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건 아니다. 그저 변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나에겐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변해버린 고향과 함께 내 어린 시절도 잃어버렸다.
내가 살던 곳은 판교, 지금에야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 판교는 서울 근교에 있는 작고 아주 낡은 시골 동네였다. 어느 정도 시골이었냐 하면, 개울에 빨래터가 있었다. 친구네 집에는 마당에 수도펌프가 있는 집도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 논이 있고, 백현동에 사는 아이들은 산을 넘어서 학교를 다니기도 하는 그런 동네였다.
내가 처음 판교에 살게 된 건 5살 때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하게 되어 언니와 함께 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였다. 할머니 집 대문을 나오면 2차선 도로가 있었고 그 도로를 건너면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에서 나의 어린 시절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울에서 살았다. 물고기를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물놀이를 하고 시골생활에 진심인 어린이였다.
7살 때 엄마 아빠가 합가를 하면서 판교에서의 생활 이 이어졌다.
집에서 나와 논이 있는 길을 지나 언제나 550년이라고 쓰여있는 큰 느티나무 고개를 지나면 하얀색 ‘판교교회’가 나온다. 큰 미루나무를 지나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학교 가는 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이었다.
초등학교도 오래돼서 나무 바닥이며 난간이며 오래된 손때로 반질반질했다. 학교 테두리를 따라 아주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해서 가을에 운동회 준비를 하다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으면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큰 나무가 많은 탓에 어린이들은 싸우지 않아도 모두 사이좋게 그늘과 시원한 바람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떨어트리는 엄청난 양의 나뭇잎 덕분에 가을부터는 매일 아침 교문을 지나 서면 양손 가득 낙엽을 주워야 하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면 할아버지가 계신 밭으로 놀러 갔다. 할아버지의 밭은 산 아래에 있어서 개울을 건너 논을 한참 지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이쪽저쪽으로 논둑을 지나다녔다. 언니와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 서 가기도 하고, 일부러 돌아서 다니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밭에 도착하기 직전 미션 같은 길을 지나야 했는데, 수풀이 담처럼 둘러 쌓여있는 좁고 어두운 길이 있었다. 낮에도 어두운 그 길에서는 풀과 나무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길이 나오면 언니랑 나는 앞뒤로 서서 5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온 힘을 다해 달려서 지나갔다. 그러면 환한 빛이 보이면서 비밀의 화원처럼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밭에 있던 우물엔 항상 도롱뇽이 있는데, 언니랑 두 마리를 잡아서 병에 담아 오다가 서로 잡아먹는 걸 보고 놀라서 논에 병째로 던지고 소리를 지르면서 집까지 달려온 적도 있었다.
초여름에 엄마랑 저녁 장을 보고 돌아올 때, 반딧불이를 잡아서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서 집으로 오던 초여름밤의 냄새가 기억난다. 나의 감정의 기반, 자연에 대한 관심과 생물에 대한 아주 잡다한 지식들은 모두 그 시절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도롱뇽 알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비의 이름이 뭔지, 작은 실잠자리부터 왕 잠자리까지, 또 어떤 나무가 있고, 어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지 어떤 식물이 먹어도 되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계절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냄새가 나는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온 시절이었다.
그런데, 분당이 먼저 신도시가 되고, 그린벨트로 묶여있던 판교도 ‘재개발’이라는 걸 하게 됐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조합원이니 보상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어른들 사이를 오갔고, 점점 친구들도 줄어갔다.
우리 식구들도 분가를 하면서 5학년 때 용인으로 이사를 했고, 판교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아 계시는 상황이었다. 용인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주말마다 할머니 댁에 갔고 판교가 서서히 변해가는 걸 보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 때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됐고, 남아있던 주민들의 이주도 시작됐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었다. 80을 앞두고 젊은 시절부터 살았던 고향을 떠밀리듯이 떠나야만 했다. 이사하던 날 할머니는 짐을 다 싣고 차에 타시면서 눈물을 터트리셨다. 울면서 뭐라고 이야기하셨다. 욕지거리도 하셨던 것 같다. 우리 식구들 모두 눈물지었다.
판교에서 나온 보상금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원래 고향이었던 서천에 작은 집과 농사지을 조그만 땅을 마련해 드렸고 거기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지만 과연 그게 좋은 일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나이에는 새집보다는 그냥 익숙한 내 집에서 사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그 후로도 판교가 재개발된다는 이야기는 뉴스에 자주 나왔다. 사진이라도 남겨 놓으려고 대학교 때 종종 판교에 갔다. 동네엔 볼 상사 나운 현수막이 걸려있고, 사람이 없는 빈집은 이상하게도 을씨년스러웠다.
마지막으로 판교에 가서 내가 좋아하던 길을 갔을 때 ‘판교교회’의 간판이 바닥에 있었다. 마음이 이상했다. 어릴 때에는 참 크고 멀게 느껴졌었는데 동네가 참 작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가난한 동네였다. 큰 집안에 사글세로 방 한 칸 한 칸 살던 평지일 뿐이지 달동네 같은 동네였다. 어린 눈에는 그런 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살던 집 앞에 다다랐는데 집이 부서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눈물이 나와서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게 판교를 간 마지막이었다. 판교가 어떻게 변했고 좋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종종 들었다. 그런데 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변했는지 내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신기해하며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판교는 그때의 모습 이어야만 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업데이트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없겠지만 이런 식의 변화는 싫었다. 아무것도 못 알아볼 만큼 변해버리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형태로 변하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는 일이었다.
광역버스를 타고 강남을 다닐 때마다 판교를 지나갔다. 궁금하면서도 애써 보고 싶지 않아서 판교 즈음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는 일이 잦았다. 다행인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소음 때문에 아주 높은 방음벽이 설치되었고, 의도하지 않아도 잘 보이지 않게 됐다.
한동안은 지난 판교의 흔적들을 찾았다. 내 어린 시절 사진에서, 개발되기 전 마지막으로 찍어 두었던 사진들에서 찾아서 봤다. 그리고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들을 그린 책이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를 그린 책들 속에 혹시나 판교가 있을까 해서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다. 그 시절의 판교를 찾고 싶었다.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에게 근처에 있는 대학교 학생이 판교가 개발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각나서 수소문해 볼까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아니면 그림을 좀 더 잘 그려서 다행히 아직 남아있는 기억들을 그림으로라도 끄집어내서 남겨 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부모의 맞벌이로 할머니 댁에서 떨어져 지냈던 나는 너무 어렸고, 잘 지내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아녔는지 섭식장애가 와서 밥을 한 숟가락도 입에 넣지 않았다. 밥을 주면 헛구역질을 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요구르트 같은 것만 먹었는데 그런 걸 알았을 리 없는 어른들은 종아리를 때리고 혼을 냈다. 매일 긴 머리를 감기고 묶어주기 어려웠던 할머니는 내 머리를 남자아이처럼 커트머리로 잘라놨고, 매일 개울에서 살아서 피부가 까맣게 타서, 누가 봐도 ‘엄마 없는 애’처럼 지냈다.
나중에 엄마, 아빠가 판교로 들어오고 나서도 예민한 언니와 8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 사이에서 치여 눈치를 보며 살았다. 대학교에서 전공 공부를 하면서 그때의 ‘마음 아픈 어린이’ 였던 나를 만났다. 그 영향들이 성인이 돼서도 나를 힘들게 했고, 회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 이 걸렸다.
성인이 될 때까지 판교에 살다가 나온 친구들은 ‘지긋지긋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누가 몇억을 받았더라, 몇 십억, 몇 백억을 보상받아서 분당에 잘 사는 동네로 이사 갔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넉넉지 않은 보상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걸 지켜보며 점점 비어 가는 동네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동네로 들어가는 버스는 숫자가 줄어들고, 버스에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불빛이 넘쳐나는 분당을 지나 어두 컴컴한 판교로 들어가는 길이 좋았을 리 없다. 판교는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함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면 매번 똑같은 판교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하도 웃어서 눈물이 날만큼 이야기했다. 아주 소란스럽게.
하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누구도 우리가 살던 동네의 흔적을 일부러 찾아갔다거나 같이 가 보자고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각자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었든 간에 그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우리 모두는 고향을 잃었고, 어린 시절도 함께 잃어버렸다.
위 글은 '상실'이라는 주제로 글쓰기 모임에서 썼던 글입니다.
글을 쓰고 나니 어릴 때 시골에 살던 좋은 기억이 남아, 문경으로 훌쩍 내려오기를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처럼 전 또 시골생활에 진심인 어른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