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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10. 2015

저기, 혹시... 밴드하세요?

운명의 목소리 - 어느 인디밴드의 시작







여행이나 가자.


'싱잉앤츠'라 정해놓고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백수프리랜서였던 나는 김명재와 이따금 동네에서 만나 수다를 떨었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그는 휴학을 하고 갑자기 생산직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가더니 긴 시간을 버티다 홀연히 퇴사를 했다. 음악이 너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여름도 왔으니 어디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고 싶단다.


다른 개미들에게 연락했다. 신남생은 오케이. 이날개는 전역하고 이사를 막 와서 정리하느라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결국 나와 김명재와 신남생. 이렇게 셋이서 여름 휴가를 떠났다. 경주. 다 커서 가면 그렇게도 좋단다. 우리의 명분은 분명했다. 음악 여행을 가자! 가서 곡을 쓰자!


(지난 편: 지극히 평범한 인디밴드를 만들자 - https://brunch.co.kr/@bo0/3 간단한 팀 소개와 인물 소개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여행은 그런 대로 재밌었다. 경주의 여름은 색채부터 달랐다. 이미 수학여행으로 두 번 이상 왔었는데도 온통 신선한 풍경인 것이 놀라웠다. 첨성대가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다. 석굴암에서는 우와 우와 감탄만 하다 나왔다. 안압지의 야경을 보고는 그냥 밤새 거기 있고 싶었다. 



숙소는 'ㅂ 게스트하우스'였다. 우리는 숙소 앞마당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물었다. 

"우와, 음악하시나봐요?"

우리는 멋적게 웃었다. 

"아니요. 그냥 취미로 하는 거예요."

행랑객들이 이따금 지나가며 물었다. 

"어머! 뮤지션이세요?"

그럼 우린 또 부끄러워 했다.

"아니요. 저희는 각자 일을 하는데 그냥 음악도 좋아하는 거예요."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좀 쑥스러운 일들이 있는데, 밴드도 그랬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아무 노래도, 앨범도, 활동도 없었으니까. 





그날 우리는 하루 동안 경주를 돌며 얻은 감상을 나눴다. 

예전에 혼자 피아노를 치다가 멜로디와 코드만 대강 지어놓은 곡이 있었다. 우리는 여행을 기념하며 오늘 나눈 이야기를 그 노래에 담기로 했다. 함께 흥얼거리다 가사를 다 붙였다. 

제목도 정했다. 

<초록이 되자>



바삐 걷는 거리의 사람들

하루가 채 부족한 사람들

꽃이 되길 잊은 사람들

꽃잎을 다 접은 사람들


여기 모여 초록이 되자

욕심 없는 친구들과 함께

낮은 하늘 손 뻗어 보자

우린 원래 꽃이었으니까




우리가 만든 첫번째 노래였다. 

(관련 음원 하단 참조)





다음 날도 즐겁게 관광을 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마지막 날 밤이니 제대로 놀자며 돗자리 챙겨서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올라갔다. 이미 꽤 많은 숙박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술도 안 먹는 우리로선 거의 유일한 유흥이었다. 나중엔 기타를 치다 치다 지쳐서 셋이 120도 간격으로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밴드하세요?






옆쪽 무리에서 한 여성분이 다가와 말했다. 살짝 취기가 오른 듯 했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네!"





자신없는 일을 시작할 때는 괜히 남의 확인을 받고 싶은 법이다. 누군가 시켜야 비로소 동기부여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날 한 사람이 우리를 불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밴드가 되었다. 어제는 부끄러워 움찔움찔거렸지만 이제는 인정한 것이다. 그래. 우리는 밴드다! 

조심스러워 하던 여성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그럼 노래 불러주세요!"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노래? 뭘 하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김명재가 먼저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싱잉앤츠라는 밴드입니다. 노래하는 개미들이란 뜻이죠."


그렇게 역사상 첫 공연을 했다.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는 이십 명 정도의 관객들과 함께. 


우리는 어제 완성된 <초록이 되자>를 처음 불렀고, 심지어 후렴구 떼창까지 요청했는데 모두들 즐겁게 따라해 주었다. 김명재는 므라즈나 이적의 곡을 근사하게 커버했고, 신남생은 예전에 지어 놓은 러블리한 자작곡을 불렀다. 살짝 취기가 오른 관객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빵빵 터지고, 어떤 노래에도 최고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넉넉하게 한다. 여행지에서의 밤엔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날 우리는 사랑을 받았다. 난생 처음, 뮤지션으로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실컷 웃고 떠들었다. 이미 알고 지낸 친구마냥 친밀하게 이야기하고, 느닷없이 어느 관객에게 노래를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새 관객과 뮤지션이 모두 어색함을 벗고 맑게 소통할 수 있었다. 젊음과 음악, 그리고 밤의 시너지였다.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중 하나가 됐다. 그후로도 그토록 너그러운 관객들은 보지 못했다. 





누군가 그날의 공연을 찍어 게스트하우스의 SNS에 올렸다. 함께 했던 분들이 댓글을 달며 추억해 주었다. 처음으로 어떤 '반응'을 경험한 우리는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우리도 어엿한 밴드라고, 이제 좀 더 큰 목소리를 내 보기로 한 것. 경주 터미널 주변 한 까페에서 싱잉앤츠의 SNS계정을 만들고 장난삼아 첫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퀄리티지만 괜찮으시다면 공개해 보겠다. (시력 주의)






3



2



1






이날개의 사진까지 합성해서 첫 프로필 사진을 완성했다.








그후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이따금 불쑥 경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분들이 우리 계정에 찾아오신다. 그날을 잊지 못해 우리 이름을 계속 검색했다고 하신다. 유튜브 영상을 찾은 분은 댓글을 남겨 주신다. 정규 앨범을 낸 것도 정말 잘 됐다며 기뻐하신다. 어떤 분은 자기가 1호 팬이라며 자랑스레 웃는다. 참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뭐라고.







시작은 미약하나 안타깝게도 끝까지 미약한 밴드. 

자신이 없어서 음악으로 승부하길 꺼리는 밴드.

곡이 방송을 타도 공연 하나 잡히지 않는 밴드.



그래도 이런 팬들이 계시니 나름 성공한 밴드가 되시겠다. 해 볼 만한 일이다. 






실제로 공연 제목으로 사용했던 말  <우리가 뭐라고>














위에서 소개한 '초록이 되자'는 

싱잉앤츠 정규 1집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 받았네> 앨범에 수록되었습니다.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검색 및 청취가 가능합니다.

M사에서 훑어보시려면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229683

싱잉앤츠가 걸어온 길과 그들의 끔찍한 게으름이 담긴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ssingingants





멤버들의 결혼과 이사, 각자의 과업으로 인해 7월 이후 한 번도 모이지 못하는 이 와중에

추억을 돌아보니 기분이 상콤하네요.

결혼과 사랑으로 밴드가 망한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지만

망하지 않고 2집까지 내고 싶은 소망이 있긴 합니다. 


개미처럼 살 수 밖에 없다면 그래도 노래하는 즐거운 개미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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