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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Sep 29. 2022

역대급 위기와 평범한 웃음들

역대급,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단어는 곧 역대 최고라는, 그러니까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 가운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 등급(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참조)’이라는 뜻의 속어로 두루 쓰였지만 이제는 ‘역대급 소개팅’, ‘역대급 짜장면’ 따위로 아무 데나 붙이다 보니 진정 ‘역대급’인지 신뢰하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단어가 아니면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쓴다.


이번 8월은 우리 가족에게 ‘역대급 여름’이었다. 결혼 이후 만난 여덟 번의 여름 중에서 가장 난관이 많았달까. 심리적, 육체적으로. 또 양육인, 직업인으로서도. 내면과 관계의 문제를 모두 껴안은 채 안팎으로 혼란했다.







8월 첫 주는 아이들 어린이집 방학이었고, 둘째 주에는 두 아이 모두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다. 지난 3월 우리 부부가 먼저 확진을 받으면서 아이들만큼은 끝까지 지켜냈지만 애초에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두 아이가 격리하는 동안 남편과 나는 계속 음성이 나와서 번갈아 가며 일을 이어갔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돌아와 도서관 온라인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일이 없는 날은 숨 돌릴 틈 없이 아픈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전쟁 같은 격리 기간을 마친 후 열흘 동안 네 팀의 방문객이 우리 집에 왔다 갔다. 외향적 인간으로서 신명 나는 시간이었으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서야 내가 많이 지쳤다는 걸 알았다.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오나 싶었는데 작은 아이가 열이 나더니 수족구 진단을 받았다. 코로나 격리 기간에 각자의 일터에 허락을 구해 하루씩 일을 빠졌는데 수족구 때문에 면구스럽게도 또 휴강을 허락받았다. 수족구의 주요 증상은 고열과 수포와 왕짜증이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매일 울부짖는 아이를 돌보다 지칠 대로 지쳤을 즈음 큰아이마저 열이 났다. 이제 더는 일을 뺄 수 없어서 처음으로 정부 지원 아이 돌봄 서비스를 받아보기로 했다. 부랴부랴 주민센터에 갔더니 놀랍게도 딱 지금, 하필 이 기간에 국가 복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바람에 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다고 했다. 원한다면 정부 지원 없이 자부담으로 돌봄 서비스를 받으라고 했다. 지불할 금액이 최대 다섯 배로 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돌봄 선생님이 오셔도 부부가 일을 나가서 버는 일당이 더 크니까 그래도 플러스 아니냐며 피차 위안했다.

그런데 태풍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역대급’ 태풍이라고 했다. 제주도는 태풍이 올 때마다 가장 먼저 영향권에 드는 지역이라 도내 모든 기관들은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했고, 덕분에 나도 남편도 일이 싹 사라졌다. 일터에 얼굴 붉히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지만 금전적으로는 온전한 마이너스만 남았다. 자꾸 벌 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아이들과 집에 있는 시간이 태풍보다 더 무서웠다. 남편과 굳은 얼굴로 마주 보며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나 이제 정말로 힘이 다 빠졌어. 완전 바닥났어.”

“난 웃을 힘도 없어.”

“우리 이제 어쩌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접 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고열과 불면의 밤





큰아이는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몸에 어찌나 이야기가 가득한지 매일 다른 상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던진다. 작은아이는 이미 정해진 틀, 익숙한 상황에 놓일 때 안정감을 느끼며 좋아한다. 반대로 자신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으면 부모가 원인을 추리해 해결해낼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데굴데굴 구르며 운다. 집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청소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세탁기도 돌려야 하는데 두 아이를 돌보는 동시에 집안일을 하려니 힘에 부쳤다. 집은 엉망이고 한 아이는 떠들고 다른 한 아이는 울고 부모는 폭발 직전인 상황.


아이들은 특히 아빠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작은아이는 수 틀리면 무조건 아빠가 와서 안아줘야 울음을 그쳤다. 내가 안아주려 하면 손을 뿌리치며 거부하는 ‘지독한 (아빠) 사랑꾼’이다. 아빠가 안아주다가 잠깐 내려놓으려 하면 아이는 다시 자지러진다. 그러면 아빠는 한 손에는 13킬로 아이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하던 일을 마저 하고, 그 뒤를 큰아이가 졸졸 따라다니며 포켓몬스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푸크린도 메가 진화를 해요? 피츄가 진화해야 피카츄가 되는 거 알아요?”

한쪽 귀는 울음소리, 한쪽 귀는 포켓몬 프레젠테이션이 찌르고 들어와 그는 어떤 일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아빠만 찾으니 나를 부를 때 호칭을 헷갈리는 것도 예삿일이다.

“아빠. 아 맞다. 엄마.”

내가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면 큰아이가 뭐라도 거들겠다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가온다. 그때마다 나는 위험하니 물러나라고 말하며 성가신 마음을 감췄다. 그러면 아이는 내 속을 꿰뚫어 보듯 이렇게 말했다.

“아빠였다면 하게 해 줬을 텐데.”

두 아이의 주 양육자가 되어버린 남편은 진즉 웃음을 잃더니 아이의 말이나 울음을 전처럼 쉬이 넘기지 못하고 짜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가 장난치며 치근대도 그는 웃지 않았다. 나에게마저 싸늘해진 것을 느꼈을 때 문득, 그의 눈이 텅 비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남편이 책을 읽어보려고 하면 아이들이 책을 집어던지고 그가 피아노를 치면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투며 울었다. 남편은 부지런한 사람이라 분명 쉬지 않고 집안일을 계속하는데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집안 곳곳이 감당할 수 없이 어수선해졌다.

그가 갑자기 집을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어두운 표정을 보이던 날, 나는 그에게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그래야 숨통이 트일 거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이들에게 치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에 남편의 우울함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 그는 저항했다.

“안 나갈 거야. 왜 나가라는 거야,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한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기가 내가 힘들어서 그래. 일단 나가.”

남편은 마지못해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커피 드리퍼를 중고로 사 왔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백 퍼센트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최악이라 생각했던 날에도 가만 생각해보면 피식 웃을 일이 있었다. 큰아이는 아파서 밥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입은 쉬지 않는다. 아이에게 해열제 7ml를 주면,

“내가 이걸 한 번에 먹을 수 있을까? (나: 두 번에 나눠 먹어도 돼) 그렇다면… 백 번 나눠서 먹을까? 밤새도록? 아니면 일억 번? 만약 이걸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먹는다면…?”

연극배우처럼 대사를 읊는 동안 약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걸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아이는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넘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아이의 창조성과 열정을 혹 억누르지 않도록 열심히 들어주려고는 하는데 정말 쉽지 않다. 가끔 하품도 나고 옆에서 둘째 아이가 울면 달래주고 빨래를 개키기도 하면서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구나’ 장단을 맞춰준다. 그렇게 피츄와 라이츄와 포켓몬 친구들의 모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휴! 이제 끝났군!’ 한숨을 돌릴 때 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어떤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응용 질문까진 예상하지 못해 말문이 턱 막혔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더듬더듬 대답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어떤 부분이 제일 가슴이 떨렸어요?”


어디서 이런 아이가 나타났을까. 기가 차서 웃음만 난다.

포켓몬스터의 마자용과 푸린, 그리고 멋진 새 그림. 아이는 지치지 않고 창작한다.




작은아이는 요즘 말 배우기가 한창이라 웃을 일이 많다. 언니가 놀러 왔을 때였다. 좋은 이모이기도 한 나의 언니는 큰아이에게 피아노 레슨도 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와, 너무너무 잘했어!”

그동안 작은아이는 건반을 꽝꽝 누르며 레슨을 방해하고 있다가 새로운 단어를 습득하고 따라 했다.

“너무너무!”

남편이 후다닥 달려와 방해하는 작은아이를 안아 들고 가면서 말했다.

“으앗! 죄송해요!” 그러자 아이는 그 말도 바로 주워 담았다.

“재송해!”

그 후 이 두 단어를 합쳐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재송해! 너무너무 재송해!”

죄스러울 정도로 미안하다는 뜻의 ‘죄송’에 평대(하대)의 표현인 ‘~해’를 붙이니 묘한 느낌의 조어가 됐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죽상을 쓰고 앉아 있다가도 아기 입에서 파생한 이 말을 들으면 속절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레고를 조립하다가도,

“너무너무 재송해!”

낮잠에서 깨 비몽사몽 상태로 뒹굴거릴 때도,

“너무너무 재송해!”

하고 뜬금없이 소리쳤다. 그럴 때마다 픽 하고 웃음이 났다.

태풍 오기 전 주말, 냉장고부터 꽉 채운 뒤 칩거하려고 다 같이 마트에 갔다. 빗줄기가 굵어져 차를 탈 때부터 애를 먹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꼭 가야 하나? 이따 짐 빼면서 또 고생하는 건 아니야? 그냥 인터넷 주문하고 배송받으면 안 돼?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남편은 추석 연휴 전에 주방용품 세일을 꼭 체크해야 한다며 직접 가서 보고 싶어 했다.

비를 피하려고 실내 주차장이 있는 대형마트에 갔다. 이곳에 가는 길엔 한라산이 가깝게 잘 보인다. ‘한라산 감상하며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삶’에 새삼스럽게 도취되어 벌써 슬슬 기분이 좋아졌다.

도시인의 산림욕은 마트 산책이라더니 산뜻한 에어컨 냉기에 코를 벌름거리고 여기저기 흘러나오는 CM송, 각 잡혀 정돈된 먹거리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들도 모처럼의 외출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나는 핑크빛 프라이팬과 오래 갈망했던 유리 보울을 사고 행복해졌다. 남편은 주방 서랍 정리 트레이와 무알콜 맥주, 양념치킨 맛 라면을 담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브런치 접시 몇 개를 고를 때는 우리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큰아이의 넘버원 ‘얼려먹는 초코’를 모처럼 허락했더니 아이는 긴 쇼핑에도 지치지 않고 즐거워했다. 막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룡 비스킷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작은 아이도 카트에 앉아 내내 공룡 쿠키를 껴안고서 얌전히 있어주었다.

저녁을 거르고 장을 봤더니 너무 배가 고팠다. 남편이 전에 알아봤다는 순댓국 맛집에 가보기로 했다. 마트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었지만 주차할 자리를 찾기도 어려운 데다 비바람마저 거셌다. 날아갈 것 같은 우산을 겨우 붙들고 휘청거리며 식당에 들어섰다.

“맛없기만 해 봐라.”

남편의 낮은 탄식에 공감하며 웃었다. 잠시 후 펄펄 끓는 뚝배기가 나오자마자 맛을 보았다.

“세상에. 너무 맛있다!”

쫄쫄 굶다 먹은 뜨끈한 국물에는 생명력이 있었다. 눈이 밝아지고 행복감이 차오르며 생을 긍정하게 되었다. 두꺼운 돼지 창자에 찹쌀을 넣은 제주식 순대를 이날 처음 먹어보았는데 내 입맛에 잘 맞았다. 두 아이도 배가 고팠는지 후루룩 잘 먹었다. 오길 잘했다고 웃으며 밖으로 나와 보니 그새 비가 그쳤다.

“우와!”

날씨가 바뀐 게 뭐라고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꼭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오늘 너 힘들었지? 선물이야.’



8월 앨범을 다시 보니 좋은 추억도 많았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각 잡고 앉더니 느닷없이 고백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있어. 이제부터 그걸 해볼 거야.”

그의 꿈은 ‘미니멀리즘’이라고 했다. 그동안 혼자 수납 정리에 관한 책과 블로그, 유튜브도 틈틈이 많이 봤다고 한다. 나는 맥시멀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정리에 감각도 소질도 없어서 수납공간을 그저 방치하는 용도로 쓰곤 했다. 그래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으니까.

남편의 꿈에 대해 듣고 나는 그의 결혼 생활이 누리는 것보다 견디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정리를 좋아하는 배우자를 만났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같은 생각을 굳이 막아내지 않았던 걸 보면 나도 약간은 병든 상태였던 것 같다.


그는 부엌 하부장을 활짝 열고 내용물을 모두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찌든 때가 붙은 조미료 통, 누렇게 뜬 죽 포장용기, 언제 썼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기 턱받이, 김치 얼룩이 진하게 밴 큼직한 밀폐용기가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눈 후 사용 빈도를 물어가며 하나하나 위치를 지정했다. 저걸 다 하는 게 고되지 않을까 생각하다 그의 눈빛을 보고 걱정을 접었다. 저것은 쾌락이다. 그는 진심으로 후련해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친김에 나가서 깔끔한 수납 상자를 잔뜩 사 오더니 이번에는 팬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면이 딱 들어가는 사이즈를 찾았다며, 대충 쌓여 있던 라면을 착착 줄 세워서 상자에 담았다. 팬트리 한 칸에 수납 상자 네 개가 딱 맞춘 듯 들어가는 걸  보았을 때의 표정을 기억한다. 진한 희열과 옅은 광기 같은 것이 입꼬리, 눈꼬리에 어린 저 얼굴. 지난한 8월을 보내는 동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이다 못해 마치 생을 포기한 얼굴로 음울한 디미니쉬 코드를 느릿느릿 연주하던 사람이 오늘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절망을 돌파하고 있었다. 감탄하고 우쭐거리기도 하며 어깨를 들썩이는 남편을 보고서 나 혼자만 침잠할 수는 없었다. 나도 정리 작업에 합류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엄지를 들어 보였다. 오래된 과오들이 쏟아져 나와도 부끄럽지 않고 속이 시원했다.










우리 부부가 자체 선정한 ‘육아 난이도 커리어 하이’를 찍고 연속으로 나타난 위기에 휘청거렸지만 결국은 평범하고 작은 웃음이 숨구멍을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어느 방향으로 기쁨이 오는지 감각했고 그쪽으로 갈 힘을 얻었다. 그 밝음을 향해 기어서라도 가다 보니 어느새 삶은 제대로 된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더 성장한 아이들과 조금 더 깔끔해진 집이 보석처럼 남았다. 9월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뒤돌아 보니 이 정도면 ‘올해의 기적’이라 할만하다.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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