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9박을 마치고 코펜하겐으로 출발하는 아침이었다. 어제 호텔로비에 부탁한 택시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친절하게 캐리어를 실어주었다. 익숙해진 호텔 주변을 지나며 그동안의 기억들이 센 강과 함께 흘러갔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을 나는 만났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꿈꾸었던 나의 삶의 한 조각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는 여행을 통해 만나고 싶었다. 이렇게 걷고 또 걸으면 그것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센 강은 모든 그리움이 흘러 들어가는 길목이다. 매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걸음은 언제나 센 강에 멈춰있었다. 강가에 머물러 앉아 있는 사람들 앞을 강물은 한시도 쉬지 않고 흘러갔다. 그 무엇도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없었다. 저항할 수 없이 밀려오는 저 물결은 언젠가는 내가 꼭 마주해야 했던 내 안의 열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저 물결과 함께 흘러가고 싶었다. 그러면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꿈에 다가갔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있는 그것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나는 센 강의 한 카페에 앉았다. 에스프레소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불행해질까? 나는 잠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은 어쩌면 내가 벗어나야 해야 내 안의 어떤 열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바란 건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실체를 드러내다가도 이내 숨어버렸다. 강은 흘러가고 나는 남을 것이다. 결국 흘러가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 물결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때론 천천히 때론 세차게 나를 휘몰아치는 물살에 대항하기도 하고 휩쓸리기도 하면서 온전히 물살을 겪어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은 카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처럼 너무나 쓰고 또 달콤했다.
시간이 꽤 지나 파리공항에 거의 다다를 무렵 돌연 택시기사가 다급한 통화를 시작했다. 그 시기에 파리는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시위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동안 조용했던 시위가 마지막날 시작되었는데 그 여파로 공항 제1 터미널로 빠지는 도로가 통제되었다. 택시 기사는 나를 고속도로 한 길가에 내리게 했다. 나의 손에는 카드 단말기가 쥐어졌고, 택시비 결재를 마치자 캐리어와 나를 덩그러니 남겨 놓고 택시 기사는 떠났다.
'저기요......'
순식간에 대로변에 남겨진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고속도로변에 즐비한 차들, 분명 몇 분 전에 나처럼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보았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도로는 정체되어 차량이 도로에 가득한데 그 길가에 나 혼자 정처 없이 서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저 앞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에게 다가갔다. 경찰은 내가 돌아온 길을 가리키며 되돌아가 길을 따라 내려가면 트램을 타고 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경찰의 설명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도대체 어느 길을 따라가야 트램을 탈 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또 한참을 길 위에 서있었다. 경찰에게 다시 다가갔다.
"나는 당신이 알려준 길을 잘 모르겠어요. 차라리 터미널을 향해 걸어가겠어요."
나는 경찰을 지나 앞으로 걷다가 가방을 들어,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내려왔다. 저 멀리 제1터미널이 보인다. 그냥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시간은 걸리고 힘은 들어도 터미널로 가는 길이 보여 안심이 되었다. 조금 전만 해도 길 한가운데서 서서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이 도로를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낯선 길 위에서 캐리어를 끌었던 파리에서의 나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예상하지도 바랬던 모습도 아니었지만 내가 사진첩에서 자주 꺼내보는 모습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찾아간다는 것은 꼭 내가 계획한 길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길을 잃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들이 없었을 때, 도무지 마음을 붙잡을 수 없을 만큼 혼돈이 왔을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걷는 길이 내 길이 된다. 길을 잃어버려야 우리는 비로소 길을 찾게 된다.