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뜨를 해야 하는 이유 #0. 함뜨 합시다.
나랑 함뜨 할래?
뜨개질을 시작한 지 2개월 차. 시작한 편물이 채 5cm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함뜨를 제안받았다. 이제 막 코바늘에도 호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초보는 일단 좋다고 해버렸다. 그런데.. 함뜨가 뭐예요?
함뜨는 뜨개질을 하는 뜨개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함께 뜨기'의 줄임말이다. 이 단어가 나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뜨개질은 실과 바늘로 편물을 만드는 행위이니까 공동작업을 하지는 않으니 '혼자'하는 활동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걸 뜨는데 같이 모여서 무얼 한다는 걸까 싶었다.
뜨개질을 같이 한다고? 모여서? 단체로 같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초보 뜨개러! 뜨개 문화를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함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뜨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단 쉬었다 갈게요.
30살이 되던 해 n번째 직장에서 퇴사했다. 이전에도 퇴사를 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지금도 방황하고 있는 3n살 어른이지만 그 당시에는 방황을 넘어 발이 땅에 닿아있지도 않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다들 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홀로 부유하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삶이 끝날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당시에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라 벗어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n번째 퇴사를 했다.
무작정 질러버린 퇴사는 앞으로 계획되지 않은 무한한 시간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무얼 먼저 시작할까. 재취업 준비? 학업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자격증 공부? 역시 기술을 배워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친구들이 말했다. 일단 쉬고 생각해보자.
그래 일단 쉬자. 그런데 쉬는 게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20살 이후로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해보지 않은 채 10여 년을 살다 보니 잘 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취향이라는 것이 있었나 나는 뭘 좋아하나. 고민하던 차에 오랜 친구가 뜨개질을 같이 하자고 했다. 뜨개질이라니! 실이랑 바늘만 있으면 할 수 있고 정적인 활동이니 잘 쉬는 것과 딱 맞을 것 같았다.
왜 뜨개질인가.
선뜻 잘 쉬는 방법으로 뜨개질을 시작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20대 초반까지도 종종 뜨개질을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뜨개질은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잊을 수 없다는 것처럼 몸에 익은 기술 중 하나였다. 특별한 무늬를 만들 수는 없어도 겉뜨기, 안뜨기와 같은 기초적인 기술로 목도리나 장갑, 모자와 같은 것을 뜨곤 했다.
이미 방법을 알고 있는 취미니 진입할 때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뜨개질은 바늘과 실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 백수생활 동안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취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나중에 뜨개 모임을 하면서 산산조각 난다. 조각조각나버린 나의 뜨개 환상은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자.
뭐부터 시작하지?
뜨개질을 하기로 마음먹고 뜨개 도구를 사기 위해 인터넷에 무작정 검색해 보았다. 실, 대바늘, 코바늘, 돗바늘, 얀 홀더, 코막음 핀... 딱히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보이지 않은 정보들이 나왔다. 무엇을 뜰지에 따라서 도구가 달라지는 것 같아 무엇을 뜰지 먼저 생각해 보았다.
모양이 복잡하지 않고 쑥쑥 자라는 게 보여서 만족감이 큰 것, 그리고 시간이 많은 만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뜰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크고 단순한 편물. 그렇지만 사용할 수 있는 것. 고양이들 방석, 담요, 옷, 장식용 편물 등 후보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무늬가 반복되는 단색 담요를 뜨기로 했다. 몇 번의 인터넷 검색 끝에 실과 코바늘, 돗바늘, 도안과 설명 영상이 포함되어있는 세트를 구입했다. 그리고 약 네 달여 간 뜨개 도구는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 같이 함뜨(함께 뜨기)해요.
고이 모셔둔 뜨개 도구를 다시 꺼낸 건 실이 서랍 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취미는 역시 부동산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작은 집에는 만지지도 않는 실이 차지하는 공간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루빨리 실을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실을 다 떠서 치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편물이 느릿느릿 만들어지고 있던 중에 함뜨 제안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같이 바다로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가서 같이 바다도 보고 함뜨도 하자는 것. 이렇게 떠난 여행 동안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며 함께 뜨개질을 했다.
커피를 마시고 밖의 풍경을 보면서 뜨개질을 하면서 서로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니 너무나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편물도 더 잘 떠지는 것 같고 손도 빠르게 움직여졌다. 마치 혼자 공부하다 집중이 안 되는 날 카페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 더 잘되는 느낌과 같았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니 혼자 뜨개질을 하는 시간보다 함뜨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혼자 뜨는 것보다 뜨개질에 대해서 혹은 그냥 아무 상관없는 주제들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손을 바지런히 움직이는 시간이 좋아졌다. 함뜨를 하다 보니 점점 뜨개질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져 SNS로 뜨개를 하는 사람들의 계정을 구경하게 되었다. 같은 것을 뜨지 않아도 같은 장소와 시간 속에서 함께 뜨지 않아도 정보를 올리고 공유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지금 내가 푹 빠지게 된 이 함께 뜨는 뜨개질은 20대에 혼자 뜨개질을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함뜨는 뜨개질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편물을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지금은 뜨고 있는 그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초보 뜨개러인 나에게는 이제 틀려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다시 하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 막무가내로 세트를 사던 초보가 도구들의 종류를 알게 되고, 실 종류를 배우고, 인형을 뜨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떠보는 함뜨에 여러분을 초대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