매했던 것들은 다시 테스트에 들어갔다.


다쿠아즈는 단맛이 강해서 빼고 식감을 줄 수 있는

파트 사브레로 바꿔 보고 코코넛은 빼고

땅콩크리스피를 만들어 넣어봤지만

이것도 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하나씩 빼고 더하고 바꾸고의

반복, 결과는 처음과 같았다.


과자의 맛이 갈피를 못 잡을 땐 언제나

답은 같은 쪽으로 향한다.

내가 지금 떠오르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이 명확하지 않을 때

담고 싶은 것이 확실하지 않을 때

과자작업도 같은 영향을 받는다.


무엇을 담을지 명확하지 않으니

재료의 조화도 형태도 선명해지지 않고

합쳐지지 않는다.

모호한 선택지가 모인 과자와

긴 시간 씨름하다 이번 여름을 다 보낸 후에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구나



인스타에 한 달을 쉬겠다는 공지를 올리고

우선 씨름하던 작업을 그만두었다.


내가 떠올렸던 것들, 느끼던 것들을

뾰족하게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이 생겼으니 천천히 가보자


일할 때는 짧게 했던 두부와의 산책을

늘리고 나무를 구경하고 산을 구경한다.


아마도 늦여름에 가까울 날씨에

초록과 노란빛사이 잎은 신기하게도

나뭇잎의 처음인 봄의 연두빛과 닮아있고

그걸 한참 구경 하다 보면 둥그런 해가 보이고

그러면 문득 작업실에 가서 조금씩

스케치를 해본다. 진하지도 흐리지도 않는

초록과 파스스한 식감 진득한 맛과 산뜻한 맛


다음날에 스케치를 바탕으로 또 작업을 하면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




다시 마음을 다잡고 더욱 밖으로 향한다.

보고 싶었던 전시도 가고

좋아하는 동네도 놀러 가보고

다시 스케치를 반복했던 날들


이제 과자를 못 만드나 봐 하는 불안함에

결국 작업실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던 날,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포도를 까던 날,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를 뵙고 왔던 날,


그 모든 날이 모여 포도빛과 초록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날씨가 바뀌고 해가 바뀌더니

어느새 가을빛을 품은 날들에

내가 표현하고 싶던 포도의 맛,

가을의 맛이 담기기 시작했다.







초록의 방풍잎과 보라빛 포도

가을의 향인 무화과

고소한 땅콩의 조합으로 재료가 정해진 뒤

그 이후로는 조화를 위한 테스트의 반복이다.

방풍을 세게 했다가 땅콩은 식감을 바꾸고

바닐라는 줄이고 파이지는 조금 더 오래 구워보고

하는 전체적인 균형을 위한 테스트.


완성을 하고 자잘하게 마무리를 하던 날들에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

포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가

장례식 이후에도 아른 거렸다.

부드러운 포도향을 담아보자

서로서로 이어져있는 과자를 만들자

지금의 날들을 넣어보자.


그렇게 작업했던 가을의 과자, 가을아침

여름부터 가을까지 마치 긴 여행 같았다.


방풍포도파이에서 단호박 코블러

마무리인 포도젤리까지

부드럽게 이어지는 구조가

다시 시작한 가을과 참 잘 어울렸던

이번 시즌의 과자.


이번 과자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구나 하는 마음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과자로 작업하는걸

좋아하는 구나, 앞으로도 계속 만들고싶다‘

하는 생각들




이제는 하나의 과자가 만들어지기까지

전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 계절을 통해 알게 되었다.

조급함과 불안함에 울었던 그때를

이제는이해한다.

이전처럼 빠른템포로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알게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더 오랜 시간이 들겠지만

어렴풋이 생겨버린 구조에 메이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 마음에 닿는만큼의

과자를 작업하고싶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그렇다면

이해하고 어깨동무하며 찬찬히 해나가보자

앞으로의 나에게 응원을 보내며,


내년의 보네는 조금 더 또렷하고

깊이 있게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계절과자도감을 마무리한다.








이슬에 젖은 땅과 산뜻한 풀 향

저 멀리 서서히 번져오는 가을의 빛


천천히 스며들듯 찾아온 어느 날의 가을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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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秋, 朝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

언제나 고맙습니다.


25.10-11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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