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질문이 오지 않는 적당한 대답
결혼 7년 차 우리에게 아이는 없다.
마지막 직장까지 해서 7년 정도,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엄마, 아빠는 이 아이가 얼마나 예쁠까 싶은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정말 애기들을 좋아했다.
어릴 때 할머니가 '강아지랑 애기들은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본다'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아서 인지 나는 애기들이랑 금방 친해졌다. 학기 중간에 반에 들어가도, 낯을 심하게 가린다던 애들도 다른 선생님들이 좀 신기해할 정도로 아이들과 잘 적응했다. 막 말을 배우는, 꼼지락 거리는 작은 손이, 뒤뚱 거리며 걷는 그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이렇게 아이를 좋아했으니, 아이 없이 사는 삶이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던 건 아니다. 다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고 사는 것처럼 보였고,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기겠거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 건 아니었다. 병원을 가서 검사를 받아보긴 했고, 30대 중반이 넘어 1년 동안 자연임신이 되지 않으면 '난임'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대답을 들었다. 근데 그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친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늦게 시집을 갔고, 그때는 아직 결혼을 안 한 친구도, 아이가 없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던가, 무언가 위기감이 느껴진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과 둘이 사는 삶에 익숙해졌다. 술 생각이 나면 저녁에 둘이 술을 한잔하고, 밤늦게라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훌쩍 떠났다. 산책을 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둘이 걸으며 이야기했다. 늦잠도 마음껏 잤다. 그렇게 문경에 내려올 때도 크게 고민 없이 둘이 살던 짐을 싸서 이사 왔다. 그렇게 둘이 사는 게 익숙해졌고, 이제는 나이도 점점 많아져 아이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문경에는 출산 산부인과도, 난임이나 불임을 치료할 병원도 당연히 없었다. 도시에선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라 생각에도 없는 문제였다. 문경의 엄마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주변의 도시로 가야 했다. 환경마저 이렇게 되어버렸더니 그냥 둘이 사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왔더니 왜 애를 낳지 않냐는 질문을 너무 많이 받았다. 시부모님 조차 7년 동안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남들은 참 쉽게도 물어봤다. 나는 아이 생각이 없는 상태인데도 그런 질문들이 반복되자 은근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래서 나도 그 뒤로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굳이 결혼을 했냐거나, 아이가 있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삶의 형태는 워낙 다양하니 혼자 사는 사람도, 우리같이 아이가 없는 사람도, 결혼하고 아이가 적거나 많은 사람도 있다. 어느 것 하나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애는 있어야지" 꼬리의 꼬리를 무는 질문 공세를 피할 대답이 필요했다. 둘이 살아도 괜찮다고 하면 여러이야기를 하면서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굳이 그런 걸로 논쟁도 설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르신들이 자꾸 물으시면 어쩔 수 없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얼버무렸다.
무자식이 상 팔자 라길래. 무자식으로 살려고요.
왜 아이를 낳지 않냐는 질문에 "무자식이 상 팔자 라길래. 무자식으로 살려고요"라고 대답을 하면 그래도 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그래 자식 없이 편하게 사는 것도 괜찮아"라는 뜻밖의 대답을 듣기도 했다. 아주 좋은 대답을 찾았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누가 왜 애를 안 낳냐고 질문하면 저렇게 대답을 한다. 계획했든, 계획하지 않았든 모든 딩크들에게 이 대답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주욱- 상팔자로 살면서 저렇게 대답을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